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15일 토요일 묵상구절 레위기 19장

하나지기 2022. 1. 15. 14:31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16, 마태복음 15, 느헤미야 5, 사도행전 15

 

묵상구절

1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19:3 너희는 각자 자기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켜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4 너희는 우상들에게 돌이키지 말며, 너희를 위해 쇠를 녹여 신상들을 만들지 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5 너희는 여호와께 화목제의 희생 제물을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그것을 드리고,

19:6 너희의 희생 제물은 드리는 날과 그 이튿날에 먹어야 하며, 셋째 날까지 남는 것은 불태워라.

19:7 만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것은 부정한 것이니 내가 받지 않을 것이며,

19:8 그것을 먹는 사람은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더럽혔으므로 자기의 죄과를 짊어져야 하고, 자기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19:9 너희가 너희 땅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너는 네 밭의 모퉁이까지 다 거두어 들이지 말고 네 소출의 이삭도 줍지 마라.

19:10 너는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포도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11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고 이웃 사이에 서로 거짓말하지 마라.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여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19:13 너는 네 이웃을 억누르거나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마라.

19:14 너는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며, 눈먼 사람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높이지도 말며, 공정하게 네 이웃을 재판하여라.

19:16 너는 네 백성들 가운데 돌아다니며 이간하지 말며, 네 이웃의 생명을 대적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네 이웃을 반드시 책망하여 네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게 하여라.

19:18 너는 보복하지 말며, 네 백성의 자녀에게 앙심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9:19 너희는 내 규례들을 지켜라. 너는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배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고, 두 재료를 섞어 짠 옷을 입지 마라.

19:20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과 동침하여 설정하였는데, 그 여종이 아직 속량되거나 해방되지 않았으면, 형벌은 받겠지만 그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이는 그 여자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1 그 남자는 자기의 속건 제물, 곧 속건제의 숫양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어와야 하고,

19:22 제사장은 그 남자가 범한 죄로 인해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해 속죄해야 그 남자는 자기가 범한 죄에서 용서받게 될 것이다.

19: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먹을 것을 위해 각종 나무를 심으면 너희는 그 열매를 아직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야한다. 너희는 삼 년 동안 그것을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먹지 마라.

19:24 그러나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므로 여호와께 찬양할 것이며,

19:25 다섯째 해에는 너희가 그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로 먹지 말며, 주술을 하지 말고 길흉을 말하지 마라.

19:27 너희는 너희 옆머리를 둥글게 깎지 말며, 네 옆 수염을 손상시키지 마라.

19:28 너희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살을 베거나 너희 몸에 문신을 새기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19:29 너는 네 딸을 더럽혀 창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리하여 땅이 음행하여 악행이 땅에 가득하게 되지 않도록 하여라.

19:30 너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9:31 너희는 신접한 자들을 따라가지 말며, 영매를 좇아가 그들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게 하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32 너는 백발이 된 어른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9: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너희와 함께 거주할 때에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마라.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는 너희 가운데 있는 본토인같이 여기며 그를 네 자신같이 사랑하여라.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거류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35 너희는 재판할 때에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에 부정하게 하지 마라.

19:36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여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한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19:37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나의 모든 법도를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1-10)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본장에서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혹은 ‘나는 여호와니라’는 문구가 15번이나 나온다. 따라서 본장에 나온 규례들이 언뜻 보기에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 같지만 하나 하나가 18장 마지막 구절에서 소개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의 연장임을 알 수 있다.
    • 또한 여러 규례들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반영한 것이며,
    • 인간사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율법에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본장의 규례들은 십계명의 모든 조항이 인용되거나 함축되어 있으며, 때로는 새로운 방향으로 확대되고 발전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십계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aside>

모세는 율법을 요약 정리하여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라" 고 했다(2절). 아론과 그의 자식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자기들의 의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지배하는 보다 어두운(구약) 시대에 있어서 조차도 무지를 신앙의 모체라고 자랑하는 그러한 신앙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될 수 없었다. 모세는 온 회중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쳐 주어야 했고, 온 진중에 선포해야 하다. 아마 모세는 이미 율법들을 차례로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마침내는 점차로 모든 사람이 그 율법을 알 수 있도록 전달한 것 같다. 여기에 나와 있는 계율 중의 여러 가지는 이미 저들이 전에 받은 것들이었지만 그들이 다시 들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것은 저들이 그 율법들을 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계율들은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한다. 그것도 한줄 한줄 정확히,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조항이라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한다.

 

Ⅰ.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절).

그들은 특정한 율법과 풍속으로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실제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과는 구별되도록 저들에게 가르쳐 주어, 온전히 하나님께만 헌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율법이기도 하다(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이 율법에 복종하도록 이끄신다!). 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5, 16). 우리는 거룩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껏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별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모형과 그림자에 의하여 거룩하여졌다(20:8). 그러나 우리는 "진리로 거룩하여졌다." 즉 모든 그림자의 실체에 의해서 성별된 것이다(요 17:17; 딛 2:14).

💡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여기에는 동사가 쓰이지 않았다.

  • 원문이 동사가 생략된 문장이란 사실은 — 여호와의 거룩함이 다른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거룩’ 의 본질이란 사실을 강조해 준다. 정녕 온 우주에서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너희는 거룩하라’

  •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이 명령에는, **‘너희는 거룩하게 되어라’**란 뜻이 있다.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하실 수 없는 거룩함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함은 생동력을 가지고 밖으로 분출되며 그분이 임재하는 곳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신다.
  •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조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이어 받은 인간으로서 그 본질이 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신들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거룩을 체험함으로써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언약 백성이지만 본질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원어 문법적 시제는 동사의 미완료형을 사용이스라엘의 거룩은 세상과의 물리적인 싸움이나 모든 인간 관계에서 초연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고 그의 규례와 법도 안에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또한 거룩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거룩의 본질이시기 때문에(시 99:9; 사 6:3),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할 거룩 역시 진실하고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출 19:6)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을 상기시켜 줌과 동시에 그 부르심 자체가 실제적으로 실현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 :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거룩해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더불어서 미완료형에는 명령의 의미나 미완료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약속의 의미 또한 담겨 있다. 따라서 본문 가운데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될 것이다’ 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Ⅱ.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3절).

💡 ‘경외하고’

  • 지속적으로 부모를 경외해야 할 것을 보여 줌. 여기서 사용된 ‘야레’라는 단어는, 존경과 헌신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 주로 하나님이 목적어로 나옴(14, 32절; 잠1:7). 십계명에서도 출20:12에 ‘경외하다’란 뜻의 ‘야레’가 아니라 ‘공경하다’란 뜻의 ‘카베드’란 단어가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야레’가 쓰인 이유는 — 자녀로 하여금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
  • 즉 하나님께 대하여 주로 사용되는 단어를 부모에 대해서도 사용하여 부모의 위치를 높이며 더 나아가서는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요구를 깨달아 가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종교적 기본 의무를 언급하기에 앞서서 이처럼 부모 경외를 먼저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 인간이 처음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곳이 가정이며 거기서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이 부모이기 때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권위를 가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땅히존경해야 할 눈에 보이는 부모를 경외하지 않는 자라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는 자라 할 수 있다.

1. 여기에서 요청된 "경외" 는 제 5계명이 요구하는 "공경" 과 같은 것이다(말 1:6 참조).

이것은 내적인 존경심과 외적인 존경의 표현, 부모의 명령에 대한 복종, 그들을 기쁘고 편안하게 해 드리는 배려와 노력을 모두 포함하며,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나 분노케 하는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며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뜻한다.

유대 학자들은, "아버지에게 바쳐야 할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며 거기에 트집을 잡지 않으며 생전이나 사후에나 간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며 '나의 아버님', '어르신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아버지가 어려운 지경에 처할 때 온갖 필요한 것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

  1. 자녀들은 어른이 되더라도 이러한 의무에서 해방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학식 많은 자, 높은 자리에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부모라는 이유 때문이다.

