묵상구절

1월 12일 수요일 묵상구절 레16:1~17:9 속죄일

하나지기 2022. 1. 12. 10:00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14, 마태복음 13, 느헤미야 3, 사도행전 13

 

묵상구절

16: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 죽은 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 아론에게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마라. 그리하여야 네가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여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16:3 아론은 성소에 들어올 때,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16:4 거룩한 고운 베 속옷을 입으며 고운 베 속바지를 그 몸 위에 입고 고운 베 허리띠를 띠며 고운 베 관을 쓸 것이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다. 그는 물로 자기 몸을 씻고 그것들을 입을 것이며,

16: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로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를 가져오고,

16:6 아론은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로 수송아지를 드려서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16:7 또 그는 숫염소 두 마리를 가져다가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6:8 그 두 숫염소를 놓고 제비를 뽑을 것이니, 하나의 제비는 여호와를 위해서, 또 하나의 제비는 아사셀을 위해서 해야 한다.

16: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해 제비 뽑힌 숫염소를 가져와서 속죄 제물로 드리고,

16:10 아사셀을 위해 제비가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그것을 보내야 한다."

16:11 "아론은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로 수송아지를 드려,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되, 그는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를 잡고,

16:12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로 가득 채운 향로를 가지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가득 담아 휘장 안에 들어가서,

16:13 여호와 앞에서 향을 불 위에 놓고, 그 향 연기가 증거궤 위에 있는 속죄소를 가리게 하여야 할 것이니, 그래야 그가 죽지 않을 것이다.

16:14 그는 수송아지의 피를 조금 가져다가 자기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그 피 조금을 자기 손가락으로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리며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에 가져가, 그 피로 그가 수송아지의 피로 한 것처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그것을 뿌려야 한다.

16:16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함 가운데 그들과 함께 있는 회막을 위해서도 그같이 해야 한다.

16:17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신과 자신의 집안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회막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

16:18 그는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하고, 수송아지의 피와 숫염소의 피를 조금 가져다가 제단 주위의 뿔들 위에 발라야 한다.

16:19 또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그 피를 조금 그 위에 일곱 번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함에서 그것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

16:20 "그는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는 것을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숫염소를 가져오고,

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들의 범죄로 인한 모든 반역과 모든 죄과를 숫염소 위에 고백하고, 그것들을 숫염소의 머리에 올려놓아,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보내야 한다.

16:22 그 숫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자기 위에 짊어지고 인적이 없는 땅에 이르면, 아론은 그 숫염소를 광야에 놓아 주어야 한다."

16:23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그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고운 베옷들을 벗어 거기에 놓아 두고,

16:24 거룩한 곳에서 물로 자기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해야 하며,

16:25 속죄 제물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태워야 한다.

16:26 숫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물로 자기 몸을 씻어야 하며, 그런 후에 그는 진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16:27 속죄를 위하여 그 피를 성소 안에 가져간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염소는 진영 밖으로 운반하고,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불로 태우고,

16:28 그것들을 태운 사람도 자기 옷을 빨고 물로 자기 몸을 씻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그는 진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16:29 "이것이 너희를 위한 영원한 규례이니,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너희 자신을 괴롭게 하고, 본토인이든 너희 가운데 거주하는 거류민이든,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마라.

16:30 이는 이 날에 그가 너희를 위해 속죄가 이루어져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하게 될 것이다.

16:31 그것은 너희에게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너희는 너희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하니, 이것은 영원한 규례이다.

16:32 기름 부음을 받고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도록 위임받은 제사장은 속죄하고 고운 베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16:33 지성소를 위해 속죄하며 회막과 제단을 위해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회중의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16:34 이것은 너희를 위한 영원한 규례이니,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해야 한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1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7: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말하여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이다.

17:3 이스라엘 집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17:4 그것을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피 흘린 죄가 돌아갈 것이며, 그가 피를 흘렸으므로 그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

17: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이 들에서 잡던 희생 제물들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주어 그것들을 화목 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7:6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 위에 뿌리고, 그 기름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태워야 한다.

17:7 그들은 자신들이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들에게 다시는 희생 제물로 제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손 대대로 그들을 위한 영원한 규례이다.

17:8 너는 또 그들에게 일러라. 이스라엘 집에 속한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 거주하는 거류민 중에 어떤 사람이 번제나 희생 제물을 드리려 할 때

17:9 회막 문으로 그것을 가져가서 여호와께 드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스페셜 포인트**

본 단락에서부터 시작하는 제 16장의 세 문단은 연이어서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 제사 규례를 보도한다. 매년 7월 10일의 대속죄일 규례는 절기법의 요소도 있으나 여기서는 대속죄일의 근본 취지가 제사장과 일반 회중 모두를 망라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정기적 속죄를 통하여,전민족적 차원에서 선민 이스라엘 모두의 근본적 정결을 확보 내지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기본 장치라는 점에서 정결법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또한 여기의 대속죄일 규례는 그 기념 제사의 세부 절차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대속죄일 관련 기사의 통시적 파악을 위하여 그 내용 구성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매년 전민족적 차원에서의 정기적 속죄를 통하여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근본적 정결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기본 장치인 이 대속죄일의 규례는 먼저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속죄하여야 한다는 대속의 보편적 필요성을 보여 준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단 선민이 된 후에도 이처럼 정기적으로 속죄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개인 성도도 일단 중생하여 성도가 된 후에도 그 법적 지위상 영원한 의인이 된 것이지 그 인격 자체가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며 그 전반적, 근본적 죄책은 이미 영구히 벗었지만 각 구체적 죄의 영향력과 그에 대한 상벌의 심판은 남아 있으므로 성도가 된 이후의 죄에 대해서도 이제는 전날처럼 죄인과 심판자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로서 거듭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속죄의 은혜로 계속하여 사죄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같은 전민족적 차원에서의 정기적 속죄를 통한 구약 선민 이스라엘 민족 집단 전체의 정결의 회복은 우리에게 각 개인의 정결 뿐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성된 각 집단 전체도 높은 윤리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새삼 일깨워 준다. 각 집단이나 사회는 결국 각 개인의 확대된 자아이며 그 집단과 개인은 상호 긴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집단 내지 단체의 입장에서도 정결을 유지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나 집단 전체가 부패하고 오염된 상황에서는 각 개인의 정결도 유지되기 어렵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선은 각 개인의 정결이 중요하나 동시에 각자가 속한 집단의 정결, 곧 집단 윤리성에도 크나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속죄 의식 (레위기 16:1-4)

 

💡 **본문은 10장에 기록된 ‘아론의 두 아들의 죽음의 사건’을 이어받고 있다.**

10장과 본장 사이에는 일반 정결 관련 규례가 매우 길게 소개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해야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10:10) 지닌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그 직분을 경솔히 여기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 즉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답과 아비후가 지은 것과 같은 범죄를 막으시기 위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규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결법에 관한 긴 규례를 설명한 후에 이어지는 본장에서는 그 첫 구절에서 다시 한 번 제 10장에서 일어난 그 비극적인 사건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대제사장이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범치 않도록 엄히 경고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본절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 란 표현을 통해 그들이 죽음 당할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준 것은 본장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을 다시 열어 주는 규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나답과 아비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을 여전히 자신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긍훌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제사장은 나답과 아비후의 범죄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에 대한 섬김의 도리를 다
해야만 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도 죄인이었던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나답과 아비후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히며 살았던 죄인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이러한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Ⅰ. 속죄일에 관한 율법이 선포된 일자가 언급되어 있다.

즉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라고 했다(11절). 거기에 대해서는 10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1. 아론은 아직도 그의 집안에 어떤 죄가 남아 있거나 또는 그의 자녀들(제사장들은 죄지을 가능성이 그렇게 많으므로)이 그 후에 어떤 죄를 지어서 죽음으로써 자기의 집안이 멸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집안 죄를 속죄하는 방법을 지시해 주시어서, 하나님이 그 집안을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알리셨다. 죄를 속하는 것이 그 집안을 굳건히 세우는 일이요, 그 집안에 임할 축복을 지속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2. 제사장들은 나답과 아비후가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경건한 경외심(이것이 없이 나아가면 목숨이 위험하다)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셈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데에 필요한 지시 사항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 지시를 지키면 목숨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유익과 위안까지도 받으리라고 했다.

