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17, 야고보서 4, 요나 1, 누가복음 6
묵상구절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7: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7: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17: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17: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7: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17:19 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17:20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17:21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더라
17:22 다윗이 자기의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17: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17: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17: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17:27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17: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17:29 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17:30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17:31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17: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17: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이스라엘 진영에 온 다윗(사무엘 상 17:12-30)
사십일 동안 두 군사들은 유리한 자리에 자리잡고 상대방을 바라 보기만 하고 서로 나와서 싸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담판을 하며 유리한 강화조약을 매고자 하였던가 아니면 보충병들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지엽적인 소전투는 자주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그 용사가 나타나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을 반복하였다. 이스라엘이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으므로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교만으로 가득해지고,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기는 더욱 소침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멸망의 때가 점차 무르익어 가게 이끄시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인상적으로 하시기 위해 일을 꾸미시고 계셨다. 그 동안 다윗은 그의 아버지의 양들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40일이 지날 무렵에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했던 모험을 시도하고 그리하여 그 싸움에 이겨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하시고자 그를 전쟁터로 이끌어 가셨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의 가족들의 현재의 형편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다(12절).
그는 "당시 사람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공적인 봉사에서 면제되어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전쟁에 나갔다. 그는 그의 나이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의 백발은 그에게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다.
다윗의 큰 형들 셋은 궁전에서의 다윗의 지위를 시기하여, 그들의 아버지에게 다윗을 집으로 불러들여 그 명성을 떨어뜨리게 하고 자기들은 전쟁터에 나가게 하여 명성을 얻고자 하였다(13,14절). 하지만 다윗은 왕을 위해서 행한 자기의 일을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그 이상의 출세에 대해서도 어떤 야망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궁전의 생활을 떠나 단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조용히 지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34절에서 증명되었듯이) "아버지의 양들을 지켜 주는" 수고를 위해서 돌아왔다. 그의 겸손은 나라의 대신이라는 귀한 명예를 받은 뒤의 겸손이기에 더욱 칭찬 받을 만하다. 그는 그처럼 겸손했기에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명예 앞에는 겸손이 있다."
그는 군대에서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명상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 14절, 장성한 3인은 사울을 쫒음
쫒다: ~의 뒤를 따라 걷다. 단순히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삶의 방향과 운명을 예고할 때에도 사용됨. 본문은 다윗의 장성한 세 형들이 사울과 삶의 방향을 같이했으며 사울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본장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의 위협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전쟁에 참여할 수도 없는 나이였던 다윗을 내보냄으로써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낸다(37절). 본문은 다윗의 장성한 세 형들도 바로 이러한 사울의 뒤를 따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반면 다윗의 모습.
본문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묘사된 다윗의 모습은 전쟁에 나간 형들의 모습과 비교하던 매우 나약하게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장에서 일개 목동인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 왕의 사랑을 받는 병기 든 자로 부각되었던 것처럼, 본문에서도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목동 다윗이 여호와의 도움을 입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 16절, 블레셋 그 사람 골리앗은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나서 위협하며 전쟁을 부추김.
→ 40일이 갖는 의미
‘사십 일’ 이라는 기간은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본서 저자가 이를 굳이 밝힌 것은 40이란 숫자가 지니는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함어기도 하다. 창세기에 언급된 40일간의 홍수(창 8:6),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40년간의 통치 (삿 13:1) 등에 암시되어 있듯이 본문의 40일은 임박한 위기와 사건의 새로운 전환을 암시하고 있다. 즉 골리앗이 40일 동안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고통이 극에 달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제 사건이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생각할 때, 다윗으로 하여금 ‘진으로 속히 가서 형들에게 문안하라는 이새의 명령(17절)은 자식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고통을 끝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한 것이다.
골리앗이 몸을 나타냄.
