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21, 베드로전서 2, 요나4, 누가복음 9
묵상구절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8: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8: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8: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8: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8: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8: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악신에 잡혀 다윗을 미워하게 된 사울(사무엘 상 18:6-11)
이제부터 다윗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런 일은 그의 승리의 꼬리를 물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승리 때문에 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곧잘 볼 수 있는 허무함이다.
Ⅰ. 다윗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나치게 존대함을 받았다.
싸움이 승리로 끝나자, 얼마 있다가 사울은 다윗을 옆에 세우고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돌아다니며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의 축하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사울이 개선식을 베풀면 많은 여자들이 나와서 춤을 추며 노래 하면서 경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시인이든지 혹은 다른 사람이 지은 그 노래의 가사는 다윗의 용감함을 극구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울의 면전에서 그처럼 다윗을 높이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것이 못되었다. 그 에서도 제일 문제점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고 한 점에 있었다. 그러한 수의 차이는 모세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에 말한 일이 있다(신 33:17).
👉 여기서 비교되는 요소인 ‘천’과 ‘만’ 에 해당하는 단어는 숫자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천’은 수없이 많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 과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 ‘만’은 ‘무수한’ 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 선두에 있다는 의미로 ‘우두머리’ 란 뜻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죽인 자의 수효로 묘사된 ‘만만’ 이라는 숫자는 보통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뛰어난 ‘우두머리’ 나 행할 수 있는 용맹스런 전과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만만’ 보다 적은 수인 ‘천천’ 으로 자신의 처적을 노래한 산술적 의미 때문에 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 그 노래에는 다윗이 사울 왕보다 더 훌륭한 우두머리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쾌해 하며 심히 노하였던 사울이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8절)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데는 바로 본문의 내용어 왕위로 이해될 수 있는 ‘우두머리’ 란 의미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Ⅱ. 이것이 크게 사울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고 다윗을 시기하게 만들었다(8,9절).
사울은 그들이 단지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며, 결코 사울이 전에 세운 공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거행되고 있는 이 개선식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따라서 그 날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알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높이 찬양했던 것이다. 그 가사를 지은 사람은 단지 시적인 표현만을 생각한 것이지 결코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여 사울의 비위를 건드리자고 하였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은 왕의 마음가짐으로 서는 합당한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화를 냈고 그 밑바탕에는 어떤 모반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이는 당시 사울이 백성들의 외침으로 인해 가졌던 극도의 혼란한 심정을 보여주는데, 아마 그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심을 가짐과 더불어 자신의 왕위가 길지 못하며 하나님 마음에 맞는 새로운 지도자가 세워질 것이라는(13:14; 15:28) 사무엘의 예언을 생각하고 극도의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해할 길을 찾았다(9절).
👉사울의 이같은 관찰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사울은 이제 전처럼 다윗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참을 수 없다. 그리고 전에 자기 자신이 칭찬해 주었던 것조차 모조리 잊어 버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 대해 심술을 부리고 모욕적인 언사를 쓰고, 의심이 많고 억지를 부린다면 그리고 또 그 태도가 못되었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는 표시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는 우리를 그것들과는 정반대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Ⅲ. 사울은 진노에 못이겨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였다(10,11절).
"질투와 시기는 인간을 격노하게 한다." 그것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난폭하게 만들었으며 미치게 만들었다.
- 그의 광기가 다시 발작하였다.
사울이 다윗에 대해 악의를 품었던 바로 그 다음 날, 전에 그를 사로 잡았던 일이 있었던 하나님의 부리신 악령이 다시금 사울에게 임했다.
👉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림
‘악한 영’ :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사단의 졸개인 악령을 의미. 사단의 졸개임에도 불구하고 이 악령 에 대해 ‘하나님의 부리신’ 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악의 왕 사단은 물론 사단의 하수인인 악령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신이 불처럼 임했다 불처럼 임했다는 ‘강하게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 것에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울의 악한 행동은 이와 같이 악신이 강하게 내림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악행에 대한 사울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악신이 강하게 역사하도록 그 마음을 허탄하게 허용한 것은 사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울은 불신앙과 다윗을 향한 불타는 시기심으로 인해 그 자신이 악신이 강하게 역사할 기틀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무자비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사탄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며," 그보다 더한 다른 일곱 악령이 다시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준다. 시기가 있는 곳에 혼란이 있다.