제사장들조차도 불합당하게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다가 죽었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하랴!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나아가지 않을 것이 아니라, 법칙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나머지 사람들은 죽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교훈을 주게 되는 것이다.

 

Ⅱ. 이 율법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그 의도 중의 하나는, 회막내에 있는 지성소에 대한 경외감을 간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속죄소(캅포레트)

  • ‘덮다’라는 뜻의 ‘카파르’에서 파생. ‘킵페트’는 죄를 덮어 주는 의미에서, ‘속죄하다’란 뜻. ‘캅포테르’는 영어역본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일어나는 곳이란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긍휴르이 자리(mercy-seat)’라고 번역했다.
  • 속죄소의 위치가’법궤 위에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캅포레트’ 가 가진 ‘덮다’ 란 뜻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법궤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을 새긴두 돌 판이 담겨 있었다(출 25:16).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지성소 안 법궤 위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 법궤에 들어있는 언약을 들여다보시므로 그 언약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자는 죄로 인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죄된 인간이 형벌을 피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선 언제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가 필요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강림하시면서 궤에 담긴 언약을 내려다보시기 전에 피가 발라져 그 위에 놓여 있는 속죄소를 먼저 보심으로써 백성들의 언약 불이행으로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내리기 전에 먼저 용서와 긍훌을 그들에게 베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을 덮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것이다.

 

그 지성소에는 세키나 곧 하나님의 영광이 구룹들 사이에 기꺼이 거하고 있었다. *"아론에게 이르라, 무시로 성소에 들어오지 않게 하라" (2절).* 그 회막 앞에는 제사장들 중 누군가가 매일 분향을 올리는 금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 회막 내에는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일 년에 한 번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도 중요한 의식과 깊은 조심을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 부정하거나 죄된 인간이 속죄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지성소 자체가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곳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강림해 계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속죄하는 희생의 피가 없이 임의로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구름을 가리키는 ‘아난’ 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만 볼 수 있을 뿐 속죄소 위에 강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 가운데 나타난다’ 는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고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 주는 표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면 죄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이 구름 속에서 임재하시므로 죽지 않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1:4)’ 라고 표현하고 있다. 죄악을 저지르는 ‘이스라엘’ 이란 말과 멀리 구별되어 있는 개념인 ‘거룩’ 이란 말은 서로 대조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죄악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 구름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걷혔다.

—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까지 죄악된 인간이 볼 수 없었던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요 1:14).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수시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히 10:19).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겐 하나님께 나아감이 더 이상 죽음의 이유가 아니라 생명의 약속이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특수한 임재를 나타내시는 그 곳은, 어디든지 저속한 곳이 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왕들이 거하는 소위 알현실이라는 곳에도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왕비 자신도 그럴 수 없었다면(에 4:11),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 그와 같은 신성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겠는가?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일어난 변화는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깨달으라.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이 지금은 회막을 통과하여, 매일같이 "담대히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 10:19, 20).

그리고 우리는 (아론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그와는 달리) "은총과 보좌" 곧 속죄소에까지 "담대히 나아간다" (히 6:16).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의 현현이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나는 때에는 그러한 특별한 제한과 규제가 요구되어 있었다. 감각의 대상물이 그들에게 친근히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들의 경외심이나 기쁨이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현현이 순전히 영적으로 나타나므로 달라진 것이다. 신앙의 대상과 더욱 친근히 교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들의 신중성과 선행을 많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손으로 지어지지 아니한 성소" (히 9:17)에 무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환영된다.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하늘의 처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2:6).

당시의 아론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시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언제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전과)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 구름과 함께 나타나셨다. 그러나 지금은 어두운 구름 속으로가 아니라, 맑은 거울을 보듯이 얼굴을 대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고후 3:18).

 

Ⅲ. 이 날의 집무는 대제사장에게만 맡겨졌다.

*"그러므로 아론을 성소에 들어오게 하라" (3절).* 그는 속죄일의 의식을 혼자서 직접 행해야 했다. 오직 한 사람의 제2인자, 곧 그를 대신하거나 보좌할 제사장이 한 사람 있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론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으며 병이 생기거나 의식법상의 부정을 범하여 그날의 예식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제사장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제사장이요, 그만이 속죄를 이룰 수 있으며 그에게는 보조자나 대치할 자가 필요치도 아니한 분이다.

 

💡 8:18에서 위임식 때에 제사장을 위해 드리는 번제물은 수양이었다. 본문에서도 대제사장을 위해 드리는 희생 예물이었기 때문에 수양을 번제로 드린 것이다(1:10-13; 8:18-21).

원래 번제는 모든 것을 태워서 하나님께 그 냄새를 올려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였다. 하지만 24절에서 보듯이 대속죄일에 드리는 번제에서는 속죄의 의미가 더 강조되었다(1:4).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는 죄된 인간이 죄의 문제를 어느 정도로 철저히 해결해야 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Ⅳ. 대제사장은 이 예식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만 특유했던 값비싼 옷을 입으면 안되었었다. 진귀한 보석이 달려 있는 그 예복을 입지 말고, 오직 하급 제사장들과 마찬가지의 옷인 세마포 옷을 입으라고 했다(4절). 그러한 의복을 입어야 이 수치의 날(죄 때문에 스스로 금식했으므로)에 그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것이다. 또 그의 옷이 얇거나 가벼워야, 그만큼 자기의 손을 일일이 거쳐야 되는 그 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보다 더 편리했을 것이다.

 

💡 **거룩한 세마포 옷.**

평상시 대제사장은 위엄과 존귀를 나타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8:7-9). 그러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와 같은 평상시에 부착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짠 에봇이나 판결 흉패를 달지 않았으며(출 28:4-39), 금으로 된 어떤 장식도 달지 않았다. 즉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반 제사장들이 입는 옷보다도 훨씬 소박하고 단순한 옷을 입었다(출 39:27-29).

백성들 가운데 있는 대제사장은 평상시에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화려한 의복은 그가 맡은 직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흠도 없으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인간은 자신이 비록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모든 영예를 벗고 이무런 꾸멈이 없이 성결을 상징하는 횐 옷을 입은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했다.

  •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식 없이 나아가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며,
  • 대제사장이 입은 흰색 세마포는 ‘거룩(코데쉬)’ 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들이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로 소개되었으며(겔 9:2.3.11 ; 10:2,6,7; 단 10:5; 12:6.7),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닮았으며(겔 1:1; 단 10:6),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계 1:13-16)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아론이 대속죄제를 드릴 때에 입었던 횐 옷은 단순히 화려함을 배제한 겸허한 종의 복장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완전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거룩하심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속죄일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의 이러한 이중적 측면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롬 8:29). 즉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같이 그 나라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은 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계 19:8).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죄를 대속하시었다. 그러나 그만이 입는 특별히 영광스런 옷을 입고서 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을 형체를 입으셨으니, 곧 세마포 옷을 입고 행하신 것이요, 그것은 참으로 정결한 옷이었지만 비천한 옷(사람이라는) 이었다.


●두 가지의 속죄제물 (레위기 16:5-14)

 

💡 여기서는 단순한 절기법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민족 차원에서 근본적인 정결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대속죄일 제사 규례가 일반 정결 규례 직후에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대속죄일은 일년 중 오직 한 날 곧 7월 10일에 대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들고 성막 안의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대속죄일 규례는 무죄한 자신의 피로 은 인류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가장 확연하게 예표하는 의식법으로 레위기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학자들에 의하면, 속죄일 전 7일 간 대제사장은 자기 집을 떠나 성전에 있는 거실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위대한 날의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이 7일 동안에는 하급 제사장들이 하던 제사나 기타 분향하는 일들을 직접 수행하면서 이 날의 예식에 익숙해지도록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제도에 관한 율법을 읽고 또 읽어서, 그 예식법 전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5절,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여기서 ‘회중’(congregation)은 4:13, 주로 법을 집행하는 대표자들의 무리를 가리킬 때 쓰임. 이들은 백성흘 대표하는 무리였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예물을 취하는 것은 모든 백성에게서 예물을 취하는 것과 동일한 것.