골리앗은 무장한 자신의 거대한 몸을 스스로 드러내 과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협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무력 시위로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도록 하려는 작전이었다. 골리앗은 육신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했고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안목에서 골리앗을 평가하고 두려워했다(11절). 그러나 자신의 육신을 이스라엘 앞에 과시하고 있는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호위하고 있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또한 최종 승자는 출중한 겉모양 등의 외적 조건을 구비한 자가 아니라, 인간적 조건으로는 별 볼 일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과 같은 사람임을 골리앗은 알지 못했다.
Ⅱ.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무엇인가 경험을 얻고자 하여 그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별로 쓸모없고, 천한 심부름으로 그를 보냈을 따름이다. 그런 일이라면 능히 사환을 시킬 수도 있었다.
다윗은 형들을 위해서 떡 열 덩어리와 볶은 곡식을(17절), 그리고 형들의 천부장에게 선물로 줄 치스 열 덩이를 가지고 형들에게 가야만 했다(18절). 다윗은 그의 가족을 크게 빛낼 사람이 될 터인데 아직까지는 그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였다. 그는 짐을 싣고 갈 나귀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등에 짊어지고, 싸움터로 달려갔다. 이새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그를 그처럼 천한 일을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새는 다윗이 분명히 다음 왕으로 등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혹과 시기의 눈에서 그를 숨겨두고자 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형들이 잘 있는지, 전쟁이 너무 오래 끌기 때문에 식량보급이 형편이 없어서 배를 곯지나 않는지 알아 보아야 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그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내고자 하였다. 또 다윗은 형들의 증표를 받아 가야만 했다. 말하자면 형들이 어떤 것을 저당잡힌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상해 주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동료들의 형편도 살피고 오라" 는 말로 본다.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다윗도 요셉과 같이 전에 그 형들에 대한 좋지 못한 보고를 아버지께 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들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 보고자 다윗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식들이 그들을 떠나 멀리 가 있으며, 특히 유혹이 많은 곳에 가 있을 때의 그들의 경건한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어떻게 몸가짐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친구들과 사귀고 있는가를 늘 근심하고 있다. 자녀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며, 부모의 뜻에 맞도록 처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의 눈을 떠나 있을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직 병사들 스스로 식량을 자급 자족해야 하는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다윗이 형들에게 식량이나 전달하는 등 전쟁 출전 자격도 못갖춘 미약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다윗을 이렇게 평범하고 미약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의 다윗의 활약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본문에서는 일상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다윗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증표’를 반드시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다윗은 결국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대의 ‘평화의 증표’가 되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백성들 앞에 서게 된다(57절).
Ⅲ. 다윗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부지런하고 조심성이 많은 다윗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20절). 그리고 양들을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서야 길을 떠났다.
그 만큼 그는 적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일도 충분히 맡아서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자기 스스로가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은 가장 알맞은 때에 그를 싸움터로 이끌어 오셨다. 그 때가 바로 양쪽 군사가 서로 항오를 벌이고 서로 대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지난 40일 중의 어떤 때보다도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때였다(21절). 양쪽이 모두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새는 그의 아들을 그처럼 위험한 시기에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에 대해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하여 또 그의 마음에 드는 자의 출세를 위해서 그 시간과 그 환경을 마련해 놓으셨다.
- 다윗은 매우 활발하고 생기가 넘쳐 흘렀다(22절). 그는 조심스럽게 짐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짐 지키는 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군대로 달려갔으며," 형들에게 문안도 하였다. "그처럼 자기 일에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출세할 것이며, "왕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이다."
- 블레셋 사람은 대단히 담대하였다(23절). 양쪽 군사들은 서로 항오를 벌이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그 블레셋 사람이 대열앞에 나와서 다시금 싸움을 돋우었다. 아마 그는 자기의 영광과 승리를 열심히 추구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사실 그때 그는 자기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겁에 질렸고, 의기가 소침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일 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오만한 몸집과 위협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빈 말 뿐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골리앗의 엄포를 무섭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다" (24절). 그들의 반석이 천만 뜻밖에도 흔들려서 "그들을 팔고, 그들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 하나가 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쫓을 수 없으며,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을 도망가게 할 수는 없었다(신 32:30).