  1. (원문 및 영어 성경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어머니에 대한 의무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가 다 같은 것임을 말한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게 되더라도, 역시 어머니에게도 존경과 복종을 바쳐야 한다.

  1. 또한 "그리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고 첨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율법으로써 우리의 부모들에게 존경을 바치라고 했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자기들의 권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을 보존케 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한 존중감을 지키도록 지도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안식일을 존중케 하는 보호의 책임은 제 4계명에 의하여 부모들에게 중차대하게 위탁된 것이다.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 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의 패망은 그들이 자기 부모들과 안식일을 경솔히 여기는 데서 온다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두 가지 계율이 하나님의 법도를 요약한 그 서두에 함께 놓여 있으니, 그것은 매우 알맞은 일이다. 즉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부모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태도를 지니는 자녀들에게는 소망이 있으며 장래가 번성하리라.

 

💡 ‘안식일’ (솨바트) : 쉬다 끝내다 라는 말에서 유래.

    1.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끝내시고 칠 일째 되는 날에 쉬셨다는 의미와 더불어, 2) 칠 일째 되는 날에 모든 창조 사역을 끝내셨다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삶에서 안식일의 의미를 찾는다면여러 날 가운데서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여 예배드리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가 여호와께 향해 있음을 고백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영적 삶의 첫시작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한 날도 구별하여 드리지 못하는 자는 결국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 — 안식일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별한 날(30절 ; 26 2).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되었음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특별히 경배하는 한 날로 삼으라는 의미.
  1. 이 두 계율에 대한 이유가 첨부되어 있다. 즉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즉 안식일의 여호와요, 네 부모의 하나님이니라" 는 것이다.

Ⅲ. 하나님만을 예배하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지 말라(4절).

"너희는 헛 것(우상)을 위하지 말라", 곧 아무런 힘도 가치도 없는 신이 아닌 신에게로 전혀 향하지 말라. 참된 하나님을 떠나 거짓 신 아직 패망케 하고, 영원히 불행으로 빠뜨릴 신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네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네 눈도 그들에게로 돌리지 말라. 너를 위하여 신을 만들지 말라. 곧 네 자신의 공상으로 피조물을 만들지 말며 깎아 만든 신으로 조물주를 예배하려고 생각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작품이요, 그러므로 네 손으로 지어 만든 것으로 신을 예배하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느니라. 여기에 깎거나 새겨 만든 신들이 특기되어 있는 것은 금송아지를 주조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 십계명 1,2계명에 상응하는 명령

  • ‘위하지’ 말라 : ‘위하다’는 단어는 ‘돌이키다, 돌아보다’ 란 뜻을 지닌 동사. 본문과 같이 쓰일 때는 ‘~을 향하여 관심과 주의를 돌리다’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표현은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등을 돌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말해 준다.
  • ⇒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열심을 결코 헛된 우상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말이며, 그러한 우상들에게는 관심조차도 보이지 말라는 명령이다.
  • ‘우상’ (엘릴) : 무익할 뿐.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자는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지만(출34:29), 우상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우상의 헛됨같이 그 인생도 헛되게 되는 것이다(렘18:15,16).
  •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명령: 주조돈 신상들, 주물로 만들어진 우상들.
    • 이러한 신상의 전형적인 예는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에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
    • 이러한 우상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왜곡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사상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 엄격하게 금하졌다.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실 때에 형상이 아닌 말씀으로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신 4:12.15-19).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역사하시는 그 말씀의 생동력은 결코 고정된 형상에 묶여 있을 수 없는 것.... </aside>

Ⅳ. 화목제물을 바치고는, 언제나 율법에 따라 그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5-8).

여기에 제사에 관한 어떤 특별한 이유(아마 그런 것 같다)가 주어져 있다. 화목제물은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제사장이 보는 가운데서 먹을 때 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그들이 만나를 먹고 지내는 중이었으므로(출 16-20장) 지정된 기일보다 더 오래 보관하려고 자기들의 화목제물을 저장해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화목제물에 관한 율법은 주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자(7:16-18).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때에 그의 할 일을 하신다. 제사가 율법에 따라 드려졌더라도, 드리고 나서 그 제물을 다시 율법에 따라 먹지 아니하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사역자들이 자기의 직분을 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가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났을 때에도 그 제사의 혜택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다해야 할 의무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만사는 허사로 끝난다.

 

💡 화목제 희생 규례(5~8절) : 3장, 8:11~36, 본문 5~8절, 7:15~18 참고.

  • 본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활 가운데서 실천해야 할 규례들을 다루고 있는 바 본절에서 다른 희생 제물이 아닌 화목제 희생이 특별히 언급되어 나온 것은 이 예식만이 일반 백성들이 참여하여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먹는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그 희생 예물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 어떻게? ‘너희를 위하여 열납되도록...’
  • 여기서 기뻐하시고 열납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화목제 희생 예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열납하시도록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을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받아들여지고 난 후. 따라서 이제 다시 열납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예배자의 신분을 제3일에 희생 고기를 먹음으로 인하여 상실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 이는 화목제를 통해 거룩함을 입은 예배자가 그 거룩함을 업신여기고 사욕에 휩싸여서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고기를 먹음으로써 거룩을 훼손했다는 의미.이러한 자는 마치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다시 타락한 자와 같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자와 같다(히 6:4-6). 그런 자에게 임하는 형벌이 8절에 명시된다.
  •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그 분을 거룩하신 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심지어 죄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던 것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를 못박은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않고는 행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더욱 불행스러운 일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을 쉼 없이 계속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문장에 이어지는 이러한 자에게 주어질 심판을 보며 우리는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 ⇒ ‘여호와의 성물’을 평범하게 취급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생각한 것과 동일하며 이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인 성막을 보통 집이나 다를 바 없이 여긴 것이며, 그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화목제의 예물의 고기도 다른 짐승의 고기와 구별없이 먹을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18:29)
    • 이 문구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처음 등장한다(창17:14. 창17장에 나타난 이 문구는 본문의 문구와 자구적으로 완전히 일치, 거기에서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이유를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ㅗㄱ 말하고 있다. 즉 할례 언약을 배반(파기) 했기 대문에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을 잃고 끊쳐지는 형벌을 당하게 됨을 밝히고 있는 것.
    • 과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위해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의 내용은 그들을 번성케 하고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이었다(창 15:1-5 ; 17:1-8). 그들은 단지 그 말씀을 믿고(창 15:6)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언약의 표징 곧 할례를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창17:9-14).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지킬 규례들을 말씀하신다.그런데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 희생 제물의 고기 취식에 관한 규례를 어긴다는 것은 곧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언약에 대한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그 언약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믿음은 곧 온전한 행함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이 규례들 역시 근본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곧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이었다(출 19:1-6). 본문의 화목제 역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제사로서 궁극적으로는 그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7:15-18; 엡 2:11-18; 골 1:20.21).

9~18절. 선민의 사회적 기본 의무

Ⅴ. 저들이 수확할 때는, 밭모퉁이의 이삭들은 다 줍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 두라고 했다(9, 10절).

경건의 사업을 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까지 자선의 행위도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이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모퉁이에 있는 얼마간의 곡식들은 남겨 두어야 했다.

유대 학자들에 의하면, "그 곳(남겨 두어야 할 부분)은 그 밭의 1/6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삭뿐만 아니라 포도송이도 얼마간 남겨 두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지나쳐 버리고 행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이러한 율법이 문자적인 뜻 그대로 우리를 구속할 힘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aside> 💡 곡식을 추수할 때 밭의 가장자리까지 완전히 추수를 다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 두라고 명령하신 것은 추수하는 자의 노고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객에게 곡물 얻을 길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교훈하시기 위한 것.(23:22)

→ 이는 땅 주인에겐 가난한 자들과 객들에게 관대한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며(룻 2:15,16), 반대로 가난한 자와 객들에게는 구걸을 하는 대신 스스로 자기들의 필요를 위해 노동을 해서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서로 돌아보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를 원하셨다.