 

1. 그는 그 날 아침 일찍 평상시에 드리는 아침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예식을 시작하며 물론 그 예식 이전에 온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의 손발을 다시 씻어야 했다. 그리고는 매일 드리는 분향을 드렸고, 등(잔)에 불을 붙이고 나서, 이 날을 위해 특별히 지시된 제사를 드렸다(여기에는 없지만 민수기 29:8 을 참조).

즉 수송아지와 수양과, 일곱 마리의 어린양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야 했다. 이것은 그의 대제사장 복을 입고 거행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 백성의 번제는 모든 속죄 예식이 마쳐진 후에 아론의 번제와 함께 드려졌다(24절). 제 3절에서도 설명했듯이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번제에서는 헌신의 의미보다 속죄의 의미가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모든 죄를 속하는 일 년에 단 한 차례밖에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34절).

 

2. 그리고는 자기의 값진 송을 벗어버리고 다시 목욕을 하고 세마포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자기 자신을 위한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제물 이었다(6절). 이 수송아지는 성전과 제단 중간에 놓여졌다. 이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예물은 자기의 죄와 자기 집안의 죄를 엄숙히 고백하는 것이었고, 그 죄악의 용서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제물에는 대제사장이 자기 손으로 안수해야 했었다.

 

💡 **6~10절은 11~22절에서 행해지는 대속죄일 예식의 요악.**

아론이 자기를 위해 취한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를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더불어 거룩한 일에 동참한 제사장들을 위해 속죄 제물로 삼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

  • 원어상 ‘속죄’를 가리키는 단어에 드려지는 예물의 대속적인 기능이 강조되어 있다.
    • ‘카파르’ (~을 대신하다)
      1. 인격체에 대해서는 대속의 의미를, 사물의 경우에는 제물의 피를 속죄의 대상이 되는 사물 위에 발라서 그 대상을 부정하게 만든 백성의 죄를 가리운다는 의미가 강조된 것.
      2. 본문에서의 용법은, 대속죄일의 속죄 제물은 어느 특정한 죄에 대한 용서보다는 지난 한 해 동안 백성들이 지었던 모든 죄악들에 대한 총체적인 용서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이처럼 총체적인 용서의 기능을 가진 대속죄일의 속죄 제물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모습을 상징
    한다(요 1:29; 3:16).

아론이 자기 자신과 함께 모든 제사장들을 대속하는 속죄 예물을 드린 것의 의미는?

  • 백성들의 죄를 중보하는 자신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대속받아야 될 죄인들로서 결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중보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요청됨을 보여 준다.

 

3. 그리고 나서는 두 마리의 염소를 놓고 제비를 뽑아야 했다.

 

💡 두 마리를 취하는 것은

  • 한 마리는 속죄소의 위와 앞에 피를 뿌리기 위해서 필요했고(15절),
  •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기 위해서 필요(10절).

 

이 염소들은 (둘 다) 회중을 위한 하나의 속죄제물 이었다. 이 중의 한 마리 염소는 죽어야 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드리는 보상의 표시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추방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죄가 용서되고 제거됨을 표시하는 징표이었다.

그 두 마리 염소는 제비를 뽑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함께 바쳐야(보여야) 했다(7절). 그리고 나서 속죄 염소(아사셀 염소)는 산채로 하나님께 두어 두라고 했다(10절).

 

💡 **7절,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 이는 모든 예물이 누구에게 드려져야 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우상들과는 달리 하나님 여호와는 모든 예물을 드리는 그 자리에 친히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8절,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 여호와를 위한다는 것은 15-19절에서 드리는 예식에 소용된다는 의미. — 즉 이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 지속적으로 임재하실 수 있도록 그 분의 처소인 지성소와 희막과 단을 속죄하는 예식이다.
  • 한편 본문의 표현은 한 제비 자체가 여호와를 위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해당되는 제비에 뽑힌 염소를 성막 기구를 정결케 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10절, 아사셀을 위하여

  • 아사셀 염소 예식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었다(21,22절).
  • 여기에서 ‘아사셀을 위하여’ 가 무슨 의미에 대하여는 옥스포드 주석에 3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음.
  • 그 중 마지막 견해를 정리하면 ‘사람이 사는 곳과는 완전히 분뤼된 바위투성이의 낭떠러지 땅으로 내어 보내는 것’을 의미하고, ‘완전히 멸하는 것(total destruction)’의 상징적 행동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행위를 예표한다고 본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죄악을 지고 고난의 험한 길로 내어 보내져서 죽음의 낭떠러지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여야 할 영원한 축음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속죄의 대상이 누구인가?

  • 살아 있는 수염소의 경우에서도 아론은 백성의 대표로서 그들의 죄까지도 포함해 속죄 받은 것.
  • 대제사장이 이렇게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로 내보내지는 수염소가 상징하는 분임과 동시에(히 9:11.12) 그 수염소가 행하는 속죄의 대상이 되어 주신 사실을 그분이 받으신 세례 사건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 아론은 자신이 죄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여 속죄를 받았다.
    •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마 4:15). 실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대신하는 참 대속자시며, 우리를 대표하시는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밖으로 멀리 내보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염소들이 몸체가 작아 불쾌해서 죄의 불쾌감을 나타내 주므로 속죄 제물로 선택되었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이방인들이 염소 모양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을 숭배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다시는 염소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염소를 희생 제물로 드리도록 했다고 본다.

 

4.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대제사장 자신과 자기 집안의 죄를 위해 드린 수송아지를 잡는 일이었다(11절).

 

💡 **11~22절** :

  • 6~10절에 간단히 요약된 예식의 구체적 절차를 설명. 특별히 피 뿌리는 예식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나옴.
  • 나머지 예식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4:3~12에서 나온 대제사장의 속죄제 예식과 유사하기 때문. 그러나 피 뿌리는 예식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따로 설명됨.
  • 번제나 화목제나 속죄제의 예식에서는 예물을 잡는 자가 예배자로 소개되어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인 아론이 예물을 직접 잡았다.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에 제사장 자신이 직접 예물을 잡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4:4), 본문에서 아론이 예물을 직접 잡는 것도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한 사람의 예배자로서 자신의 죄를 위한 속함받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르기를, "이제 그는 수송아지를 다시 안수하고, 이미 했던 죄의 고백을 다시 하고 용서를 다시 빌면서 먼저 자기 자신과-자기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되지 못하고서야, 어찌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를 중재할 수 있으랴!-자기 집안의 죄 곧 식구들만이 아니라 아론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제사장들의 죄까지를 용서받아야 했다" 고 말한다(시 135:19).

이러한 순결은-거기에서 끝나고 말아서는 안 되지만-먼저 대제사장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수송아지를 죽이고 나면, 그는 다른 어떤 제사장에게 그 (양의)피가 굳어지지 않도록 계속 휘저으라고 했다.

 

5. 그리고 나서, 한 손에는 향로(아직 연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접시를 들고서, 그 성막을 지나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법궤로 나아가서 향로에 불을 피워 그 향기가 성소에 퍼지게 했다. 그러면 즉시 그 지성소의 실내는 연기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하는 법궤 위를 연기가 덮기까지는 법궤 쪽을 바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옆길로 지성소에 들어가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존전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뒷걸음질하여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잠시 기도한 후에 급히 성소에서 나와 백성 앞에 나타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대제사장이 잘못하여 여호와 앞에서 죽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거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 여호와 앞에서 분향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알리시고 있다.

또한 향을 피우는 것 뿐만 아니라 더욱이 연기를 피우게 하셔서 죄인된 인간의 눈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게 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셨다. —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3절, 속죄소가 구름과 같은 짙은 연기에 덮여 감추어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향을 매우 많이 피워 올려야 함을 의미.

