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7, 8, 히브리서 11, 아모스 5, 누가복음 1:1~38
묵상구절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15: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15: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15: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말렉을 진멸하되 아각을 살림(사무엘상 15:1-9)
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울에게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고 엄중히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울이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가지고 그를 시험하고자 한다고 명백히 가르쳐 주었다(1절). 이처럼 그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한다는 것을 밝혔으니 만큼 그의 불순종의 죄는 더욱 큰 것이 되었다.
👉 사울은 이미 그의 재위 초기에 볼레셋과의 전투 중에 제사장의 직무를 침해하는(13:13, 14)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사무엘로부터 그의 통치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본절은 그 사건이 있은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루어진 일이다. 구약 성경 학자 레온 우드는 다윗과 사울의 사건을 비교하면서 본절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이 약 23년 만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한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경에 헤브론에서 유다 왕이 되었는데(삼하 2:1-4), 만일 다윗이 최초로 기름부음 받은 때(16:11,12)를 대략 15세 전후로 본다면, 그 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가 되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경에 벌어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무엘이 사울을 떠난 것은 B.C. 1048년경에 있은 믹마스 전투 때(14장)이므로 결국 사울과 헤어진 지 약 23년 만에 만났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많은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는 것은 단지 두 사람 사이에 인간적 관계가 소원해졌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음을 반영한다.
본문에서 사무엘이 23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을 깨고 사울을 다시 찾은 것은 단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사울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울의 불순중에 대한 심판적 경고 후 하나님께서 다시 사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롬 2:4; 벧후 3:9).
사실 사울에게는 이번이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의 기회로 사용함으로써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 결국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못하고 영원히 버림받게 된 당위성을 보여준다.
-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다."
하나님은 왕에게 왕의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왕이 하나님을 위해 그 권세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왕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왕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드릴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그대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왕은 이스라엘의 분쟁들을 해결하고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한다. 왕은 이스라엘을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왕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자며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고 하여서 그가 하나님께 대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이런 명령을 사울에게 전해줄 만한 사람이다.
2.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반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그에게 내리시든지 그는 꼭 순종하여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할 강력한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시켜 주신다. 우리는 마땅히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시 116:12).
Ⅱ. 사무엘은 사울에게 지금까지 그가 행한 어떤 것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였다.
사무엘은 그 명령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는 전제를 달았다.
👉이스라엘 전체를 ‘체바오트'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의 땅에 입성하기까지는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의 명예를 걸고 이방 족속과 투쟁해야 하는 ‘여호와의 군대' 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흐와 체오바트’ 는 이처럼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지청하였던 ‘체오바트’ +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인 ‘예흐와’ 가 결합된 하나님의 칭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을 ‘예흐와 체바오트'로 계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언약의 하나님 당신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이는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과정에 있어서, 언약의 성취를 방해하는 이스라엘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요, 그들과 싸우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곧 하나님 자신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흐와 체바오트'는 이스라엘이 어떠한 역경과 환난에 처한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함께하셔서 다 물리쳐 주실 것을 확약하는 실로 든든한 신뢰감을 주는 하나님의 칭호인 한편 본문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예흐와 체바오트'의 이름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메시지가 신적 권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또한 비록 사울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이방 민족들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이는 전쟁의 총사령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비롯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엄숙히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명칭의 사용은 앞으로 벌어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이 친히 전쟁의 방법에 대해서 명령하실 것과 사울은 그 명령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사무엘은 또 그 명령의 엄중함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내가 기억하는가" (2절)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셨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그들을 해하였기 때문에 아말렉과 싸우신 일이 있다. 그 싸움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17장 8절 이하에 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은 신명기 25장 18절에 있다. 그들은 비열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은 아말렉과 대대로 싸울 것이며, 아말렉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예들로서(창 36:12,1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 생활을 하며 다른 민족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던 호전적 족속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직후 르비디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행진 대열의 후미를 공격함으로써 많은 타격을 주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원수가 되었다(출 17:8-16).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사건을 모세로 하여금 책에 기록하게 하시고 여호수아의 귀에 암기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기억하게 하셨다(신 25:17-1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말렉과 대대로 싸워서 그들을 천하에서 도말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기억하고 계심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비겁하게 이스라엘을 후미에서 공격을 하여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던 비열하고도 교활한 아말렉의 행적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 하나 숫자를 세듯이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다가 사울의 왕권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잠자 다시 그 사건을 떠올리신 것이다.