- 사울은 골리앗을 치는 사람에게 줄 많은 상급을 걸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던 사울은 하나님과 가까이만 지내고 있었다면, 골리앗이 내건 도전에 마음놓고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났기 때문에 사울은 감히 도전에 응할 수도 없었고, 요나단을 나서게 할 수도 없었다. 그 대신 누구든지 그에게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출세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25절).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 위험한 모험에 성공한다면 원하는 만큼의 재품과 명예를 주고, 또 왕의 딸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그가 성공하든지 못하든지 "아비의 집이" 모든 세금과 왕가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이며, 귀한 지위와 귀족의 호칭을 받게 될 것이라" 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 다윗은 골리앗의 시건방진 도전에 대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어떤 보상이 수여되리라고 약속되었는가고 물었다. 그것은 다윗이 그 보상과 명예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에 대해 그 자신이 얼마나 분격하고 있는지를 사울이 알 수 있도록 그에게 보고되어 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전에서의 일 때문에 사울과 이미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 자신이 직접 사울 왕에게 가서 그 자신이 하겠노라고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사에 겸손하고 수줍어하기를 잘하는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잠 25:6)는 잠언은 그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기 전에 다윗 자신의 생활 신조였다. 그러나 다윗의 열심은 이 위대한 일에 그 자신이 종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나게 하여 주었다. 다윗은 두 가지 면에서 의문을 느꼈다고 보여진다.
(1) 그 도전자는 할례받지 않은,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백성이었다.
👉 할례 받지 못한 백성 ⇒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언약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
그런데 당시 애굽이나 암몬, 모압 블레셋 등의 민족들도 할례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어 진정한 할례를 행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육신의 할례는 행하였지만 마음의 할례는 결코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렘 9:25,26).
한편 본문은 자신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블레셋에 선제 공격을 가했던 요나단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14:6). 요나단이 이러한 내용의 고백을 한 뒤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어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본문에서 동일한 고백을 하는 다윗도 여호와의 도우심을 통하여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암시받을 수 있다.
(2) 한편 그의 도전을 받은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이며, 하나님께 몸을 바쳤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군사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준 모욕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기에 다윗은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블레셋 사람을 죽인 자에게 줄 상급에 대해 대답을 해 주었건만(27절), 이를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30절). 이것은 사울의 귀까지 그의 말이 들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 ‘사시는 하나님’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계신 신적 속성. 하나님께서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존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반어적 질문 속에는 ‘다곤과 같이 죽은 신을 섬기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5장) 어떻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할 수 있는가'라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져 있다. 후에 골리앗은 자신들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지만(43절), 당시 다윗은 그 신들은 죽은 신들이기 때문에 그 저주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군대에 대한 다윗의 이러한 신앙적 해석이 결국 그로 하여금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게 만든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다윗은 신체적 우월함이나 첨단의 무기로 골리앗과 맞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군대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언 하셨는데(16:1), 그 이유는 이처럼 그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7절, '백성이 … 말하여 … 여차여차히 하시리라'
저자는 다윗의 신앙 고백과 행동에 관심이 있을 뿐 백성들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신앙적 면모를 드러내는 다윗의 말은 자세하게 기록한 반면(26절) 백성들의 대답은 ‘여차여차히 하시리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두려워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백성의 모습과 보상에 대한 관심 없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싸움에 임하려는 다윗의 용감한 모습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6. 그의 장형 엘리압은 다윗을 꾸짖고 그를 낙심시키는 말을 했다. 그는 다윗이 건방지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매우 화를 냈으며 그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28절).