  • 왜 그렇게 하게 하시는가?
  •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대제사장을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한 장소였기 때문에(출 25:22) 이처럼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는 것은 지성소 안에 들어온 제사장이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워서 제사장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Porter, Harrison).
  • 타오르는 연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 예를 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염병이 발했을 때에 아론이 단의 불을 담은 향로와 향을 취하여 회중 가운데서 향을 피워 속죄하여 염병이 그친 사건이 있었다(민 16:43-50). 이때의 향연도 단지 후각적 이미지가 아닌 기도라는 영적 이미지를 상징한다.
    •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기도의 향연으로 가리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 또한 타오르는 연기는 기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지극히 거룩하신 자의 영광을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가림으로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예배자의 기도가 예배자의 죄악을 가리워서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죄를 보고 그에게 노를 발하시지 않고 긍휼하심으로 죄인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4:6) 경배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단 4:34.35)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불러일으켜 죄악에서 용서를 받으며(마 6:12) 환란에서 건짐을(시 91:15) 입게 되는 실제적인 역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6. 그리고 나서는, 수송아지의 피를 휘젓고 있던 제사장에게 피를 받아, 그 피를 가지고 두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때의 지성소는 분향 연기로 가득차 있었던 때이다.

그리고는 속죄소 위에, 아니 그보다는 속죄소 쪽을 향하여(정면으로 바라보고) 먼저 한 번은 그 위에, 그 다음에는 속죄소의 아랫쪽을 향하여 7번 자기의 손가락으로 피를 뿌렸다(14절). 그러나 (유대인들이 설명하는 대로) 그 핏방울은 모두 땅바닥에 떨어지고 실상은 속죄소에는 묻지 않았다.

 

💡 **피를 동편에 뿌리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가?**

  • 동편은 바로 성소의 입구가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방향을 말한다(겔 43:2-4, Vriezen). 따라서 피를 동편에 뿌린 것은 지성소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길을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속죄소에 좌정하시러 임하실 때에 먼저 그 뿌려진피를 보시고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에게 용서와 긍휼을 베푸셨던 것.

7번씩 뿌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피를 일곱 번씩이나 뿌린 것은 속죄 행위의 완전함(completenes)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에게 있어 ‘7’ 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7일 만에 완전히 이루어진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절차상 아무런 부족함도 없는 완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아론이 드린 속죄제의 수송아지의 피를 일곱 번씩이나 뿌린 것은 제사장직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한 속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예식이 끝나면 그는 다시 지성소에서 나아와 피를 담은 그릇을 성소에 내려놓고, 거기서 물러 나왔다.


●백성을 위한 속죄제 (레위기 16:15-19)

  1. 대제사장이 속죄소 앞에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고 나와서, 백성을 위해 속죄 제물로 드릴 염소를 잡고(15절), 3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가 먼저 번처럼 그 염소의 피를 뿌렸다. 그리하면 그는 *"성소를 위하여 속죄를" 하는 것*이 된다.

— 즉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켜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계신다는 은혜의 임재를 나타내는 징표를 멀리 떠나게 만들었으므로, 성소조차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처로는 부적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죄로 인하여 속죄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백성들과 화해하셨던 하나님께서 계속 그들과 화해를 맺으시기 위해서였다.

 

💡 **5절의 수염소 중 다른 한 마리의 처리에 대한 명령. 여기에서 아론의 역할의 예표는?**

11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백성의 예물을 죽이는 주체는 대제사장인 아론. 그런데 11절에서 설명했듯이 예물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예물을 바치는 예배자이어야 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아론이 짐승을 직접 잡은 것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행위인 동시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예배자의 역할도 감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대제사장이 가지는 이러한 복합적인 역할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실제로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며 속죄의 길을 열어 주는 대제사장이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예배자의 모습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히 5:5).

 

  1. 그리고 나서는 회막의 외부를 위해서도 속죄를 해야 했다. 먼저 번에는 수송아지의 피를 뿌림으로써 회막의 안, 즉 내실을 위해 속죄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염소의 피를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각각 7번 뿌리라고 했다. 그 외부에는 진설병 식탁과 분향단이 놓여 있던 곳이다. 그러나 막(휘장)은 제외되었다. 이렇게 회막을 속죄해야 했던 이유가 암시되어 있다. "회막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한 중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6절).
  •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심령이 깨끗해야 할 필요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 때, 단지 그렇게 불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서 있기만 했던 그 회막조차도 속죄가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 또한 저들이 드리는 헌신행위와 경건한 의식들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못마땅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런 것을 위해서도 이러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 **16절, 왜 사물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닌데 피를 뿌리게 하시는가?**

  • 속죄의 대상이 지성소와 같이 사물일 때에는 지성소 자체에 죄가 있어서 그것에 피를 뿌려 속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백성의 죄의 영향이 커서 지성소에까지 미쳐서 부정하게 되었으므로 예물의 피를 뿌려서 지성소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통해 백성들의 죄악의 영향력까지 모두 제거함으로써 완전한 속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 — 다시 말해서 비록 백성들이 지성소 밖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소적으로는 떨어진 곳에서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직접적으로 더럽혔다. 그래서 지성소까지도 속죄를 필요로 했다.
  • 그러므로 피 뿌림을 통해 이루어진 지성소의 속죄는 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다시 정결하게 회복된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정결하게 된 지성소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에 해당되는 장소는 바로 ‘기도하는 심령’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짓는 죄악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어야 할 우리의 심령 속까지도 직접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그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명령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심령이 죄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마 5:23,24).
  •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을 정결하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심령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삶의 온전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만 한다.

속죄 받을 죄의 범위는?

  1. 가지 각색의 부정함을 다 포함. 특히 지난 한 해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모든 의식상의 부정함을 가리킨다(11~15장).
  2. 패역한 행동(act of rebellion).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의지적인 행동. 한 해 동안 쌓인 모든 거역의 행동을 다 포함한다.
  3. 우연하게, 또는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 모두 포함한다.

➥ 그러므로, 의지적인 죄악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지중에 저지른 죄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죄악을 다 포함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원어 성경은 속죄를 받지 않아도 되는 죄악이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

회막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할 것

  • 회막이란?
  •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시기 위해 세우셨던 ‘회막, 만남의 장막(오헬 모에드 1:1)’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표현.
  • 회막은 백성들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았고 장소적 측면이나 관계적 측면에서 밀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백성들이 은밀한 중에 혹은 부지중에 저지르는 크고 작은 죄악으로 인해 결국 부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 지성소에 대한 속죄: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하게 하는 효력을 가진다면,
    • 회막에 대한 속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만남을 지속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회막 역시 대제사장이나 백성들처럼 일 년에 한 차례 있는 대속죄일에 모든 부정함에서 정결케 되는 예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하급 제사장들은 아무도 회막에 들어올 수 없다(17절). 다만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회막 안에서 일하기에 부족하고 부적당한 자임을 고백해야 했던 것이다.

 

💡 **심지어 제사장들조차도 회막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금하신 명령의 의의는?**

  • 혹자는 본문을 이해할 때에 회막이란 표현을 성막 전체로 이해해서 성막 뜰 지역에도 어떤 사람이든지 머물러서는 안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사셀로 보내어질 산 염소는 이미 성막 뜰에 서 있었다(7절). 그리고 그 염소에게 안수하고 내보낼 때에 대제사장 아론이 성막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그 염소를 넘겨 주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적어도 성막 뜰 지역에는 아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절).
  • 따라서 어떤 사람도 회막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는성막 본체 안에 대제사장 외의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 이는 어느 누구도 대제사장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과 그를 돕기 위해 성막 본체 안으로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 이때 대제사장이 행하는 예식은 지성소 뿐만 아니라 성소 즉 성막 본체를 속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라도 회막 본체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회막을 더럽혀서 대제사장이 행하는 속죄 예식의 효력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곧바로 여호와의 영광으로 하여금 성막 본체에 머물러 있는 자를 삼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대제사장 한 사람이 모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홀로 회막에서 속죄 예식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것을 예표한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홀로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 백성에게 가능하게 하셨다(딤전 2:5)

 

 

3. 그 다음에 대제사장은 수송아지 피와 염소 피를 얼마간 취하여, 함께 섞어서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의 뿔에 발라야 했다(18, 19절).

