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32, 요한계시록 18, 스가랴 14, 요한복음 17
묵상구절
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7: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7: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7: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7: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7: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7: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7: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7: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7: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7: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앞선 6장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안치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신정 왕국 건설의 신앙적 토대를 다졌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어지는 본장 1-3절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 건립의 의지를 표명하는 부분이다. 본절은 다윗이 이러한 성전 건축 문제를 나단 선지자와 상의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 있다.
●궤에 대한 다윗의 걱정(사무엘 하 7:1-3)
이 문단에서는 이런 것을 보게 된다.
Ⅰ. 다윗은 편히 쉰다.
"그가 집에 앉았다" (한글과는 다소 다름-역주)고 했다(1절). 아무런 소란거리도 없었다. 전쟁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 즉 다윗이 보좌에 앉는 것을 대적하는 모든 적에게서 평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안식을 누렸다. 그는 비록 무사였지만, "평화의" 사람이었다(시 120:7). 전쟁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요를 즐기게 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 앉아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게 되었으니, 그의 천성에 맞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모든 대적, 쉬게 하셨음’ → 모두 사역형으로, 이 평화가 다윗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전달. 본문은 다윗이 다윗성에 입성한 이후로 여러 전쟁이 있었고 그 모든 전쟁에서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셔서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다윗이 자기 성에 거했고’ ⇒ 다윗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짓겠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자기의 성에 거하는 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께서는 초라한 장막에 거하시는 현실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에 성전을 지으려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음.
-본절의 ‘궁’이 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성전’을 가리키는 ‘나의 거할 집’에서 ‘집’이란 용어로 다시 등장한다. ⇒ 즉 다윗은 자신이 자신의 위상에 걸맞는 ‘집’ 즉 ‘궁’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위상에 걸맞는 ‘집’ 즉 ‘성전’에 거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당시 다윗은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그의 왕건이 견고히 서 있었고, 또한 다윗은 당시 12:10,11의 말씀을 이룰 때로 생각하였음.
-신12:10-11
12:10b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2: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7장은 8장 이후 여러 전쟁들 이후에 찾아온 평화의 시기.
그럼에도 왜 시기순에 맞지 않게 다윗의 성전 건축의 의지가 먼저 소개되는가?
-어쩌면 저자는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5:11에서 다윗성의 건측 사실을 한 구절로 간단히 매듭짓고 제6장에서 성전의 중심어 될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에 안치한 사실을 그토록 상세하게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라고 만약 하나님의 궤가 장막에 머문 것으로 제6장을 끝내고 바로 제8장의 전쟁 어야기로 이어졌다면 독자들에게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장막에 머물러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 자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언약궤의 다윗성 안치 사실을 다룬 제6장에 바로 이어 본장에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다윗이 성전 건축에 마음을 쏟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6:23에서 사울의 딸 미같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언급과 관련된 사항을 더 상세하게 확대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갈 사건을 끝으로 다윗의 왕가는 사울의 왕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인본주의적인 왕 사울의 혈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게 함으로써 결국 신본주의적인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12절).
이러한 7장의 내용이 배치돼 들어간 위치를 통해 성경의 역사는 세상 역사와 같은 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연대기를 초월하여 기술된 역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Ⅱ.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한다. 그는 자기 궁과 자기 신하들이 있을 도성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제는 궤의 거처를 지을 생각을 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존귀케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했을 때는, 우리도 그와 그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도록 애써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무엇을 드릴꼬?"
- 그럼으로써 현재의 평안을 선용하고, 하나님이 내려 주신 안식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산당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가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므로, 다른 방식으로, 즉 자기의 생각과 시간과 재산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안일에 빠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화로운 생활을 향유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사, 세속 사업에 별로 할 일이 없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왕궁에 편히 앉았을 때 "자기의 길로 행한" (단 4:29, 30), 느부갓네살과 다윗의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 그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권력, 자기 자신의 위엄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겸손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 주시고 영광 주신다는 것을 이 사건은 잘 나타내 준다.
다윗은 자기 집의 위풍을 생각해 봤다(2절)("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도다"). 그리고는 궤의 거처의 비천함과 비교해 보았다("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그리고는 자기는 궁궐에 사는데 궤는 천막 속에 있어야 함은 부당한 일임을 알았다. "궤의 거처" 를 마련하기까지는 다윗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시 132:4, 5). 그러나 이제는 더 좋은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1) 감사한 마음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인간은 결코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만큼 다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미 많은 일을 하고도, 더 좋은 것, 더 후한 일을 하려고 궁리한다.
(2) 그런 자들은 교회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자신들의 안락을 즐길 수 없다. 궤가 좋은 집에 있기 전에는, 다윗도 자기가 백향목 궁궐에 거한다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못했다. "상아 침상에서 딩굴어도 요셉의 환난을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윗의 음악은 가졌어도 그의 정신은 못가진 것이다(암 6:4, 6). 또 하나님의 집이 황폐케 된 때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골방에 거하지 않는다.
Ⅲ. 다윗은 자기 생각을 나단 예언자에게 알린다.