본문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만대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시며 주어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심판의 징벌을 내러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즉 아말렉의 입장에서는 단지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한 민족을 약탈한 것뿐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맣렉의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단적 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방해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원수가 되는 것이자 나아가서는 절대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이제 사울에게 부과되었다(3절).
"가서 아말렉을 치라. 이제 이스라엘은 강하여졌고, 아말렉의 불의도 극도에 이르렀다. 이제 가서 그 저주받은 백성을 일소하라."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 를 죽이되 동정을 해서 남기지 말고, "우양과 약대와 나귀" 를 진멸하되 욕심 때문에 한 마리라도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당신과 당신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말렉에 대한 사울의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제의의 의미를 갖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남긴다면 아간이 자신의 죄로 인해 ‘봉납’된 것처럼(수 7:25),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사울 자신에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특히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그들에게 해를 끼친 자들은 조만간에 분명히 그 일이 계산되었다.
- 하나님은 멸망시키고자 한 자에 대해서도 오래 기다리신 일이 있다. 그 선포가 즉시 시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 그러나 그 시행이 늦어지기는 하되 아주 지연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싸운 일에 대한 보복의 날은 드디어 온다. 하나님의 정의는 서서히 작용하시지만 틀림없이 작용하신다.
- 심판이 늦어지면, 그만큼 그 심판은 가혹하다.
- 하나님은 그의 일을 시행할 가장 좋은 도구를 선택하신다. 이 일은 피를 보아야 하는 처절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 일을 하여야만 하는 거칠고 지독한 사람이었다.
👉 앞선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아말렉 완전 진멸 명령을 내리셨다.
이제 4-9절에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일단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으나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육축을 자신들을 위하여 살려두는 불순종의 죄를 범했음을 보도한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면전을 위하여 대대적인 모병을 시행했다.
Ⅲ. 사울은 여기에서 그의 군대를 소집하고 아말렉 땅을 습격하였다.
사울이 전쟁터로 이끌고 간 군사의 수는 보병이 2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였다(4절).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며, 그 승리가 모험에 가까왔을 때 그를 따랐던 군사의 수는 6백명에 불과하였다(13:15).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과 싸우기 때문에 그 승리가 확실할 때는 수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몰라도 이번 경우에는 유다 지파에게는 퍽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전체 모인 수의 20분의 1인 1만명이라는 극히 적은 수밖에 모이지 못했다. 한편(레위 지파는 제하고) 다른 열 지파에서는 20만명이 모였다. 유다 지파의 영광의 날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아직 이르지 못했다.
사울은 군사의 수를 들라임에서 계수하였다. 그 지명은 어린양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처럼 세었다고 보기도 하며, 훗날 유다 사람들이 숫자를 세는 방법과 같이 유월절 어린양을 세듯, 다시 말하면 열 명에 대해 어린양 하나를 쳐서 세듯이 세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사울은 군사들을 이끌고 아말렉의 수도인 아말렉 성으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사울이 그들을 약올려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병력과 유다 지파의 병력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유다 지파가 사울 왕국의 통치 범위 안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유다 지파가 ‘들라임' 근방에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병력만이 참전하였다는 것은 사울 왕국과 유다 지파 사이에 어떤 거리감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먼저 사울에 뒤이어 등장하는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을 염두에 둔 저자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 사울의 통치 범위가 온 이스라엘 12지파에 완전히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세력이 강한 유다 지파는 사울의 지배틀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창 49:10의 야곱의 예언에 근거하여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문에서 유다 지파의 병력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Ⅳ.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 중에 살고 있던 겐 사람들에게 이제 아말렉을 칠터이니 너희는 그들 중에서 떠나라고 다정한 충고를 하였다(6절).