  • 밭에 떨어진 낟알, 기타 곡물을 줍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한다.
    • 거두어 들인 것만으로도 층분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이삭마저 주우려 하는 것은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또한 이것은 추수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얻은 이득으로 보며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한 태도로 볼 수 있다.
    • 잠언 기자는 이러한 인색한 자(악한 눈이 있는 자)를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 28:22).
  • 가난한 사람, 타국인을 위하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 것
    • 타국인: 한곳에 정착한 거주자들이 누리는 갖가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신분으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자들.)
    • 신24:19~22 — 가난한 자와 객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구절.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의 품 밖에서 살아가는 것도 영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요 나그네 된 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천국 백성 삼아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역시 주변의 이러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또 육적으로 힘들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특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자와 가난한 자들 옆에서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땅에 소외된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증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 ⇒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도 비참한 고통을 당하며 살았다는 사실과 애굽인들과 섞이지 못한 채 언제나 나그네로 살아야 했던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시며 바로 그와 같이 가련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 응답으로 어려운 처지와 고통중에 있는 자들에게 긍훌을 표현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본문이 말하는 규례의 동기도 이와 동일하다.
  1. 우리는 탐심을 내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모든 것에 욕심을 내서도 안 된다. 또 하찮고 소소한 일까지 권리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2. 우리가 수고한 결과로 가난한 사람들이 양식을 얻게 되고 원기를 되찾게 되는 것을 볼 때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몫이 되지 못한 모든 것은 손해 본 것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간 것은 낭비된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추수기와 같이 즐거운 시절이 우리에게 돌아오면 자선을 베풀기에 합당한 시절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기뻐할 때에 가난한 자가 우리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을 것이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찬미할 때면, 우리의 골육지친도 우리를 찬양할 것이다.

●이웃을 네 몸같이 (레위기 19:11-18)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Ⅰ. 무엇을 행하든지 정직하고 진실하라는 것이다(11절).

하나님은 각자에게 섭리로써 몫을 지정하셨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써 각자에게 지키라고 몫을 지정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그가 지정하신 경계가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돌보신다. 즉 도적질을 금하셨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라."

 

💡 본절이 속이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에 앞서 도둑질을 먼저 소개한 것은, 6:2~4에서도 보듯이 사람은 이웃의 훔친 재산을 자기 손아귀에 안전하게 두기 위해 속임수, 거짓말, 맹세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사욕이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가져온다. 이는 비단 물질을 훔치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것, 즉 이웃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또 부정 행위를 금하셨다. "너희는 속이거나 거짓 행동을 삼가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부정직하게 생긴 것인지-그런 것으로 된 부유함은 진정한 부도 아니거니와, 오래 가지도 못한다-정직하게 생긴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 ‘속이다’ : 이 표현이 사용된 문맥들을 보면 — 어떤 것을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속이거나 사기를 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대중 앞에서 뻔뻔스럽게 부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

우리의 마음에 진실이 깃들기를 원하시는(시 51:6), 진실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에도 진실이 있기를 요구하신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즉 일상의 대화 속에서나, 거래를 할 때에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지켜지는 율법이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지켜지는 율법이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골 3:9).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진실한 말도 들을 자격이 없다. 거짓말을 범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 거짓말을 되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는 금령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들더러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거짓말하다’ : 거짓된 약속을 하거나 약속을 하고도 거짓된 마음으로 그 약속을 깨뜨리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

  •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려할 때(시 44:17:89:33,34) 이러한 거짓됨은 하나님의 성품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12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절대로 취해서는 안될 범죄인 것.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진실에 입각한 분명한 자기 입장 표명이다(마 5:34-37; 약 5:12). 이는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을 대하는 자에게만 가능한 태도이다.
    • 성경은 (거짓말하는 것을 옛사람)과 그 행위로 규정하면서 vs (새사람을 입은 자는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하심을 받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골 3:9,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까지 새롭게 바꾸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실은 그 새로움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 진실을 왜곡하고 진리를 부인하거나(카하쉬) 거짓 약속을 하고 자신의 말을 어기는(솨카르) 행위들은 언약 공동체의 윤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 행위들은 공동체 구성원 간에 의심과 불신과 중오를 일으키며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기반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서로’ : 언약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간에 형성된 친분 관계를 내포하는 말. 공적이든 사적이든 생활 속에서 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Ⅱ.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지극히 존중하도록 하며(12절), 그를 걸어서

  1. 거짓말을 증거하지 말라고 했다. "너희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로 맹세한다는 것은 더욱 나쁜 것이다. 또
  2. 그의 이름을 걸어 사소한 일이나 부정한 일에 증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네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곧 신앙적인 용도 외에 다른 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 ‘맹세’: 여기서 ‘거짓’에 해당하는 단어는 11절에서 보았듯이 ‘거짓 약속’이란 의미를 내포. 그리고 고대 히브리인들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맹세할 때 주로 맹세하는 자신보다 더 위대하거나 고귀하다고 상호 인정하는 제 3자를 빌어 맹세했다. → 따라서 ‘내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맹세자나 그 맹세를 듣는 자 모두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 안에 담겨진 의미와 속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 이름을 보증으로 삼아 서약함을 뜻하는 것.

→ 그러므로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출 6:2.3 설명 참조)를 사용하여 거짓 약속을 위해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속되게 취급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어찌 그 존귀한 이름을 한날 한 순간의 변명이나 자신의 사욕을 위한 거짓 약속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호와니라’

  • 언약을 상기시켜 주시는 하나님.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에서 그 백성을 해방시켜 주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란 당신의 이름은 거짓을 위한 맹세로 인하여 결코 더럽게 사용될 수 없는 이름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상기시켜 주신 것. </aside>

Ⅲ. 남의 권리를 빼앗거나 압제하지 말라고 했다(13절).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사취하거나, 강탈해서는 안 된다. 또 남의 권리에 속한 것, 특별히 "품꾼의 품삯" 을 압류해서는 안 된다. 품삯을 "밤새껏 네게 두지" 말라고 했다. 만약 노동자 본인이 원한다면 그들의 일이 끝나는 대로 가능한 한 즉시로 그들의 품삯을 지불하도록 하자. 품삯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도 큰 죄이지만 그것을 연기하여 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하나님의 복수를 부르는 죄악이다(약 5:4).

 

💡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하여 다른 이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자기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취하는 행동.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경우

— 이렇게 남을 억압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다는(눅 4:18)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의와 긍훌을 등시에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억압당하는 자에겐 구원을, 억압하는 자에겐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 억압당하는 자는 ‘이웃’(레아)이다.

  • 특별히 ‘레아’란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억압을 당하는 자가 억압하는 자와 본래의 신분에 있어 서로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형제요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힘을 사용하여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억누르는 왜곡된 상태를 보여 주시기 위함.

품꾼의 삯을 밤새도록 자신에게 두지 말 것..