분향 단에도 이 피를 발랐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러한 명령이 밝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출 30:1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지시는 대제사장을 번제단에 나아가 행하라고 한 지시로 본다 번제단도 여기서는 "여호와 앞에 있는 단" (12절)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에게 번제단으로 "나아가라" 고 했기 때문이며 그 번제단도 속죄가 필요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물과 제물은 모두 그 제단으로 가져 왔고, 그 제단은 여기에 나타난 대로 그들의 부정함에서 성결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18절, 향단에 대한 속죄의 의의은 무엇인가?**

  • 향단에 대한 속죄도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 대한 속죄로 보아야 한다(출30:10).
  • 향단에 대한 속죄: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은 이미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 다시 말해서 향단은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반면 번제단은 이미 임재해 계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예배하러 나오도록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제사장이 회막의 모든 예식을 마치고 나왔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따라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을 제 24절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는 본절에 나오는 향단의 속죄가 상징하는 바 제물을 드리거나 그외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볼 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심령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까지도 낱낱이 회개해야 한다(삼상 7:6; 계2:5)

  • 이스라엘 희중의 속죄를 위해 드린 ‘염소의 피’ 가 함께 발라진 이유는 지성소나 희막을 속죄할 때처럼(16절} 백성의 죄의 영향이 회막 내의 모든 부분에 다 미쳤기 때문이었다.
  • — 즉 출 30:10에서 향단이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향단을 속죄하는 것은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더럽혀진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었다(19절 설명 참조).

19절, 왜 그 피를 단에 바를 뿐만 아니라(18절) 그 위에 뿌리는가? 속죄의 피의 기능이 무엇인가?

  • 희생 짐승의 피를 통해 행하는 속죄 예식이 가지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것. 또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
    1. 부정에서 깨끗하게 함.
      • 한 가지의 부정이 아니라 모든 부정함을 통틀어 일컫는 말. — 이는 대속죄일의 속죄 예식이 1년 간 지었던 모든 죄를 속하는 총체적인 의식이었음을 보여 준다.
      • 그리스도께서도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할 때에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 고 약속하셨다(요일 1:9). 이는 그리스도께서 대속죄일에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대속을 십자가에서 피홀리심으로 단 한 번만에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단을 성결케 함.
      • 한글 개역 성경이 ‘성결케 할 것이요’ 라고 한 문장으로 번역했으나, 원어 성경을 보면 동사가 두 개 등장함. 두 동사는 각각 속죄의 과거와 미래의 차원을 말해줌.
        1. 정결케 하는 것(티하르): 과거의 부정을 제거.
        2. 거룩하게 하는 것(카도쉬): 미래의 부정을 위한 것.
    이로 보건대 속죄의 피의 기능과거를 청산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거룩한 바탕이 되어 준다. 그리스도의 피도 과거에 지은 우리의 죄사함만을 위해 흘리신 것이 아니라(계 1:5), 오고 오는 세월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이다(계 12-11; 히 10:19).

 


●속죄 염소 (레위기 16:20-28)

대제사장은 속죄물을 여호와께 드리고 그 피를 뿌렸다. 그리고는 아마 그 나머지의 피는 놋제단 밑에 부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속죄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20, 21절).

어떤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는 것에는, 언제나 죄의 고백이 동반되는 것이 제사의 본성이었다. 이 제사도 속죄제이므로, 죄의 고백이 따라와야 한다. 유대교의 비교적 후기의 타락된 시기에 가시는, 그들이 대제사장을 위해 일정한 고백 형식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아무런 죄의 고백문도 처방해 주시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은 그 백성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어떤 형식문도 필요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 죄의 고백은 가능한 한 낱낱이 해야 된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모든 범죄" 를 고해야 했던 것이다.

 

💡 21절, 죄를 **‘고하다’**

  • ‘고하다’는 단어는 ‘던지다’라는 뜻의 ‘야다’에서 파생. 어근 ‘야다’가 ‘던지다’라는 뜻을 가졌다는 점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안에 있는 죄악의 내용을 매우 적극적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던져 버리는(confess over)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수염소에게 안수함으로 죄의 전가를 이룸

  • 예배자가 자신의 죄의 고백을 쏟아내는 대상: 수염소.
  • 이는 또한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의 관계를 나타낸다. 구약 시대 제물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듯이 신약 시대의 예배자들은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여 죄를 토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그에게 전가되어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죄가 그 죄의 여러 가지 가중적인 사정에 따라서 여러 번 범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고백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뿐 아니라, 아간 처럼 "여차 여차한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수 7:20).

이렇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들을 그 염소의 머리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죄의 이행을 설정한 하나님의 명령을 신앙으로 준행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처벌을 그 희생 제물에게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러한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정말 웃음거리, 아니 그 보다 하나님은 모독하는 처사였을 것이다.

 

2. 그 다음에 그 염소는 즉시 이 (광야로 추방하는) 일을 위하여 선별된 적합한 사람의 손에 끌리어 광야로 내 보내졌다.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깨끗이, 완전히 용서하시는 뜻으로 그 염소를 광야로 내어 보내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리라"* 고 말씀하셨다(22절).

 

💡 **‘모든 불의를 지고’** 라는 표현은

그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할 죄에 대한 형벌까지를 지고 가는 것이며, 광야로 보내져 죽임당하는 것은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 대한 용서 뿐만 아니라 그 형벌까지 사함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명백히 예표한다.

  • 아무 죄가 없는 짐승으로서 사람들이 지은 죄를 전가받음으로 광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수염소의 처지에서 우리는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의 그리스도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 주님의 이 외침은 결코 원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전가 받아 하나님으로부터마저 외면 당하는 고통의 외침이었다. 이는 홀로 그 모든 죄의 형벌을 친히 지시고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죽음의 길로 향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속죄의 길을 걷는 속죄 예물의 입장에서 외쳐 고백한 것이었다.

그 염소를 어떻게 하는가? 광야에 놓아준다.

  • 미리 준비된 자가(21절) 염소를 광야까지 인도해 갈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그 염소를 풀어 주는 일까지 해야 했음을 보여 준다. 이때에 비로소 모든 속죄 예식이 마쳐졌다.
  •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구원 사역도 골고다를 향해 가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고 그곳에서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는 최후의 잔을 다 마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요 19:30).

 

그 염소를 (광야에서) 풀어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되지 않으리라" (렘 50:20)는 것을 보여주는 한 표적이었다. 후기 유대인들은 붉은 천 한 조각을 그 속죄 염소의 뿔에 매고 다른 한 조각을 성전 문이나 염소를 놓아 준 곳에 있는 바위 꼭대기에 매어 두는 습관을 가졌다. 그리고서 그들은 그 붉은 실이 희게 바래지면,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네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는 말씀과 같다(사 1:18). 또 덧붙여 말하기를, 로마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의 40년 동안은 그 붉은 천 조각이 조금도 변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실체(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인하여 그림자(제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고백이다.

 

3. 그 후 대제사장은 자기의 세마포 옷을 회막에서 벗어, 거기에 놓아두어야 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그 옷은 대제사장이나 다른 어느 제사장도 다시는 입지 아니했고 매년마다 옷을 새로 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물로 몸을 씻고, 자기의 값진 옷(대제사장복)으로 갈아입고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다(23,24절). 우리도 죄의 용서를 경험하는 축복을 받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속죄 제물의 은전을 입게 되면 우리도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아마 속죄 제물의 기름(기)을 사르는 일은 이 때까지 연기되었던 것 같다(25절). 그 기름기는 번제물과 함께 불살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 옥스퍼드의 견해: 대제사장이 몸을 씻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제사장이 평상시 임무를 수행할 때 입는 제사장복을 입기 전에 가지는 예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8:6,7)

아론이 속죄일에 입었던 간소한 세마포 의복을 벗고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나오는 모습은 성막의 일상적인 모든 기능이 다시 시작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 **24절, 속죄제를 통해 제사장과 회막과 백성이 모두 정결하게 된 후에 대제사장 아론이 제일 처음 행해야 했던 일은 번제를 드리는 것.**

  • 왜냐하면 번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제사였을 뿐만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드리는 예물이었기 때문(6:12; 민 28:24; 대하 2:4).
  • 속죄제 후에 드리는 번제의 목적은 본문에 명백히 나오는 바와 같이 자기와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속죄 제물을 통해서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6,11,17절) 번제물을 통해 또다시 속죄를 받으려 한 데는 이유가 있다.
  • ➥ 그것은 속죄제의 속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기 전에 죄인된 인간으로서 모든 부정함을 씻는 준비임에 반하여(16절), 번제를 통한 속죄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해 주신 자신의 정결함과 성막의 정결함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다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귀신이 쫓겨난 후에라도 새로워진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여전히 죄에 자신을 방치해 두면 후에는 악한 영에게 더 심하게 사로잡혀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고 만다(마 12:43-45). 따라서 대속죄를 통해 정함 받은 후에라도 끊임없이 번제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매일매일 계속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이 성도들에게 필요하다(고전6:19,20).