이 때 사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정성을 다해서 그들에게 충고하였는데 아마 사무엘의 지시를 따라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겐 사람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가족이나 친척들이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쉽사리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의 대부분이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자연적인 요새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살 수 있는 용감한 족속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바위 위에 두고 있었다" (민 24:21). 발람은 그들이 쇠미하리라고 예언한 바가 있다(민 24:22). 그러나 사울은 그들을 진멸할 수가 없었다.
- 사울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친절을 기억하였다.
이드로와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그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눈 역할을 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 오랜 후에 그들의 후손에 대해 이 일이 기억하신 바 되었다. 이처럼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유산으로 남겨 놓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무덤에 들어간 뒤에 우리의 선행의 열매를 거두어 가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베푼 친절을 몰라 보시는, 불친절한 분이 아니시다. 그들은 마지막 큰 날, 의로운 자가 부활할 때에 기억하신 바가 되며, 보상을 받게 된다.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는 칭찬을 듣는다.
겐 사람들의 조상들이 베푼 온정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아말렉 사람들의 조상이 행한 악행을 벌하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뚜렷이 나타내셨다. 좋은 일을 후손에게 물려주게 하시는 하나님이 왜 궂은 일도 후손에게 물려주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의 백성들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신다" (민 24:9; 창 12:3). 그들은 그들이 받은 친절에 대해서도 이로 갚을 수 없고, 그들이 받은 상해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보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두 가지를 모두 하여 주신다.
👉여기서의 ‘선대'는 겐 족속으로 모세의 처남이었던 호밥이 이스라엘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안내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곤궁에 빠뜨렸던 아말렉 족속은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대한 족속에게는 선대를 베푸심으로 공의로우신 분임을 본문을 통해서 깨닫는다.
본문의 겐 사람을 살려준 사건은 이후 사울이 아각 왕을 살려준 사건(8, 9절)과 대비된다. 즉 겐 사람은 이스라엘에게 선대한 과거가 있기에 살려 줄 수 있지만, 아말렉의 왕인 아각을 살려준 것은 사울로서는 아무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여호와의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밖에 되지 않음이 본문과의 연관성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2.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들의 장막을 옮겨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말렉 사람들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고 하였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땅에 내리시고자 하실 때에, 귀한 자와 타락한 자를 구분하시며, 온유한 자들를 그의 노여움에서 가려주시기 위해 애쓰신다.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 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것은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않고 그들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계 18:4).
유다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 " 악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악인의 이웃에게도 저주가 있을 지어다."
Ⅴ. 사울은 아말렉과 싸워 이겼다.
그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 악인에 대한 단죄를 처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가 정당하고, 그 소명이 분명한 만큼 그 문제는 조금도 애매모호한 점이 없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을 치고" (7절),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8절).
이제 그들은 그들의 조상의 죄의 댓가를 값비싸게 치르었다. 하나님은 때로 죄의 댓가를 보류하였다가 그 자손들에서 물으신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고, 그밖의 다른 죄들도 많이 범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해서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물으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땅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그들의 죄까지도 함께 물으셨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심판은 신비한 것이오며! 당신의 정의는 너무나 뚜렷 하옵나이다!
Ⅵ. 그러나 사울은 그의 일을 반밖에 시행하지 못했다(9절).
1. 사울은 아각을 살려두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과 같은 왕이었기 때문이며, 아마 상당한 양의 몸값을 받아내기를 바라서 그랬는지 모른다.
👉 사울은 왜 예외없이 모두틀 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3절)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 을 생포했을까?