  • 품꾼은 : 고용되어 노동하는 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낮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서 일하고 있는 일일 고용직 노동자.
  • 히브리어 원어 성경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품꾼의 삯이 제때에 지불되지 않는 경우를 언급하는 것. 밤새도록 그 ‘삯’ 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인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맘에 그 돈을 특별히 사용할 데가 있어서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 품꾼을 고용한 주인에게는 이 돈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고용인에게 있어서는 품삯이 바로 지불되지 않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저녁 뿐만 아니라 그 다음날 아침에 먹을 음식을 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고용주가 고의로 이러한 상황을 야기시켰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모르고 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웃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는 소극적인 압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그 이웃을 압제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계신다.
  • 압제 받는 품꾼은 .. 힘이 없기 때문에, 학대하는 자에게 저항할 수도 호소할 수도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약5:4).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 압제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며 죄를 추궁하실 것이다(신24:14,15).
  •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자라도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때문에 자기 아래에 있는 자들을 의와 공평으로 다루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동일하게 취급하신다(엡6:9, 골4:1). — 세속적 직장의 윤리도 이 세상의 주관자이시며 공의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법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Ⅳ. 자신을 스스로 돌 볼 수 있는 자들에게 특별히 친절히 대하여 그들에게 신용과 안전을 지키라고 했다(14절).

1. 귀머거리에게 신용을 지키라. "너희는 귀머거리를 저주하지 말라."

즉 자연적으로 귀머거리여서 전혀 듣지 못하는 자는 물론이요, 당장 본인의 눈앞에 없어서 저주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대하여 분개심을 표시하지 못하며 같이 화를 내지 못하거나 자신을 변명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와, 마치 다윗처럼(시 38:13) 그런 말을 듣지 아니했다는 듯이 참고 견디면서 그런 말에 개의치 않으려는 자들에게도,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수하려 하지 않거나 또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라고 하여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 혹 본인들은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 사람이 듣지 못한다고 해서 조롱의 말이나 심지어 저주의 말을 하지 말라는 일차적 의미와 함께 그러한 행동으로 그를 천한 존재로 만들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게 하지 말라는 이차적 의미도 포함. — 즉 공동체 안에서 소외시키거나 대중적인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

장애인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응대해 주신다(신 27:18). 육체적 장애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를 무시하는 것은 그를 창조하신 자까지 업신여기는 행동으로 이는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할 죄악이다.

 

2. 또한 우리는 맹인들의 안전을 보살펴 주는 친절을 지녀야 한다.

그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가중케 하는 짓이요,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악용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이 금령은 맹인을 도와주라는 계율과 맹인들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 주라는 계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는 것 같은 야만적인 짓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말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즉 쉽사리 그런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 가서 저들에게 피해를 당하고 마는 그런 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악한 생각을 말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일체 삼가도록 조심해야 한다(롬 14:13; 고전 8:9). 또 그러한 죄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즉 "너희는 귀머거리나 소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무기력한 자들을 도우시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라. 하나님은 저들의 호소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으면 남에게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은 자연히 삼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 다시 한 번,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 사람의 근본적인 가치 체계가 바뀌어 여호와를 중심에 두는 것을 말한다(눅12:4,5).
  • 이제까지 육신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살던 사람이 육신과 영혼을 함께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육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육신에 결함이 있는 장애인에게 경멸의 태도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Ⅴ. 재판관들이나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편파성이 없이 공정하게 판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15절).

그들이 임명에 의하여서 재판관이 되었든지, 또한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에 양편의 합의에 의해서 심판관이나 중재자로 선출되었을 때이든, 그들은 양편에 모두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며, 온갖 기술을 다하여 공평의 법칙을 따라야 하며, 그 문제의 사실에만 순수히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지 결코 그 당사자들의 신분 따위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의를 그릇쳐서는 안 된다.

 

💡 본문이 경고하는 것은 재판의 기준을 사람의 외모나 사회적, 경제적인 지위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명령이다(약 2:1.9).

  • 사람’을 공의로 재판할 것: 여기서 ‘사람’ — 재판을 행하는 자가 재판을 받는 자를 죄인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죄가 입증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까지는 ‘이웃’ 으로 보아야 하는 것을 말해 주며 또한 재판자는 높은 신분의 위치에서 낮은 신분에 있는 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재판 받는 자가 모두 동등하다는 의식을 갖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함을 보여 줌.
  • ‘공의로’ : 외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평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오직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
    • 고대 사회에서 재판을 행하는 자는 — 직업 판사가 아닌, 마을의 장로들. 따라서 사람들과 재판장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판 절차가 왜곡되기 쉬웠다.
    • 그러므로 본문에서 공의를 강조한 데 이어 제 16절 마지막에 ‘나는 여호와니라’ 는 말이 나온 것은 공의와 유일한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고, 그분은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습을 따라 그분이 주신 율법에 의해 공평히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
  1. 즉 가난한 자에게 동정해서도 안 된다.

"가난한 자를 두호하지 말라" (출 23:3). 가난한 사람에게 어떤 동정을 베풀어서 법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가 아닌 것을 그에게 부여해서는 안 된다. 또 과오에 대한 어떤 정당한 처벌을 가난하다는 이유로 면제해 주어서도 안 된다.

  1. 또한 법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한 호의로 판단을 그릇치기가 일쑤이지만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한다고 하여 그릇 재판해서도 안 된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명령에 따라서 "법관들은 한편은 서 있는데 다른 한편은 앉아 있으라고 하는 따위의 편파적인 처사를 행하여서도 안 되며, 한 사람에게는 마음대로 말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간단히 줄여서 말하라고 해도 안 된다" 고 말한다(약 2:1-4  참조).

 

Ⅵ. 우리는 남의 명성에 피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 일상적인 말에서도 그러하다. "너는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 (16절).

비밀을 누설하고, 범죄를 가중시키고, 좋지 못한 일을 악용하고, 남의 명성을 훼손하려고 하며, 이웃간에 불화의 씨앗을 뿌리며 다니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실책을 유발하는 장본인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고자질" (개역성서:" 논단")을 뜻하는 원어는 행상꾼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자질하는 자는 나쁜 소문을 이집 저집 날라 다니며 흔히 소문을 장사하여 서로간의 중상을 물물교환하기 때문이다. 이런 죄악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들어보라(잠 11:13; 20:19; 렘 9:4, 5; 겔 22:9).

 

💡 본문은 쓸데없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또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지 말라는 경고.

  1. 또한 거짓 증거를 금했다. 아무도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을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그가 결백하다면, 기록된 자들(잠 1:11-14)처럼 잔인한 자들과 더불어 동맹하여 그를 해치지 말라."

유대 학자들은 이 뜻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너희는 위험에 빠진 형제를 서서 보지만 말고, 비록 네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위험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가서 그들을 구해주라." 또 말하기를 "고소당한 자를 결백하다고 증언해 줄 수 있는 자는 이 율법에 따라서 그렇게 증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한다(잠 24:11, 12  참조).

 

💡 본문을 직역하면, ‘네 이웃의 피 위에 서 있지 말라’

  • 본문이 전달하는 두 가지 의미는,
    1. 매우 능동적으로 상대방을 직접 해치는 것: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처럼.
    2. 결국 어떤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상대방을 중상하거나 재판을 불공평하게 하여 결국 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판결을 가져오게 하는 할 수 있는 일.
  •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피조물인 사람의 핏소리에 무심하신 분이 아니시다(창 4:10,11). 비록 직접적인 살인까지는 가지 않았다 해도 본문은 거의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는 ‘피 위에 서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일을 저지른 사람 역시도 반드시 그 피 값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창 42:2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공의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다른 사람의 ‘피’ 를 밟고 올라서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Ⅶ. 이웃 사람을 사랑으로 견책해 주라는 명령이 있다. "너희는 너희 이웃을 지혜롭게 책망하라" (17절).

1. 네 자신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미워하지 말고, 그를 책망해 주라.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우리는 그를 보복하기 위하여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충분히 보복을 하기까지는 자기들의 분노를 감추어 두고 있듯이(삼하 13:22), 선악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돌려서도 안된다. 오히려 지혜롭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의 분개심을 제어하고, 그에게 사리를 잘 설득시켜 잘못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혐오감을 풀어 버리도록 해야 한다. 이 것이 우리의 구주께서 보여주신 법칙이다(눅 17:3).