 

4. 그 두 가지 속죄물의 피는 회막 안으로 가져갔었고, 이제 그 고기는 모두 불살라야 했으되, 제단 위에서가 아니라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사르라고 했다.

이것은 참된 회개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제거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 죄가 깨끗이 제거되었음을 상징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그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

 

💡 **본문이 말하는 속죄제 ‘희생’이 무엇인가?**

  • 아론을 위해 드린 수송아지(3,6,11절),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드린 수염소(5,9,15절).
  • 4:8~10에 구체적 절차가 나옴.
  • 기름을 단에 모두 불사르는 이유: 모든 기름이 여호와의 것이었기 때문(3:16). ‘기름’은 ‘최상(the best)’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름은 예물 중 가장 최고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
  • ‘불사를 것’ : ‘희생 제물의 연기를 피어오르게 하다, 향이 피어오르게 하다’ ☞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이 드리는 속죄제 예물을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것을 암시.

➥ 온전한 희생을 상징하는 번제나 하나님과의 화친을 상징하는 화목제가 아닌 구체적인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드리는 속죄제라고 할지라도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그 넓으신 품으로 안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된다(눅 15:11-32; 요일 1:9).

 

5. 속죄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갔던 자와, 속죄 제물을 불사른 자들은 의식법상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옷과 몸을 씻어서 깨끗해지기 전에는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것은 죄의 추악한 성질을 상징해 준다. 죄 속함을 위해서 바쳐진 그 제물까지도 사람을 더럽게 한다. 또한 그것은 율법에 의한 제사의 불완전성도 상징해 준다. 그 제사의 제물을 만진 자들, 그들에게조차도 어떤 오점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제사는 결코 죄를 제거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옷을 빠는 이유가 무엇인가?**

  • 그가 진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옷을 빠는 것. 진 밖에서 예물을 불사른 자도 들어 오기 전에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했던 것을 볼 때에도 진 밖과 부정과는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28절). 11-15장의 규정들에서도 부정하게 된 자들은 모두 진 밖으로 내어 보내졌던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진의 안과 밖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과 부정함을 나누는 경계선인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진 밖에 나간 자는 거룩한 진영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옷을 빨고 몸을 씻어서 모든 부정함을 제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 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거룩하게 지켜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 가야 하는 것을 말해 준다

 

6.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대제사장은 자기의 향로를 가지러 다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도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규례가 된 속죄일 (레위기 16:29-34)

 

Ⅰ. 여기에는 이 큰 제전에 대한 몇 가지 지시 사항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제전을 지키라고 지정된 일자.

그 날은 매년 "제 7월의 제 10일" 에 지키라고 했다(29절). 제 7월이란 사실상으로 제 1월로 계산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낸 바로 그 달을 그 후로부터는 제 1월(정월)로 계산하고 그렇게 부르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자들은, 제 7월의 제 10일되는 날은 인류의 처음 시조들이 타락했던 날이므로 그들의 타락을 기억하면서 안식일로 지켰다고 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날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온 그 날이요, 그 때에 모세는 새로운 법판을 들고 왔고, 모세의 얼굴에 광체가 나던 바로 그 날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그 날은 이스라엘의 온 세대를 걸쳐서 지킬 속죄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사건으로 지은 자기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기억할진대, 회개를 하면 저들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이 날에 지켜야 할 백성들의 의무.

(1) 그들은 모든 노동을 쉬어야 한다. *"그 날은 큰 안식일 (안식의 안식일)이니라." (31절)*

속죄일을 위해 해야 할 일만 해도 그 날의 일은 넉넉하며 그 의식을 잘 수행하자면 하루일거리는 족히 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다른 일은 일체 할 수도 없었다. 죄를 위하여 고행하는 일에 전심 전력하고, 다른 일에 전혀 마음을 쏟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속죄일은 이사야 예언자가 안식일이라고 일컬었던 그 날인 것 같다(사 58:13). 왜냐하면 다같이 단식을 하라는 언급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괴롭혀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내적으로 고행하며, 영혼의 참회를 표하는 뜻에서 육체적인 일체의 오락이나 환락을 금해야 했다. 이 날에는 모두가 (병자와 어린이는 제외) 단식하고, 장신구를 떼어놓고, 기름을 바르지도 아니했다. 다니엘도 그렇게 했다(단 10:3, 12). "다윗도 단식으로 그의 영혼을 괴롭게 했다(시 35:13). 또한 이것은 죄의 추악함과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과, "흉악한 결박을 풀어 버리는 것" (사 58:6)을 의미한다.

유대 학자들은, 그 날이 그들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므로, 그 날에는 성경까지도 저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읽지 않아야 했다고 말한다.

 

💡 **괴롭게 하다(아나)**

  •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금식하는 것을 말한다. 금시고가 동시에 굵은 베옷을 입는 것과 통회하는 기도가 동반되었다.
  • ‘스스로를 낮추다’ 라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높이고 신뢰하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실제적인 믿
    음의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괴롭게 하는 기간은 일곱번째 달 구 일 저녁부터 이틈날 저녁까지였다 (23:32).

30절,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 속죄를 행하기 위해서. 모든 부정에서 정결케 되는 대속죄였기 때문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모든 생계 유지를 위한 일을 멈추고 심지어 먹는 일까지도 멈추고 속죄 예식에 참여해야 했다. 이 명령은 사람이 가진 생명의 원천이 음식에 있지 않음과 모든 행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생계 유지에 있지 않음을 가르쳐 준다(마 4:4; 6:33).
  •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대속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모든 일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했던 것,.
    •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 이 표현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는 그 앞에서 부정에서 깨끗하게 될 것임을 말해 줌.
    • 그리고 ‘이날에’ 라고 번역된 단어는 ‘안식일’ 을 가리킨다. 즉 속죄 예식이 행해진 날은 안식일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만민에게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줌을 예표하고 있다.
    • 또한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하지 않아야 했지만 제사장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행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다(마 12:5). 이것은 안식일이 단지 일을 행하지 않는 날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정결케 하는 날이라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3. 이 제도의 영속성. "그것은 영원한 규례니라" (29, 34절).

그러므로 이 의식은 이 율법이 해소되든가 원형(그리스도)에 의해서 모형이 필요 없게 되는 그 때가 오기까지는, 결코 어느 해이고 중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죄를 계속 범하는 한, 우리는 계속하여 회개하고 속죄 받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이 율법은, 영원한 율례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눈물과 한숨이 모두 사라지는 그 곳에 우리가 도착하기까지는 계속하여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사도는, 이 사실을 율법의 제사가 죄를 제거하고 그 죄에서 양심을 깨끗이 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았다. 즉 그것은 속죄일이 되면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 이라고 했다(히 10:1-3). 제사를 매년 드려야 했다는 것은, 그 제사가 죄를 속하는 데에는 미약한 효력밖에 못 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속죄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으로 단 번에 드린 제사" 로만 가능한 것이다(히 7:27 참조). 또한 그 한 번으로 족하다. 이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없다.

 

💡 **‘영원히’**

  • ‘영원히’ 라고 번역된 ‘올람’ 은 때로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창 21:33) 여기서는 단지 ‘오랫동안 지속되는 기간’ 을 의미. →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다(3:17; 6:18).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이후에도 지속되는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정하신 때까지 그 효력이 지속될 것이란 의미이다(갈 4:4).
  • 더욱이 ‘너희는’ 이라고 번역된 ‘라켐’ 은 ‘너희를 위하여’ 라는 뜻이다. — 이 표현은 본문의 규정이 너희. 즉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에만 제한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규례의 영원성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것을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그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 작용하며 그분이 오실 때에 완전히 성취되어질 규례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그러나 본문에서 이 표현이 쓰인 본래 의도는 대속죄일 예식을 수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7:36; 출 12:14 ; 27:21). 대속죄일에 대한 규례를 말하면서 ‘너희
    를 위하여(라캠)’ 라는 표현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나온 것을 볼 때에도(29,31.34절), 지금까지 누누히 언급해온 대속죄일 규례를 지키는 일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34절의, 속죄의 대상, 범위

  • ‘모든 죄’.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와 다르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대속이셨기 때문에 모든 죄에서 사하신 사건이 해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사역으로 완성되었고 종결되었다(히 7:27).
  • 따라서 한 번 회개한 자가 비록 죄를 반복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이루신 그 사죄의 약속을 믿는 것과 그 대속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어떤 죄는 용서해 주시고 또 어떤 죄는 용서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누구에게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년에 한 차례씩 새롭게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Ⅱ. 이 모든 율법 속에 어떤 복음이 들어 있는지를 깨닫도록 하자.