사실상 그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좋은 짐승들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고 변명했지만(15,21절), 아각에 대해서는 사울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먼저 사울이 아각을 포로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고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사울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당시의 절대 군주였던 아각을 포로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울이 어떤 대가를 바라고 ‘아각' 을 살려주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두 추정 모두 개연성이 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전자가 더 사울의 의도에 가까웠으리라 생각된다. 사울은 9절에 나타난 저자의 평가처럼 아각 왕을 좋은 가축처럼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서 살려줌으로써 여호와의 아말렉 진멸 명령을 고의로 어겼다.
본문에서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한 것은 하나님의 ‘헤렘’(봉납)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명예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본문에는 ‘칼날로׳ 라고 하여 진멸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가 이 용어틀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울 왕이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본절에는 사울이 아각을 살려서 체포한 사실과 아말렉 백성을 칼로 진멸한 사실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사울이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아각을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동시에 ‘칼’ 은 33절에서 아각이 죽어 마땅한 이유를 사무엘이 밝힐 때 다시 사용되었다. 즉 사무엘의 말대로 아각이 과거 이스라엘의 여인들을 칼로 무자하게 했던 것처럼, 사울은 그것을 기억하여 아각을 마땅히 전쟁 중에 죽여야 했음을 저자는 본문의 ‘칼’ 이란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사울은 소와 양의 좋은 것들을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들만을 진멸하였다.
그 때 많은 아말렉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후에도 아말렉에 대한 말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울은 자기 수중과 자기의 세력 하에 들어온 아말렉 사람과 그 재산들을 모조리 진멸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만큼 사실상 진멸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희생물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이 이 때 상처나고, 병들고, 다리를 절며 그리고 파괴한 것들만을 진멸하면 족하고, 자기의 목장과 식탁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과 기름 진 것을 남겨놓은 것은 실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 사울의 죄
1.‘남기고’
‘남기다’ 라는 뜻의 ‘하말’ 동사는 ‘긍휼히 여기다’, ‘연민을 갖다’ ,용서하다’ 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말렉이 과거 이스라엘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반드시 아말렉을 멸절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맹세를 눈에 보이는 욕심 때문에 망각해 버리고 결국 아말렉에게 긍휼을 베푼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2.‘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하나님은 아말렉의 짐승 중 좋은 것을 남겨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제사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을 원하셨다.
사울과 백성의 공동의 죄
저자는 여기서 ‘사울’ 과 ‘백성’을 공동 주어로 병기하고 있다. 이는 사울 왕과 백성이 공동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울은 나중에 이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백성에게 돌리는 비겁함을 보인다. 즉 ‘백성’ 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기 때문에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한 것이다(15, 21절). 또한 사무엘은 본문과 같은 상황을 염려하여 이미 그의 고별 설교에서 왕과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12:15). 사무엘이 이처럼 사울 왕과 백성들에게 동시에 경고했던 것은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다가 함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왕을 의지하게 되고, 왕은 하나님 되신 백성들의 힘을 의지하여 결국 쌍방이 여호와를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한 사무엘의 염려는 본 사건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본문은 하나님의 신정 통치를 거부하고 왕정을 선택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어떤 신앙적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재물을 취하는 데서 볼 수 있는 사울의 신앙의 태도 →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함 → 자기 기준..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의 의미를 추적하다 보면 사울이 가축의 대부분을 진멸하고 그 중에 간혹 좋은 것을 골라 취했던 것이 아니라, 특별히 나쁜 것만을 배제하고 대부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거부할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완전하게 순종할 믿음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가치 있는 것은 취하고 가치 없는 것은 진멸했던 것이다. 결국 사울은 가치 있는 것은 취함으로써 여호와의 명령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가치 없는 것만 진멸함으로써 그 명령의 주체인 여호와를 경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엘리 제사장에게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당신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2:30).
순종하지 않음의 결과는, 이 말씀 그대로 여호와의 명령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어중간한 태도틀 가지고 있는 자들을 토하여 내처신다(계 3:16).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판단을 중히 여기는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