 

💡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 ‘마음으로’ :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아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것.
    •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도 먼저 마음에 분을 품었기 때문(창 4:5)
    •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음을 가리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라고 했다(렘17:9).
    •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악한 생각과 살인과 훼방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9).
  • 결국 형제의 피를 홀리는 것은 의부로 드러난 현상일 뿐 그 근원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마 5:21-23; 요일 3:15).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는 분이시기 때문에(렘 17:10), 본문의 명령은 형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가두어 두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여 선한 마음으로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 그러므로 너희는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죄지은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책망하여 깨우쳐야 한다. 그리하여 회개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의 죄가 용서될 수 있고,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을 것이고, 그 죄로 인한 벌을 받지도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우정어린 견책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견책을 할 때나 받을 때에는 늘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리라" (시 141:5). "친구의 통책" (잠 27:5, 6)은 신실하고 유익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기에 엄격히 명령되어 있는 바이다. 즉 "너희는 지혜롭게 책망하라(개역:" 책선하라"). 어떤 구실을 붙여 그런 일을 빼먹지 말라!"

 

💡 네 이웃을 책망하여,

  • 원문의 뜻, ‘너는 분명히 꾸짖을 것이라’.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분명하게 드러내어 스스로 깨닫게 하라는 의미. 즉 형제나 이웃이 어떤 잘못이나 범죄한 일이 있으면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분명히 인식시키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견책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우리가 범하게 되는 죄가 있다. 그것은 곧 형제를 미워하는 죄와 같다고 했다. 우리는 즉시 이렇게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같다. 그러므로 그의 과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그를 기분 나쁘게 할꺼야!" 하는 따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는 친절을 베풀리라" 고 말해야 한다. 사랑은 남의 죄를 덮어 준다. 그러나 죄인 자신을 두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2) 견책을 해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당하는 불행이 있다. 즉 "우리는 그를 인하여 죄를 당하게 된다" 는 것이다. 짐이 무거워 쓰러져 버린 원수의 나귀도 도와주어야 한다면 우리 친구의 영혼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출 23:5) "그를 인하여 죄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의 죄를 담당하게" (난외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 을 견책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일에 물들게 되고, ex post facto-사후에는 그러한 일에 종범(從犯)이 된다(엡 5:11).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염려해 주어야 한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말하는 자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다.

 

Ⅷ. 또한 여기에는 모든 악의를 버리며 형제애를 옷입으라는 요청이 나타나 있다(18절).

1.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말라."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17절)는 말도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마음에 악의를 품는 것은 이미 살인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가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되갚아서는 안 된다. 즉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복수심으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고, 그의 과실을 잊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그처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모욕과 침해에 대한 분개심을 항상 품고 있고, 말로 "영영히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 (삼하 2:26  참조)은 가장 악질적인 것이요, 우정을 파멸하는 독이다.

2.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지녀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8절).

 

💡 ‘네 이웃을’

  • 네 백성의 자손(아들). 이 계시가 주어진 당대의 언약 공동체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대의 오고 오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의를 품거나 노를 쌓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하나님께서도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이 여겨 주셨는데(렘 3:12), 하물며 죄 많은 우리가 어떻게 형제에게 노를 끝까지 품을 수 있겠는가?
  • 언약 공동체는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함께 구속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다시 말하면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의 상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을 붙잡고 자신의 분노와 원한을 퍼부을 수 없으며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마 18:27,28).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자기의 잘못은 손쉽게 용서하며,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사랑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이런 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것을 율법의 제 2대 계명으로 삼으셨다(마 22:39).

바울 사도도 둘째 율법판의 율법을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 된다고 했다(롬 13:9, 갈 5:14). 우리는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실하게 그리고 가식됨이 없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대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입증해 보여서, 우리의 최대한의 힘을 기울여 그의 상함을 막아 주고 그의 유익을 추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것 그대로(마 7:12) 이웃에게 베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그들의 마음 자리에 두어" 보아야 한다(욥 16:4, 5).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유익을 부정해야 하기도 한다(고전 9:19  이하). 바로 이 점에서 복음은 율법 중에서 가장 우수한 계율까지도 능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버리심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 는 교훈을 주셨으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요일 3:16).

 

●혼합을 금함 (레위기 19:19-29)

Ⅰ. 교잡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19절).

창조 때에 하나님은 육축을 "그 종류대로" (창 1:25)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질서가 최선의 것이요, 넉넉한 것임을 믿고 괴물이 되기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너는 그의 지으신 것에 더하거나 덜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할까 하노라" (전 4:14).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탁월하여 더하거나 덜해도 오히려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결합하신 것을 우리가 분리시켜서는 안 되듯이, 그가 분리하신 것을 결합시켜도 안 된다.

 

💡 하나님의 창조 질서. 하나님의 창조는 분리의 역사로 규정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물을 바다에서 분리하여 드러나게 하셨다.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에서 분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셨다. 분리의 역사는 곧 거룩을 창조하신 역사이다.

그런데 각 동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무시하고 다른 종류끼리 서로 교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혼탁하게 하여 무질서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서 거룩을 상실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잡스럽게 섞는 데 익숙한 이방 백성들과는 달리 거룩한 나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바로 하나님께서 분리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창조 질서를 지키고 보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곡식의 씨앗을 섞어 뿌리는 일이나 면모교직된 옷을 입지 말라고 금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지니던 미신적 풍속이었기 때문이든가, 이스라엘인들이 각별히 조심하여 이방인과 혼합되지 말것이며 이방인들의 관습과 하나님의 제 규례를 섞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본문의 식물의 경우는 현대 과학이 말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두 가지 종의 결합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씨앗을 한 곳에 뿌리지 말 것을 명령하는 것. 농작물을 윤작하는 대신 이 방법을 택하면 땅이 더 빨리 황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마너, 더 근본적으로는 애굽의 풍습을 염두에 두고 제정한 규정.

애굽의 벽화에는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는 정원과 과수원의 그림이 있다. 이는 보기에 좋아 보여도 거룩함이 가지는 분리의 개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과 거룩함의 근본 개념을 알려 주시고자 본문의 규례를 세워 주신 것.

왜 두 재료로 만든 옷(솨아트네즈)을 입어서는 안되는가?

  •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 이 단어가 히브리어가 아니고 애굽에서 유래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직조 옷감들이 시리아에서 애굽으로 들어왔던 사실을 감안할 때, 본문의 규정에는 애굽의 풍습을 피하게 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거룩의 개념을 생활 가운데 실천케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인즈워드(Ainsworth)는 이렇게 주장했다. 즉 그 율법은 이스라엘이 종교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보존키 위함이며, 율법과 복음의 모든 교의를 조금이라도 다른 율법이나 복음과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신앙이 필수적이듯이, 선행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명분 아래서 이러한 것을 혼합시키지 말라고 금지되어 있다(갈 2:16).

 

Ⅱ. 정혼한 여자 노예와 간음을 범하는 자에 관한 처벌법이 나타나 있다(20-22절).

그러나 간음당한 여인이 정혼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율법은 아무러한 처벌 규정도 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정혼한 처녀이고 그녀가 노예가 아닐 경우에는, 죽음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정혼은 했으나 여자 노예인 처녀일 경우에는(비록 그녀의 결혼이 성립되기 전에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 했었지만), 사형만은 면제되었다.

그런데 간음의 경우에는 남녀 둘 다 벌을 받아야 했다. 또는 어떤 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벌은 여자만이 받았고, 남자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고 한다. 약혼이 맺어진 것뿐이었지만 간음의 범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던 것은, 결혼의 영예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예인 여자를 더럽혔을 때에는, 자유의 몸인 여자를 더럽혔을 때와 같은 벌을 받을 수는 없었으니, 그것은 자유의 영예를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자유인과 종 사이에 그렇게 큰 차별이 있었다(갈 4:30).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차별을 용납지 아니한다(골 3:11).