사울은 종교적인 황홀경에 돌입한 것과 같은 모양을 꾸몄다. 그는 집 가운데서 예언하였다(역주:우리 성경에는 "야료하였다" 고 되어 있지만 KJV에서는 Prophesied 즉 "예언하였다" 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주석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사울이 경계심을 풀고 아무런 호위 없이 사울 앞으로 나오므로 그를 쉽사리 죽일 수 있도록 유인하기 위해 예언자의 거행을 꾸민 것이다. 그리고 또 아마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충동에 의한 것이며, 그에게 충만히 부어진 예언의 영에 의한 것이라고 돌려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흉악한 격노가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하였다.
👉 사울이 ‘야료함’
야료: ‘끌 야’+‘시끄러울 료’ ⇒ ‘까닭없이 마구 떠들어 대는 행동’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서 경우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의 전형적 현상이기도 하다.
2.다윗은 비록 지위가 높아졌지만 주인을 위해 수금을 타는 일을 기피하지 않았다.
"다윗은 다른 때와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탔다."
👉 다윗은 ‘손으로’ 수금을 연주했으나, 사울은 ‘손에’ 창을 잡고 있었다.
이는 본서 저자의 문학적 기교를 보여주는 것으로, 등장 인물 가운데 한 명은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자로 손으로 하나님을 찬앙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 명은 악신이 강하게 임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상반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동일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이 떠난 사람의 상태를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3. 사울은 다윗을 죽일 기회를 찾았다.
미친 사람의 손에 칼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더우기 악의가 가득찬 사울과 같은 미친 사람에게 칼이 들려 졌다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것을 던졌다. 그것은 갑작스런 행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라고 할 만큼 사울은 맹렬한 힘으로 창을 던졌다. 다윗이 그의 원수들에 대하여 한탄한 것과 같이 그는 다윗을 "심히 미워하였다." (시 25:19). 악독의 희생이 되기에는 다윗의 생명이 너무 귀하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사울은 비록 다윗이 나라를 위해 세운 지난 날의 공적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금 자기를 그처럼 어려운 지경에서 구해 주기 위해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 격노를 진정시켰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선보다는 악을 행하게 하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울을 돕기 위해 수금을 손에 들고 있는 다윗과,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손에 들고 있는 사울을 비교하여 보라. 그리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유함과 유익함과 저들을 핍박하는 핍박자들의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모습을 보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는 그의 생명을 찾는다" (잠 29:10).
👉사울이 창을 던지고 다시 창을 또 던졌다고 하는 것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한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또한 ‘두 번'이라는 용어는 다윗이 사울의 창을 피한 이후에 그 자리에서 바로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왕 앞에서 즉시 도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이 최선을 다헤 사울을 안위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에서도 다윗의 온유함과 인내가 매우 돋보인다.
4. 다행히 다윗은 사울의 강타를 두 번 피했다(다시 말하면 한 번은 이번이고 또 한 번은 나중이다. 19:10).
다윗은 창을 잡아서 다시 사울에게 던지지 않고 단지 피하기만 했다. 사울과 싸우지 않고 단지 자기 목숨만 보존하기 위해 도망쳤다. 다윗은 비록 힘도 있거니와 용기도 있고 또 자기에게 가해지는 해독에 대해 정당하게 반항하고 복수했다는 명분도 있었지마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피해서 달아났다. 다윗은 틀림없이 창을 들고 있는 사울의 손을 주목해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갔던 것처럼 창으로 부터 피해서 달아났다. 그의 안전은 그의 종을 악독한 자의 칼에서 부터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처럼 간신히 대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 다윗과 사울의 딸과의 약혼(사무엘 상 18:12-30)
사울은 이제 공공연히 다윗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다. 그가 다윗을 겨냥해서 창을 던진 것은 그의 증오를 밝히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적의가 어떻게 계속 되었으며, 다윗은 그 공격을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를 볼 수 있다.