 

1. ① 죄의 용서와, ②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복음의 위대한 두 가지 특권이 상징되어 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모두 우리 주 예수의 중보에 힘입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을 속해 주셨다. 그가 친히 그 속죄의 저작자요, 제물이 되셨다.

[1] 그는 제사장, 대제사장이시오, 그가 "백성의 죄를 구속" 하시기 때문이다(히 2:17).

✿그분, 그리고 그분만이 per negotio-그 일에 합당하며, 그런 명예를 지닐 자격이 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지명하시고 성별 하신 자이며,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이시니, "하나님은 그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하셨다(롬 1:20).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성취하셨다. 그것은 주 예수의 성결과, 모든 죄에서 완전히 깨끗하심과 온갖 은총으로 꾸며진 그의 아름다움을 상징해 주었다.

아무도 대제사장이 속죄를 하는 동안 함께(성소에) 있지 못한다고 했다(17절).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홀로 포도즙틀을 밟고", "아무도 그와 함께 할 자가 없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사 63:3). 그러므로 그가 수난을 받을 때에는, "모든 제사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갔던 것이다" (마 26:56). 만약 어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가서 그와 함께 죽었다면 그들이 속죄하는 일을 도와 준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수난당하는 자가 강도밖에는 없었으나 그들은 그러한 의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제사장이 속죄한 구속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과 제사장들과 그리고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하라고 했다(33절). 그리스도의 사죄는 성직자들이나 일반 백성 모두의 "거룩한(그리고 거룩하지 아니한) 것의 죄악" 을 속해 준다. 우리가 제 의식들의 특전을 받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혜택을 입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에 의한 것이다. 대제사장이 이룬 속죄는 이스라엘 회중에게만 국한되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는 유대인의 죄만이 아니라 온 이방 세계의 죄악도 위함이다.

✿또한 아론은 자기의 죄를 위해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그는 자기의 속죄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고백해야 했다-에서, 역시 그리스도는 아론보다도 무한히 뛰어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속죄를 필요로 하는 당신 자신의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대제사장이 되었다" (히 7:26). 또한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은 물 속에 서서 "저들의 죄를 고백" 했지만(마 3:6), 그는 "물에서 곧장 나왔던" 것이니(마 3:16), 그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는 대제사장이시듯, 그는 친히 속죄를 이루는 그 제물이 스스로 되시었다. 그는 홀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예물을 이루는 두 마리의 염소에 의하여 예표가 되셨다. 죽임당한 염소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상징하며, 광야에 쫓겨난 속죄 염소는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어느 염소를 죽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결정되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 준바" 되었기 때문이다(행 2:23).

  1. 첫째는, 그 속죄는 이스라엘의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옮겨 둠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어떤 학자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속죄일인 제 7월의 10일 이었다고 추정한다.
  2. 그리고 나서 그는 중보자로서 그의 직무에 임하셨다. 수세 후 즉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셨다" (마 4:1). 그것은 곧 무인지경에로 끌려가신 것이다.
  3. 죄란 마땅히 버림받고 망각의 땅으로 쫓겨나야 한다. 그러나 그 처벌은 그들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염소에게 이행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 (사 63:6)을 우리 주 예수 (그분은 이 모든 그림자의 실체이시다)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다(벧전 2:24).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 즉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되셨다(고후 5:21). 그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셨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는 버림받으시고, 잠시 동안 잊혀지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가 버림받지 않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4. 둘째로, 이 의식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과는 망각의 땅으로 옮겨졌다.
  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즉 친히 그 죄를 자기 몸에 지고 가신 것이다(요 1:29). 하나님이 죄를 용서할 때에는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으신다고 했다(히 8:12). 즉 "하나님의 등뒤로 죄를 던지시고" (사 38:17).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신다" (미 7:9). 또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를 멀리 가져가신다(시 103:12).

(2)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상징한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보여준 바와 같다(히 9:7 이하).

 

[1] 하늘 나라는 가장 거룩한 곳이지만 사람이 건립한 곳이 아니며 거기에 들어가는 길은 믿음, 희망, 그리고 기도에 의하여 중보자를 통하여서 갈 수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밝히 그 길이 나타나 있지만 그 때에는 지금처럼 그렇게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2]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승천하시사 하늘 나라에 들어가셨다. 또 그는 그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인들의 이름으로 한 공적 임무를 띠고, 그의 육체의 휘장을 통과하여 들어가셨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휘장이기 때문에 찢겨진 것이다(히 10:20).

[3] 그는 "자기의 피로" (히 9:12).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는 지상에서 드린 그 제물의 공로를 스스로 지니고 하늘에 이르셨다. 그래서 자기의 피를 뿌리신 것이다. 말하자면 속죄소 앞에 자기의 피를 뿌렸다. 이 피는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합치는 것 이상의 것을 이루셨다. 그래서 그는 "죽임당한 어린양으로서" (계 5:6), 하나님의 보좌 중앙에 계신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는 속죄할 수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히 9:12)을 이루셨고, 그 자신의 옛 영광을 스스로 회복한 것(요 17:4, 5)은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이다.

[4] 대제사장은 성소에서 분향을 올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사죄에 의하여, 그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휘장 안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드리고 있는 중재(기도)를 상징한다. 우리는 이 분향의 구름이 속죄소를 덮고 있지 않다면야, 감히 속죄소 앞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중보자의 중재가 없다면 단순한 긍휼 그 자체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중재가 "이 향" 처럼 향내 나는 향기로서 하나님의 앞에 드려져 있다.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해 먼저 중재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 가족,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했으나 우리 주 예수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드릴 중재의 전조이다. 자신을 먼저 하늘 아버지께 맡기고 다음에는 그의 집안에 사는 제자들을, 그 후에 그들의 말씀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들 곧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이렇게 그의 예물의 용도와 의도에 관하여 언급하신 다음에 그는 즉시 붙잡히시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러한 모든 뜻에 따라서 되어진 일들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출입구도 역시 아론의 업적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것이다. 즉 아론은 자기의 친아들조차도 지성소에 다시 들어가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성별하시사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마련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거기에 "들어갈 담력" 을 얻게 되는 것이다. (히 10:19, 20).

[6] 대제사장은 거기서 다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영원히 거기 사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알현하고 계시며 중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두로서 먼저 들어가셨고, 거기에서 우리를 위한 대표자로서 계속하여 거주하신다.

 

2. 여기에는 또한 신앙과 회개라는 복음의 두 가지 큰 의무가 예시되어 있다. 그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속죄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 속죄의 은혜를 입을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1)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의지하며 우리의 죄를 속해 주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죄밖에 없음을 탄원하면서 믿음으로써 그 죄물의 머리에 우리의 손을 얹어야 한다(죄를 고백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왕상 18:37). 이것이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나이다(고전 15:12). 그러므로 그의 은총과 다스림에 나를 진심으로 순복하오니, 나는 그 안에서 구속함을 입었나이다."

(2)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해야 한다.

잠시 우리의 육체의 환락을 끊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우리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자기 부정과 극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죄를 참회하는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통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속죄 제물에 신앙의 손을 얹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 (요일 1:9)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3) 마지막으로 희년에는, 자유를 선포하는 나팔 소리가 "속죄일" 이 끝날 때에 울러퍼지게 하라고 했다(25:9).