 

💡 20~22절이 다루는 것은: 정혼한 이방 여종을 주인이 간음했을 경우의 규례

  • 아직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거나 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 단지 결혼하기로 내정되었다는 의미. 따라서 그 여종은 그 남자에게 넘겨지지 않고 여전히 자기 주인의 집에 머물고 있는 상태.
  • 보통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인을 어떤 사람이 통간하였을 경우에는 간음으로 여겨져서 둘 다 죽임을 당해야 했다(신 22:23,24). 이때는 그 처녀의 신분이 종이 아니라 자유자의 신분이었을 경우이다. 또한 여인이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던 경우에는 남자만이 죽임을 당했다(신 22:25-27). 그러나 본문은 또 다른 상황을 말해준다. 즉 이 경우에 여인의 신분은 여종이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인 것.

그 배상은 누구에게?

  • 속건제물. 본문은 배상해야 하는 대상이 ‘여호와께’ 라고 한다. 그 여종과 정혼한 자에게 배상하는 것이 아니다.
  • 실제로 그 여자와 정혼한 자가 아직 주인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그 여인이 해방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배상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간음과 같았으며,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례를 파기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림으로써 보상과 함께 속죄를 구해야만 했던 것.
  • 그리하면 사함을 받을 것.. : 하나님의 인간의 회개하는 심령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사죄하시는 자비로우심..

Ⅲ. 유실수에 관한 율법이 나타나 있다.

즉, 심지어 첫 3년 동안은, 만일 그 나무가 조숙하여 그 동안에 열매를 맺더라도 그 과실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23-25절).

 

💡 23절, 당시 척박한 시내 광야를 정착하지 못하고 여행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착한 곳을 가리키는 ‘그 땅’이란 표현과 또한 확실한 정착을 상징하는 ‘과목을 심는다’는 표현은 매우 큰 기대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때때로 정원사들이 그러하듯이, 자기들의 어린 과목에 열매가 맺는 것을 보면, 즉시 따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일찍이 열매를 맺는 것은 과목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는 열매가 아무리 완전히 익더라도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제 4년에 가서 열면, 그 열매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했으며 그 중의 1/5은 제사장들에게 바치든지 여호와 앞에서 즐겁게 먹으라 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열리는 것은 모두 그 주인의 것이 되리라고 했다.

  1.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저들에게 이방인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는 율법이라고 한다. 즉, 이방인들은 저들의 과실의 첫 소산을 자기들의 우상들에게 성별해 바쳤으며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모든 과실들이 상해 버린다고 믿었다 한다.

그 과실에 관한 이 율법은 동물에 관한 율법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피조물들은 난지 8일이 경과하기까지는 제물로 바칠 수 없으며 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기에게는 할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22:27 절 참조).

하나님은 저들의 나무의 첫 소산을 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첫 3년 동안에 난 실과들은 제 8일이 채 못된 양이나 염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취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최상의 것을 가지시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첫 소산이 예물로 바쳐지지 아니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안의 실과들은 무할례자들처럼 여기어야 했다. 즉 제 8일이 경과되지 못한 동물이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었기 때문에(창 17:10.11), 나무를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는 것은 아직 그 나무 열매가 언약 백성에게 속해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4절에서도, 3년이 지난 나무 열매를 거룩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삼 년 동안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에 특별히 나무 아래에서 예식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신 12:2), 다른 이유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삼 년 간의 기간을 통해서 나무들을 정결케 하시고자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새로 심은 나무 뿐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가나안 땅의 과실 나무도 3년 간은 수확을 금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들어가게 되는 환경 속에서 매우 세심하게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여야 함을 교훈하시는 것이다. 즉 ~~좋아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든 것을 자기 취향대로 취하는 것~~은 보기에 좋고 먹음직하여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가 저지른 죄악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으며(창 3:6), 그렇게 되면 가나안 땅은 제 2의 에덴 동산이 되어 그들은 쫓김을 당할 것이다.

24절,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 과실에 대하여 세속적인 것과 구별됨을 보여 주는 ‘거룩’(코데쉬)이란 표현을 쓴 것은 — 모든 과실이 4년째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래서 그 과실은 인 간의 식욕을 채우는 데 소비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은혜를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했던 것..
  •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 거룩한 것은 모두 여호와께 돌려져야 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란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이 나왔다. 거룩한 백성은 이렇게 자기 소산을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일에서부터 거룩의 실제적인 개념을 배워 나가는 것이다.
    • 원문의 뉘앙스:
      1. 거룩한 열매가 여호와께 대한 찬송이 될 것이다: 거룩한 열매를 거둔 것이 찬송의 제목이 된다.
      2. 찬송하며 여호와께 드려: 찬송하는 것과 드리는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짐을 암시.
  1. 이로써, 우리는 생활의 안락을 서둘러 취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그것을 향유할 만한 때가 되기까지 기꺼이 인내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특별히 땅의 소산을 우리 나름대로 차지하기에는 합당치 못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땅의 소산에 관한 우리의 권리는 금지된 열매를 먹어 버린 우리의 첫 조상들로 인하여 상실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의하여서" 만(딤전 4:5) 그 권한을 회복할 수 있다.

 

💡 오년 째 되는 해, 그 이후로 계속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또한 해마다 처음 익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2:12,14; 신26:2,10).

 

23~25절의 모든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 ‘그렇게 행동한 결과 그 나무의 소득이 너희에게 해마다 더하여질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첫 소산을 바치는 그 백성의 믿음에 대해 해마다 그 소득을 더하여 주시는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잠3:9,10).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23-25절의 마지막 부분에 이 표현을 쓴 것은 모 든 땅과 그 소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 하나님 백성의 소산이 증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이 노력하고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땅의 주인 되신 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만 땅의 풍성한 소산이 주어지는 것..

Ⅳ. 이방인들의 미신적 관습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26-28절).

 

💡 26절, 본문은 단순히 ‘피를 먹지 말라’ 는 율법의 반복이 아니라(3:17; 7:27; 17:10-14) 그 율법을 더 강화해 주는 규정. 즉 피를 먹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피가 배어 있는 고기도 먹지 말라는 명령인 것. 또한 생명이 곧 그 피에 있기 때문에 본문의 명령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더 깊이 인식시키는 명령.

  1. 이방인들처럼 피를 먹거나-그들은 자기들의 희생의 제물의 피를 그릇에 모아서 우상을 위하여(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시고는 그 우상 주위에 둘러앉았던 것이다**-그 고기를 피 채로 먹는 것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은 잔치를 함으로써 그들의 귀신들과 교제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습을 따르지 말며, 하나님의 제물의 피는 제단에 뿌려져야 했고, 그리고 나서는 제단의 발 밑에 붓고, 그 나머지는 밖으로 내어가야 했던 것이다.

💡 피를 먹지 말라는 규례가 이방인의 이교적 풍습을 다루는 26~2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피를 먹는 것 역시 이교적 풍습과 관련됨을 암시함.

실제로 당시 이방인들은 산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피를 먹었다고 한다(겔 18:6.15; 22: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방인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측면에서 피 식용에 대한 금지 규례를 반복하신 것이다.

 

2. 복술과 술수, 그리고 행운이 있는 시기와 불운이 따르는 시기를 점치는 미신적 행동을 금했다.

이런 따위의 신기한 기술은 그 당시 애굽 제사장들이 고안해 낸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기에 미혹되어 그것을 신용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인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관습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런 것을 모방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 (롬 3:2)이 마귀에게 뜻을 묻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내신 바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더욱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이다(요일 3:8).

그리스도인들이 점을 친다든가, 운수를 물어본다든가, 병고치려고 주문을 사용한다든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하여 무당을 이용한다든가, 별똥이 떨어지거나 토끼가 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것은 주 예수를 모독하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그런 것은 이방 종교와 우상 숭배를 지지하는 일이요,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고귀한 이름에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무엇이 나쁜가" "라고 묻는 사람들은 율법과 복음을 둘 다 무시하는 것이다. 마귀와 교제하는 자들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조금도 나쁜 짓이 아니라는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20).