(1) 이것은 엘리압의 시기 때문에 일어났다. 엘리압은 제일 큰 형이었고 다윗은 제일 막내였다(대개 형들이 동생에 대해 그렇듯이) 엘리압은 언제나 다윗을 무시하고 어떤 일에나 그를 꾸짖기를 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랫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 자신의 생활은 형편 없으면서 아랫 사람들을 깎아 내려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안다. 이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엘리압은 자기도 감히 할 수 없는 말, 즉 그 블레셋 사람에 대해 대담한 말을 자기의 어린 동생이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화를 냈다. 그는 다윗이 이미 궁전에서 높은 명예를 얻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했던 방법이었는데), 이 전쟁터에서조차 또다시 다윗이 명예를 올린다면, 큰 형으로서의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바로 질투의 본성인데) 엘리압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기보다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대해 이기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진노는 잔악하고 노여움도 포악한 것이지만, 질투 앞에서는 견디어 낼 사람이 없다." 더우기 형제의 질투는 가장 악랄한 것이다. 야곱과 요셉이 그리고 다윗이 그것을 체험했다(잠 18:19 참조).
엘리압은 아주 거친 말씨로 다윗을 욕했다. 단지 공평치 못하고 친절치 못한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는 은혜조차 잊어버린 말이었다. 다윗은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위해서 그들을 찾아왔다. 엘리압은 단지 다윗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용기를 잃게 하며 그리고 다윗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고상한 불을 꺼버리기 위해서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게으른 아이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애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했다. 엘리압은 사람들에게 다윗은 한갖 목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했으며, 또 은근히 그가 충실치 못한 목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다윗은 그의 책임을 잘 맡겨 놓고 왔건마는(20절), 엘리압은 "들에 있는 양들은 뉘게 맡겼느냐" 고 욕하며 물었다.
다윗이 싸움터에 온 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한 것이며, 형들에게 친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엘리압도 이것을 알았다. 하건마는 비난만을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온 것은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엘리압은 다윗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 을 아노라고 하였다. 그는 마치 다윗의 마음 속에라도 들어갔던 자처럼 말했다.
다윗은 그의 겸손함과 정직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며(시 17:3; 131:1) 이번에는 그 두 가지에 대해 모두 확실한 증거를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형 앞에서는 이런 심한 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과 그리고 그 악독함을 보라. 그 질투는 끝없는 것이며, 그 비난은 정당한 것이 못되고, 그 표현은 부당하며, 그 악담은 지독하고 그리고 그 말씨는 매우 못마땅하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우리는 그런 심령이 되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2) 그리고 또 엘리압의 그런 말은 다윗의 유순함과 참을성과 그리고 꾸준함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시험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그것을 잘 통과하였다.
[1] 다윗은 매우 분통이 터질 만한 말을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마음으로 참아냈다(29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욕을 먹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어떤 것입니까? 아버지가 보내서 왔는데 전쟁터에 올 만한 이유가 없으리이까? 골리앗의 도전으로 이스라엘의 명예가 이처럼 손상을 받았는데, 내가 분해할 만한 이유가 없으리이까?"
다윗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또 그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러므로 형을 비난하지 않고 부드러운 대답으로 형의 노여움을 누구러뜨렸다. 어떤 면에서는 다윗이 이처럼 자기의 감정을 정복했다는 것이 골리앗을 정복한 것보다 더 훌륭하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블레셋이 몰려온 그런 때에 다윗은 형과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교회의 원수들의 위협이 크면 클수록 교회는 더욱 참아야 한다.
[2] 다윗은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계속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형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그 블레셋 사람과 맞서려고 하였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위대한 공적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협조를 하여 주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방해를 받고 반대를 받았다고 하여도 별로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아무리 원수들의 위협과 그리고 또 친구들의 멸시와 의심을 정면으로 받는다고 하여도 다만 묵묵히 자기가 하고자 하였던 일을 계속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을 비난하는 큰형 엘리압의 태도에도 뜻을 급히지 않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울의 허락받은 다윗(사무엘 상 17:31-39)
드디어 다윗은 사울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31절), 용감하게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노라고 말하고 나섰다(32절).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다윗은 말했다.
다윗이 만일 "당신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말했다면 왕의 용기에 대해 매우 체면을 손상시키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고 말했다.