우리의 죄책이 사해졌고, 우리의 속박이 풀이었으며, 우리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리니,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중재에 힘입음이라. 이 속죄제물로 인하여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

 

💡 **34절,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 10:1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드림으로 불순종과 무지의 제사를 드리려다가 죽임을 당한 것과 달리 본문에서는 아론의 철저한 순종을 언급해 주는 것으로 본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는 비로소 제사장직의 온전한 수행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 금지령 (레위기 17:1-9)

이 율례는 모든 이스라엘인은 저들의 제물을 하나님의 제단으로 가져올 것이며 거기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Ⅰ. 이 율례가 있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1. 모든 백성 누구나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되었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을 치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었고, 모든 집안의 가장들은 그 집안의 제사장이었었다. 욥도 그러했다(욥 1:5).
  2. 이러한 자유는 우상 숭배의 한 계기가 되어 왔었다. 각자가 자기의 제사장이고, 각자가 자기의 제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점차로 그들의 생각은 허황해져 자기들 마음대로 신을 만들어 버리고 "악마(한글 개역과는 다름)에게 제사했던" 것이다(7절). 악마라는 말의 어원은 거치른 혹은 수염소(한글개역)라는 의미이다. 아마 악마의 영들은 종종 그러한 수염소의 모양으로 묘사되었고, 거기에 그들은 제사를 드렸고 그들의 제사는 거기에 열납되어졌었기 때문이다. 악마는 하나님께 반기를 든 반역자가 된 이래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 하나님께 속해 있는 거룩한 영광을 가로채려고 해 왔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우리의 거룩하신 구주에게 "내게 절하여 경배해보라" 는 말을 속삭였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에서 마귀를 섬기는 법을 직접 배웠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영광스런 현현을 보이시고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줄곧 마귀 숭배를 계속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이 악마들에게 "음란히 섬겼다" 는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음행이 결혼 계약에 위배가 되듯이,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저들의 계약에 대한 위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 숭배에 깊이 중독되어 있으며 우상숭배에 잘 길들어져 있으며 마치 자신들을 음란함에 내어 주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엡 4:19) 자들처럼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 이시라고 칭하셨던 것이다.

 

Ⅱ. 이 율법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1.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이런 금령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먹을 것을 위해서조차도 "회막 문" 외에서는 소, 양, 송아지, 어린 양, 염소 따위의 짐승을 죽일 수 없으며 이 율법에 따라서 회막문에서만 제물을 잡고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며 그 고기는 화목 제물과 마찬가지로 제물을 가져온 자에게 식용으로 되돌려 주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 율법은 이러한 견해에 맞는 것 같다(3, 4절), 본문에서는 소, 양, 염소 따위를 죽이는 일에 관한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식이 풍부한 쿠드워드(Cudworth) 박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들의 회막이 그들의 진 한가운데 있어서 그들과 매우 가까이 있었을 동안에는,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고는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자 이 율법은 바뀌었고(신 12:21), 집에서도 노루나 사슴뿐만 아니라, 소나 양, 염소 따위의 가축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 년에 3번만 하나님의 회막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면 된다고 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는 아마 화목제물의 고기 외에는 별로 고기를 먹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저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축을 보존하여 번성케 하기 위해서 금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에 실증이 나서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이었었고, 그 때 모세는 그들을 다 먹이려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양떼나 소떼" 를 다 잡아 먹여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민 11:4, 22). 그러나 이런 일시적인 율법이 "영원한 규례" (7절)라고 밝히 말해졌다고는 추측할 수 없다.

  1. 그러므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제단 외에서는 희생 제물만은 잡지 말라는 금령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전과 같이 "들에서" (5절)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제사장을 통해서 여호와의 제단 위에서만 드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들의 제사는 제사장과 제단을 거쳐서만 된다고 한정한 이 엄숙한 의식에 대하여, 거기에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나중에 증언되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인들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개종자들이나 할례 받은 외국인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도 역시 자기들이 옛날에 지켜오던 예배 방식을 고수하려는 위험에 처하여 있었던 사람들이다.

 

누구든 이 율법을 어기고, 회막이 아닌 곳에서 제사를 드리면

(1) 그 죄책은 매우 크다.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4절). 그가 비록 한 마리의 짐승을 죽였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시지 않은 곳에서 죽였으면 그 사람은 살인자처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등 피조물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유의 한계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그 특혜를 누릴 수 없다. 그러한 권리는 잔인하게, 또는 미신적 습관에 의해서는 수행될 수 없는 그런 권리이다(창 9:3, 4). 우상으로 삼거나 거짓 신을 섬기기 위해서 짐승을 죽이는 일만큼 짐승을 악용하는 일은 없다. 바울 사도가 모든 피조물이 부패와 허무의 굴레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롬 8:20, 21; 레 1:23, 25 와 비교하여 보라).

우상 숭배로 제물을 드리는 것은 음행뿐만이 아니라 살인자로 여겨졌다. 그런 식으로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느니라" (사 66:3).

(2) 그 형벌은 가혹했다.

"그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 끊쳐지리라" 고 했다. 그러한 범죄가 드러나 악명이 높아졌을 때에는, 재판관이 그를 처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분명하게 처벌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 범죄자는 하나님의 정의가 내리시는 어떤 간접적인 공격에 의해서 목이 달아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그들의 모든 희생 제물을 일정한 장소에만 드리도록 엄하게 명령했는가?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 그것은 우상과 미신 숭배를 막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 의 종인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서 제사 드려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규례대로 되도록 보살피는 자 곧 하나님의 집의 지도자 대제사장이 보는 가운데서 드려져야 한다. 그래야 그 제물이 드려질 때 율법에 의해 드려지고, 저들이 창안해 낸 법에 의해서 드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의 영예를 보존하며, 특히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리게 되면 퇴락해 버릴지도 모르는 그 제사의 특별한 품위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3] 그들은 모두 한 제단에 모임으로써, 한 집안의 자녀들이 모두 같은 식탁에서 만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 간의 통일성과 형제애를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고 여호와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이 율법은 어떻게 준수되었는가?

  1.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순결을 지키는 동안에는 이 율법에 열심을 내어 매우 큰 관심으로 존중했다. 그들이 두 지파 반(2.5 지파)이 자기들 마음대로 건립한 제단을 파괴하는 데에 보여주었던 굉장한 열심과 비교될 수 있었다. 즉 그 두 지파 반이 세운 제단을 저들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아니했고-그것은 제사나 예물을 위해서 설계된 것이 아니므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은 결코 그 제단의 존립 자체도 허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수 22:12 이하).
  2. 이 율법은 수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많이 범해졌으며 그것이 유대 교회의 수치와, 복구될 수 없는 부패가 되었다. 비록 훌륭한 왕들의 기록 속에서도 "산당이 제거되지 아니하였고......" 하는 불평이 종종 증언되고 있다.
  3. 그러나 이 율법은 특별한 경우를 당하여서는 예외를 인정하였다. 기드온의 제사(삿 6:26), 마노아의 제사(삿 13:19), 사무엘의 제사(삼상 7:9; 9:13; 11:15), 다윗의 제사(삼하 24:18), 그리고 엘리야의 제사(왕상 18:23) 따위는 통상적인 장소에서 드려지지 아니했지만 열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들은 모든 천사의 명령이 있었거나 예언자들이 드린 경우이다. 실로가 폐허로 변하여 성전이 건립되기 전, 아직 법궤와 제단이 안치되기 전에는 어디에서도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Ⅳ. 이 문제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이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 우리가 드릴 영적 제사는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만 드리라고 헌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 점을 명백히 말씀해 주셨고(요 4:21), 바울 사도도 "도처에서 분향이 드려지리라" (말 1:11)는 예언 말씀을 따라 말해 주었다(딤전 2:8). 우리에게는 이제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해 주는 성전이나 제단이 없으며 복음적인 통일성은 어느 한 장소에 매여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그것이 있으니, 곧 "영의 통일성" 이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시다. "참된 장막" 이시다(히 8:2; 13:10).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며, 우리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도 그 안에서 가능하며, 오직 그 안에서만 된다(벧전 2:5). 다른 중보자를 둔다거나 다른 제단을 세우거나 다른 속죄물을 바치면, 사실상 다른 신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통일성의 중심이시니,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서로 만난다.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공중 예배를 존중해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히 10:25). 여호와는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 하신다(겔 20:4 참조). 하나님은 가정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물을 은혜로이 받으실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회막의 문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