💡 보편적으로 행해진 풍습을 보면 술잔에 여러 액체를 넣어서 그 위에 형성된 모양을 읽어 미래의 일을 점치는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은 요셉의 사적에서도 암시되어 있다(창 44:2,5,15). 후대의 기록에는 고대 근동에 화살을 혼들거나 희생 제물의 간을 살펴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일도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겔 21:21).

이러한 이교적 풍습이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
  •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그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했으며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을 따라 지내야 했다. 항상 우리의 모든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모아져야 되며 결코 우리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성경의 인도를 저버리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 몸차림에도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미신적인 관습이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것을 모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너희는 머리끝을 둥글게 깎지 말라" (26절).

하늘의 성좌를 예배하는 자들은 그 성좌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둥글게 깎았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머리가 천체를 닮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속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며 그들의 거짓 신에게 존경을 바치기 위해서 된 일이니 우상 숭배적인 것이었다.

 

💡 머리의 관자놀이 한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한쪽까지 머리 뒷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만드는 것을 의미함.

  • 사람의 머리 스타일은 문화와 종교를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를 특정한 스타일로 깎거나 다듬는 것은 직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며, 다른 경우에는 애도의 표시로 머리를 밀기도 했다(21:5; 신 14:1; 렘 16:6).
  •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아랍 부족 중에는 그들의 신인 오로탈(Orotal)을 경배할 때에 본문의 모습과 같은 머리 스타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이방의 예식을 따르지 말 것과 더불어, 나아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살전 5:22).

4. 이방인들이 장례식 때 슬픔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현한 의식이나 예식을 모방하지 말라고 했다(28절).

즉 그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들 몸의 살을 베거나 무늬를 그려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지옥의 신들을 달래기 위하여 그렇게 했으며 고인이 된 자기들의 친구들에게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 죽은 자를 위하여 살을 베지 말 것

  • 여기서 특별히 금지하고 있는 것은 — 슬픔을 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몸을 손톱이나 날카로로운 물건 등으로 베거나 찢어서 상처를 내는 이방의 풍슴(신14:1; 렘16:6; 41:5; 47:5; 48:37).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에게 그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러한 이교적인 예식을 엄하게 금지하여 거룩한 백성으로서 품위를 지킬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 가나안의 신화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발견되는데 가나안의 신화 가운데는 바알(Baal)을 위해 ‘엘 킨드’ 는 칼날로 피부를 찢으며, 턱과 볼을 베며, 팔을 갈퀴질하며, 가슴과 등을 밭갈이 하듯이 문대었다는 기록이 있다(Ringgren). 이와 같은 자해행위는 풍요를 기원하는 바알 종교의 예식에서도 암시되고 있다(왕상 18:28).

몸에 무늬를 놓지 말 것

  • 특별히 고대 근동 세계에서 문신은 자신이 특정한 신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본받아 어떠한 자국도 몸에 만들지 말아야 했으며, 깨끗하고 정결한 외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이 선택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내적인 신분을 드러내야 했다(신 14:1,2).
  • 믿는 자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구별하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전 6:19, 20).

그리스도는 수난을 받음으로써 죽음의 성질을 변화시키셨고, 죽음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참된 친구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명복을 빌 필요가 없듯이(하나님이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면 죽음도 역시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 없는 자들처럼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 성별하신 사람들은 이러한 엉터리 신들의 형상이나 이름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1. 끝으로 자기 딸들을 부정하게 매음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29절).

그런 것은 아마 이방 사람들이 예배하는 그 부정한 영들이 그렇게 가증스러운 짓을 매우 즐겨했던 것이다. 음행이 종교적 의식의 하나로 지켜지고 그들의 성전에서 감행되었을 때 그 가나안 땅에는 온통 사악한 행위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그토록 더러운 일이 성전 문에 들어서게 되자마자 마치 강력한 급류처럼 온 나라를 휩쓸게 되었고, 도덕과 정결이 라는 모든 울타리를 무너져 내리게 했던 것이다. 마귀 자체가 먼저 사람들을 그런 가증스런 짓을 하는 예배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마귀는 그러한 가증스러운 짓을 범람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을 찾고 순전한 영에게 거룩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은 당연히 헛된 애착을 버린다.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과 자기 가문에게까지도 치욕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 ‘너는 네 딸을 창녀로 만들어서 네 딸을 욕되게 하지 말라’

  •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는 경우는 많은 빚을 진 자가 돈을 구하기 위해 자기 딸을 창기로 파는 것과, 이방 신전의 성창으로 바칠 때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고대 근동에서 매우 성행한 이교적인 종교 예식과 관련된다. 즉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이교의 예식 가운데 이방 신전에 소속된 창기와 음란한 성적 관계를 맺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예식으로서 그들은 이 여자들을 ‘거룩한 여자들’ 로 불렀다.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여인들의 성적 순결을 지키게 함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게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방 종교의 거짓된 거룩의 개념을 뿌리 뽑기 위하여 본문의 규례를 주신 것이다.
  • 본문 전체를 문자적으로 다시 번역하면 ‘그리하여 그 땅이 창기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 땅이 계획적인 악행으로 가득 차지 않게 하라’
  •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백성들은 18:24-30에서처럼 더러워진 땅에 의해 토해 내어지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이러한 악행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30절에 제시된다.

●몇 가지의 도덕률 (레위기 19:30-37)

 

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영예를 보존하려는 율법이 있다(30절). 이 율법에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미신, 그리고 모든 부정한 교제로부터 그 시간과 장소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이며 이방인들이 미신적 방식으로(26절) 정해 놓은 그러한 시간들은 일체 지켜서는 안 된다.

💡 이방인들의 이교적인 풍습을 본받지 말 것을 명령한 데(26-29절) 이어 그 대안으로 먼저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한 것은 안식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날로서 이 날을 철저히 지키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자연적으로 이교적 풍습은 가까이하지 않게 되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성도들도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세속적인 문화를 삼가해야 하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측면으로는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알 수 있다.

 

2. 성소는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정결과 준비를 갖추어서 회막에 나가도록 철저한 배려가 기하여 져야 하며, 겸손, 정중, 그리고 지엄하신 분의 존전에 전심하는 태도로써 나아가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그 때처럼 회막이나 성전 같은 하나님의 제도로 규정된 그런 거룩한 장소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율법은 예배를 위하여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숙한 회집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집은, 그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는 그리스도의 특별 임재의 약속 아래에 열리는 것이요, 거기에서는 거룩한 제 규례가 드려지는 고로 그 회집에는 마땅히 예절을 갖추고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전 5:1)

 

💡 공경하라(야레의 미완료형)

  •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함께 볼 줄 아는 마음의 상태.
  • ‘내 성소를 두려워하라’ 는 말의 숨은 의미는 ‘성소에 계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인식하고 그 거룩하신 성소를 중심으로 너희 모든 생활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라’ 는 것. 성소는 이방 신전에 익숙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전이기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만을 경외함으로써 이방의 다른 모든 거짓되고 사악한 행위와 예식을 버려야 했던 것.

Ⅱ. 무당은 물론이요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과 일체 상종치 말라는 경고의 율법이 있다.

"그들을 믿지 말며, 추종치 말라. 그들에게서 어떤 행복도 가져다주기를 희망치 말라. 그들에게 어떤 충고나 장래의 뜻을 물으려고 찾아가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그것에 속을 것이요, 하나님과 너희 자신의 양심에 가증스러움만 더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아 운명이 다한 사울 왕이 저지른 사악한 죄였다(대상 10:13).