Ⅰ. 사울은 다윗에 대한 그의 악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1.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였다" (12절).
👉 사울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과 함께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울이 다윗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의 원인이 결코 물리적인 힘이나 권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즉 사울은 겉으로 볼 때 일국의 왕이었고 다윗은 그의 신하였으며 사울은 모 든 것을 다 가진 왕이요, 다윗은 천부장의 직임을 가진 자에 불과하였지만, 영적으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없었고이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상태였으며 사울은 이러한 다윗에게 시기심과 함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리고 이는 종국에 사울이 왕위를 빼앗긴 반면 다윗이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원천적 이유이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떠나’ : 이 단어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들어섰다면 그곳에서 떠나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 역시 사울이란 잘못된 길에서 떠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다윗을 다음 절에서 자신에게서 ‘떠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고뇌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같은 그릇된 방법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아마 사울은 다윗이 왕관을 빼앗으려고 자기를 해하려 하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는 모양을 꾸몄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자기들을 해하려고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이 피해서 달아난 것은(11절), 그에게 그런 생각이 도무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었다. 하여간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 했듯이 사울은 정말로 다윗을 두려워하였다(막 6:20).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는 함께 하시지는 않지마는 다윗과는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며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면" 할수록" 사울은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15,29절). 사람들은 허세나 위협이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만 어시석은 자들만이 두려워한다. 지혜로운 자와 선인들은 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자들로부터 두려움이 되고, 사랑할 자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이 지혜롭고 행할 때" 가능하다. 지혜는 그 얼굴이 빛나게 하고, 존경을 받게 한다.
2.사울은 다윗을 궁궐에서 떠나 백성들 사이에 거하게 하였다(13절).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았다. 사울이 그를 보기가 싫어서 자기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보내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또 다윗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될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떠났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써 위안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오히려 더 심각한 영적 빈곤함을 가져오는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천부장 직책은 고위 직책으로 물론 중앙에 머물면서 행정적 직무를 담당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다윗은 야전 군사 지휘관으로 변방에 파견되었다. 이는 다윗이 전사하거나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관리들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함으로써 다윗의 지혜로움과 능력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울의 옹졸한 자구책이었다.
👉 ‘다윗은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
지혜롭게 행하니라 : 본래 지혜로운 행동으로 인한 번영을 의미하는 말. 특히 대상을 ‘통찰’ 함으로써 생기는 결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결과가 홀륭하다고 하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장에서는 ‘지혜롭다’ 라는 의미로 사칼 동사만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5, 15, 30절) 다윗이 사울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밝히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앞장에서는 골리앗과 대결하는 상황을 통해 다윗의 용맹스러움이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본장에서는 다윗이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맹장일 뿐 아니라 지장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이스라엘을 인도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 12, 28절 등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표현이다. 다윗의 뛰어난 용맹성은 앞장에서 어미 검증되었고는 그의 지혜는 본장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지만 저자는 이같은 점이 다윗 자신에게서 비롯된 탁월함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항상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자로 다윗을 묘사함으로써 다윗의 힘과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위대함의 원천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울이 다윗을 멀리하고자 하는 이유가 → 그에 대한 두려움에 있음.
사울이 다윗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내적 열등감과 이로 인한 치유되기 어려운 고민의 정도를 보여준다.
사울이 두려워하였다 ↔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이 지혜롭게 행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사울이 보고 알았다(28절).
하지만 사울의 이 계략도 좋지 못한 계략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이다. 다윗이 "자기들 앞에 출입하매"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16절). 말하자면 다윗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군사의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잘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에서는 물론, 온 이스라엘에서 다윗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본서 저자가 이 단어의 거듭된 사용을 통하여 나타내려 하는 바이다. 이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바로 다윗이 그와 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