👉 직역하면, ‘그를 인하여 사람이 마음이 떨어지지 말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만나자마자 이와 같은 말로 위로했다. 다윗의 이러한 밭언은 11절에서 골리앗의 위협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과 더불어 두려워 떨었던 사울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일개 목동의 신분으로 다윗은 광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떨고 있는 사울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말은 사울 한 사람이나 그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 다윗의 말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에 속한 자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강한 확신어 내포되어 있는 것. 본문은 ‘골리앗'과 같은 사단의 세력들이 세상적으로 완벽한 신체와 철저한 무장을 하고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도들은 그들로 인해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교훈한다.
그날 아침까지도 양을 치던 어린 목동이 이스라엘의 어떤 용사보다도 용기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용기를 넣어 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을 통해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며 또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다윗은 다만 사울의 허락을 받아,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 사울이 제안한 보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명예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사울의 관대함을 구한 것 같지도 않다. 다윗은 다음의 두 가지를 사울과 밝히기를 원했다.
Ⅰ. 다윗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사울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 다윗은 자신을 사울의 종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울 왕에 대한 순종과 충성을 표현했다. 사울 왕에 대한 다윗의 이러한 태도는 왕이 약속한 보상 조건만을 알리면서 도망가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무능한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24절). 또한 다윗은 싸울 대상인 골리앗을 ‘저 블레셋 사람’ 이라고 익명으로 제시함으로써, 골리앗에 대한 멸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골리앗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능력을 갖춘 강력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익명의 무가치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오! 네가 참 훌륭한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너는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울 만한 상대가 못되겠다. 그와 맞싸운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보다 더 유용한 때를 위해 잠시 보관해 두는 것이 좋겠다. 너는 경솔하고 아직 지각이 덜 낫고,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데도 익숙하지 못한 소년이 아니냐? 그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익혀온(33절) 어른이요 군인인데,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사람을 이기겠다고 하느냐?" 다윗은 그의 형이 가졌던 노여운 감정에 대해 부드러운 말로 대답했던 경우와 같이 사울에게도 믿음을 가지고 그의 두려움에 대답하였다. 그리고 사울을 만족시켜 줄 수 있도록 그가 블레셋 사람을 능히 정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근거" 를 말해 주었다.
👉 다윗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짐승들과 양떼의 관계는 볼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양떼가 있는 영역을 침범해서 들어온 사자나 곰은 이스라엘의 영역을 침범해서 들어온 블레셋 군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다윗은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을(26절) 마치 앙을 해하러 온 짐승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윗은 짐승들의 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블레셋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맹수들의 입에서 양을 구출했던 사건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맹수들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에는 여호와에 대한 다윗의 전적인 신뢰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 다윗이 사울에게 설명했던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본문에 있다. 결국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려는 용기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셨던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하나님은 끌려가는 어린양을 구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는 전체적으로 ‘사람의 손보다도 더 날카롭고 강한 야수의 발톱으로부터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일개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라는 다윗의 깊은 확신이 담겨 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으며 이를 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그의 마음 속에는 간직하면서도 이 점에서 사울을 설득하기 시작하지는 않았다. 다윗은 그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비록 그가 나이가 젊고 전쟁에 나가 본 일도 없지만, 지금까지 골리앗을 죽이는 일과 같은 일은 몇 번 경험했다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새끼 양들을 훔쳐가는 사자나 곰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34-36절). 그리고 이로 미루어 보아 이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은 한갖 굶주린 그런 짐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고, 자기는 그를 쉽사리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다윗은 사울에게 그가 결코 이제 나가고자 하는 그런 치열한 싸움 같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 다윗은 그의 이야기를 할 때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였다. 그의 형은 조금 전에 그가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를 깎아내리려고 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양들을 지켰던 사실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다 이야기하였다. 다윗은 오늘날 자기에게 있는 그런 활력은 모두 목동의 생활 경험에서 얻은 것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보통 목동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 어떤 것이든 간에 또 그것이 얼마나 천한 것이든, 그 일에 있어서 제일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여야 한다. 다윗은 양들을 치면서도 그렇게 하였다.