 

💡 본문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부터 얼굴을 돌이켜 거짓되고 사악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절대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경고(4절, 20:6).

  • 신접한 자: 주로 무덤을 상징하는 구덩이를 파고 영을 불러내기 위해 온갖 종류의 예물을 그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죽은 자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를 지칭.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삼상28:7~14에서, 사울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 올리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음이 기록되어 있음. 본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해 얼굴을 돌이켜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신 내용이다.
  • 그런데 이 금지 명령이 제 30절에 나온 성소를 경외하라는 명령 다음에 나와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만이 여호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며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미래를 점치는 모든 미신의 영과 우상을 쫓는 허탄한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 신접한 자와 박수를 찾는 자는 자기들이 부정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망만을 가졌지만,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눈ㅇ는 부정하게 되기 위해서 행하는 일로 보여진다. 모든 일은 자기의 판단이나 유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이 스스로 더럽혀 자신을 파멸에 빠뜨리는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 진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평가되어지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Ⅲ. 젊은이는 연로자를 존경하라는 부탁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나라" (32절).

연륜은 영예로운 일이요 (최고의 연로자인) 하나님께서 바로 연륜에 존귀를 돌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이니라" (잠 16:31). 하나님께서 장수라는 일반 축복을 내리사 존귀케 한 자에게는 우리도 정중한 예의를 바쳐 존경해야 하는 법이다. 연로하여서 지혜롭게 장수한 자는 갑절의 존중을 받을 만한 분들이다. 그러한 자들 앞에서는 단순히 일어서는 예의보다 그 이상의 존중을 바쳐야 한다. 저들의 신용과 안위를 주의하고 경청해야 하며, 저들의 경험과 관찰력에 도움을 받아야 하며, 그들의 의논을 들어야 한다(욥 32:6, 7).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체면과 풍체에 존중을 바쳐야 하는 노인이란 바로 직무상의 연장자들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발이 연령상의 연장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연장자이든, 우리는 부모에 대하듯 존중을 바쳐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두 가지 종류의 연장자들을 존귀케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한다.

신앙은 훌륭한 예의 범절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마땅히 존경해야 할 자에게는 믿는 자들도 존중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어린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것" (사 3:5; 욥 30:1, 12)은 그 나라가 크게 타락하고 무질서해졌다는 큰 증거이다. 연로한 자는 존중을 받아야 하고, 연소자는 존중을 바쳐야 한다. "선배(장로)들에게 순복하고 겸손히 대하는 것" 은 젊은이들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덕이기 때문이다(벧전 5:5).

 

💡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앞서 언급된 노인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또는 경외가 동등하게 다뤄지고 있음. 즉 노인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이 되는 것. 즉 인생을 앞서 산 자에 대한 공경은(잠 20:29)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인간 질서에 대한 순종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
  • 노인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부모에 대한 경시와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결국 그러한 사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의해 운행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본능과 힘의 지배를 받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

Ⅵ. 외국인들에게 친절하라는 부탁이 있다(33, 34절).

하나님의 율법과 또 그의 섭리는 다른 민족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극히 존귀케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다고 하여 다른 모든 민족을 짓밟을 수 있다고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자기 민족을 다같이 다름없이 존귀한 민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다른 민족을 경멸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서는 안 된다. 결코 안 된다. "너희는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그들을 너희 민족 자체처럼 사랑하라." 물론 이 타국인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말하여, 할례는 받지 않았고 이스라엘인들의 의에로 개종되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신앙의 문턱에 들어선 개종자라는 것이 가정되어 있다. 그러한 자가 이스라엘인들 중에 체류할 때에는, 그들을 괴롭히거나 압박하거나 거래에서 그를 속이거나 자기들의 율법과 풍속을 모른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따위의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타국인을 속이는 것을 자기 백성을 속이는 것과 똑같은 죄악으로 간주해야 했다.

(유대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은 그(타국인)가 한 타국인이라는 것은 물론이요, 예전에 우상을 숭배한 일이 있었다고 비난하는 일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타국인들은 고아와 과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었다. 무기력한 자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영예이기 때문이다(시 146:9). 그러므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어떤 고생을 시키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타국인도 하나님의 은총에 반가히 영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에로 초대해야 하며 그들의 올바른 견해에 신앙을 천거해야 한다.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인류의 공통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행동이요 관대한 일이다. 다른 나라의 풍속과 언어를 가진 민족일지라도 하나의 혈통에서 모두 지음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하나 첨부되어 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었음이니라. 그 때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나그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며, 그 때(애굽에 있을 때에) 너희들이 대접받고 싶었던 그대로 지금 그들(나그네들)에게 대접해 주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그네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존귀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나그네들인 저희들을 업신여기기 쉽지만 저희들의 나중 형편이 어떠할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 공동체의 주인은 하난미이시기에, 그 구성원들간에 어떠한 차별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사실,

그 공동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법이 실천적인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스라엘의 과거와 다른 현재의 모습은 결코 그들의 자력으로 되어진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또한 현재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객들의 신분도 얼마든지 하나님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셨던 긍휼을 가져야 한다. 결단코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파벌을 만들어 그 누구든지 함부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Ⅴ. 저울질에 공정을 기하라는 명령이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결코 속임수가 없어야 된다고 했다(35절). 또 정확을 기하라고 했다(36절). 우리도 무게를 잴 때나 측량에서 공정을 기하는 체한다. 그러나 만약 거짓 측량을 하면 그것은 타락된 재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핑계삼아 사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소매치기나 노상강탈보다 더 악한 것이다. 파는 자는 저울에 맞게 충분한 양을 달아 주어야 하고, 사는 자는 거기에 맞도록 충분한 금액을 치러야 한다. 이런 모든 상거래가 공정한 저울과 추와 도량형기도 없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 "아무도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그런 일이 비록 인간에게는 숨겨질 수 있으나 "그 같은 모든 일의 복수자이신 하나님" 께는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살전 4:6).

 

💡 공정, 의(체데크):

  • 이 단어가 상거래의 문맥에서도 쓰인 것은, 하나님의 의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을 다스리는 실제적인 기준임을 알려 주는 것. 이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내적인 모습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일상 생활에서 태도의 변화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또한 알려 준다.
  • 이처럼 의와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느 관계에 있다. 또한 특별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상거래에 있어서 무게와 양을 측정하는 일과 하나님의 긍휼의 행동을 비교함

  •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바른 모습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긍훌하심을 드러내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긍훌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1:16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면서 본 장은 끝을 맺는다.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37절).

 

💡 나의 모든 규례와 나의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 규례: 하나님의 법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매우 실제적인 법이다. 본장에 설명한 율법들은 삶의 현장에서 바로 적용되어 나타나야 할 실제적인 규례들이다.
    • ‘지키다’, ‘행하다’와 함께 나오고 있음: 하나님의 규례가 인간의 구체적인 순종과 함께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 법도: 법이란 의미도 있지만, 심판이란 의미도 있다(미쉬파타이). 이는 곧 본장의 규례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행동을 가늠할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되는 그 율법들을 따라서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요구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 버려야 할 옛 가치관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오히려 자기 속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채우게 되기 때문에 세상의 요구에 대해서 자유로워지며, 말씀이 주는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b, 32).
  • 이는 결코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단지 죄악된 이방 민족들을 쫓아 곁길로 달려갈 위험의 소지가 너무도 컸던 그 백성을 하나님의 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려는, 또 혹여 '벗어날지라도 곧바로 돌이켜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깊은 은혜가 담겨진 말씀이다.

다음사항을 명심하자.

  1. 우리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행하지 못하기가 쉽다.
  2. 하나님의 율례를 단순히 잘 알기만 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사회 생활 속에서 양심을 지키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사고를 지닌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정직한 심령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유의하느니라(시 119:6). 많은 경우에 우리의 손은 꼭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수가 많지만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법도를 항상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맞도록 의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