(1) 다윗은 자기의 양이 아니고, 아버지의 양이지만 그 양떼들을 아주 정성껏 잘 살펴 주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새끼양 한 마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이 백성들의 생명을 사랑하며, 그들의 피가 귀한 줄 아는 왕이 되게 하였다(시 72:14). 그리고 또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사 40:11),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게 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교인들의 영혼을 우는 사자의 밥으로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들을 지켜 주는 훌륭한 목회자의 모범이기도 하다.
(2) 그는 자기 양떼를 지키기 위해 매우 용감하였으며, 있는 용기를 다하였다. 다윗은 지금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다른 증거가 필요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의 종은 단지 새끼 양들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는 사자와 곰도 쳐죽였나이다."
2.다윗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과 같이 그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 는 것을 시인하였다(37절). 그것은 다윗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사자와 곰은 단지 나와 양들의 원수였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쳐물리친 것은 다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블레셋 사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원수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명예를 위해 이제 그를 치겠나이다."
(1)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용기와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용감하게 실행하는 것으로 증명하여야 한다. 우리를 건져내 주신 분은 지금도 건져내 주실 것이요, 앞으로도 건져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가 하등 짐승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우리는 감히 의지할 수 있다. 바다 물결의 한계를 긋고, 사나운 짐승들의 표호를 꺾으시는 하나님은 악인의 진노를 막아 주신다. 바울이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리라" 는 것을 내가 믿는다(딤후 4:17, 18)라고 하였을 때, 다윗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다윗은 여기서 삼손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마리의 사자를 죽인 것은 한 번의 싸움에서 많은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승리를 예고해 주는 행복한 전조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드디어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사울로부터 받아냈다. 그때 사울은 충심으로부터 나오는 축복을 기원하였다. 사울은 자기가 몸소 나가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꼭 싸워 이기기를 기도하였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사울은 말했다. 이 말이 보통하듯이 형식적으로 했거나 습관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기원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어떤 무엇이 있었다.
Ⅱ. 다윗은 또 사물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입히려고 하는 갑옷(38절)을 입지 않아도 되는 점을 밝혀야만 했다.
"사울은 자기 갑옷을 다윗에게 입혔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 자신이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키가 차이 나기 때문에 맞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의 무기고에 있었던 갑옷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그가 지금 자기의 투구를 씌워주고 자기 갑옷을 입혀 주는 사람에게 얼마 안 가서 자기의 왕관과 홍포를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어떤 방법으로 적을 공격할는지 결정하지 못했던 다윗은 "칼을 차 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 칼을 사용할 기회가 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갑옷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갑옷이 그를 막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짐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그것들을 벗고 가기를 원했다.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런 복장은 입어 버릇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북하다" 는 뜻이다.
우리는 사울의 갑옷이 매우 훌륭하고 또 튼튼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에게 맞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또 그것을 입는 법을 모르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배운 것도 없고 익숙치도 못하면서도 왕의 옷과 갑옷을 탐내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입고 있는 우리의 옷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아울린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옷을 입기를 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입지 않고 가는 것이 제일 좋다.
▶골리앗과 마주선 다윗(사무엘 상 17:40-47)
우리는 이제 이 유명한 전투의 중심부에 거의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준비와 서로 주고 받은 충고의 말을 볼 수 있다.
Ⅰ. 서로가 싸울 준비를 다 하였다. 블레셋 사람은 지난 40일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은 갑옷을 입는데 익숙했으므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그가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 왔다는 기록만을 볼 수 있는데(41절), 그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신호가 전달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마치 그의 투구와 갑옷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의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서 걸어오게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칼과 창으로 만도 가득차 있었다(45절).
그러나 다윗은 어떤 무기와 무장을 갖추고 있었나? 참으로 그는 목자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그는 흉배도 붙이지 않았고, 갑옷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칼이 아니라 막대기를, 그리고 활 대신에 물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화살통이 아니라 목자의 제구 주머니를 가졌고 화살대신에 시내에서 골라잡은 매끄러운 다섯 개의 작은 돌을 가졌을 뿐이었다(40절). 이것으로 볼 때 다윗은 확실히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블레셋 사람과 싸울 마음을 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어떤 무기로 그와 싸워야 할 것도 그의 머리 속에 넣어 주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