나단은 그의 친구요 심복이다. 늘 그에게 의논하곤 했었다. 다윗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의논해야 했던가? 다윗 자신도 예언자의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모사가 많은 게 안전하다." 다윗은 나단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달라고 했다. 그 일 자체는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다윗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불확실하다.
👉 나단 선지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을(12:1-15) 뿐 아니라, 후에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있어서도 크게 기여하였고(왕상1:8-45), 동료 선지자 갓과 함께 성전 예배 음악을 도입하였던(대하29:25) 인물로 궁정 전지자였을 것.
다윗은 하나님의 대언자를 가까이함으로써 사무엘을 멀리했떤 인본주의적 왕 사울과 달리 신본주의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Ⅳ. 나단은 그 의견에 찬동한다.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하십니다. 마음에 품은 뜻을 행하십시오" (3절).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집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단은 다윗의 심중을 쉽사리 헤아릴 수가 있었고,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의 뜻을 밀고 나가라고 했다.
👉 여호와, 너와 함께..
여호와: 언약을 맺으시고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 너와 함께: 다윗이 언약의 동반자됨을 암시하는 말.
⇒ 즉 본문에서 나단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다윗과 지속적으로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던 다윗도 언약의 동반자로서 하나님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한다׳ 라는 표현은 다윗과 관련하여 몇 차례 언급된 표현으로(5:10; 삼상 18:12,14,28) 특별히 제 삼자의 업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나단이 하나님의 계시 없이도 주저하지 않고 다윗에게 동조하였던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언약적 동반자 관계를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나단 선지자의 확신이 담긴 원어의미들
1.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에 모든 것’ → 나단이 이처럼 단 하나의 예외도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다윗이 하나님의 마옴에 할한 자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명백하게 사람들에게 증거되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2. ‘행하소서’ : ‘어서 행하소서’ 라는 의미.
한편 본절에 나오는 나단의 성급한 동조는 인간적인 그룻된 생각이었음이 5-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백히 밝혀진다. 이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미처 다 알 수 없으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라 관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받게 된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이러한 계획을 듣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즉시 그 계획에 찬동했다(3절). 나단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계획은 하나님을 위한 선한 것이므로 하나님도 기뻐하시며 허락하실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언약궤 운반의 경우에서 보듯이 뜻이 좋다고 모두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나단은 다음날 다윗에게 하나님의 성전 건축 불허의 뜻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생각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대로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의 뜻으로서, 그것이 좋다고 말했다. 즉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일개의 지혜롭고 선한 인간으로서 그런 일은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어서, 다윗은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각자 자기의 처소에서 신앙의 증진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해야 함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언제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특권이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은 예언의 영이 자기들에게 임할 때에만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었을 때에는(삼상 16:6 의 사무엘처럼, 그리고 여기의 나단처럼), 하나님이 즉시 그들의 실수를 시정해 주셨다.
●다윗의 고결한 뜻과 그 상급(사무엘 하 7:4-17)
여기서는 다윗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호의 속에 있는 자비로운 뜻을 나단 예언자를 보내어 알려 준다. 나단은 이 긴 전갈을 다윗에게 전할 임무를 맡는다. 그 전갈의 내용은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의도를 중단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 그 일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소식이 온다. 만일 다른 예언자가 와서 그 소식을 전하게 되면, 나단이 멸시를 받게 되고, 한 예언자는 하라 하고 다른 한 예언자는 말라 한다면, 다윗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바로 그 날 밤에 전해진다. 나단이 계속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고, 다윗이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 원문으로 볼 때 본문에는 강조의 뜻이 매우 잘 드러나 있음.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지 말고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을 나단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셨다.
⇒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선지자 나단이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전한 것을 시급하게 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에는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인 다윗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앞서 1-3절에서는 다윗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대신 ‘왕’ 이란 칭호가 사용되었던 데 반해 본절에서는 ‘다윗׳ 이란 이름이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왕’ 이란 칭호는 그 사람의 직책만 나타내지만 이름은 그 사람의 전인격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왕이란 직책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불타는 신앙을 보고 그에게 계시를 주고 계신 것이다.
-내 종 다윗에게
⇒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윗이야말로 바로 ‘나의 종’이라고 강조하셨음. 다윗을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당신과 연합된 관계를 나타내는 ‘내 종 다윗’으로 부르심. 과거 모세와 같이(수1:2,7).
하나님이 직접 다윗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단을 시켜서 하셨다. 그럼으로써 예언자의 영예를 높이고, 다윗도 그들을 중히 여길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머리였지만, 그가 전능자의 이상을 알아 보기 위해서 필요한 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입의 역할을 하는 예언자들이 있어야 했다.
나단에게 이 긴 소식을 전한 분은 그것을 잘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까지 도와 주셨다. 그래서 그 소식을 받은 그대로 완전히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 다윗에게 이처럼 깊은 애정을 갖고 계셨음에도 나단을 경유하여 당신의 뜻을 알리신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 이유는?
이는 일차적으로 선지자의 역할을 강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다윗 혼자서 신정 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일꾼들과 협력하여 신정 왕국을 이루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관단에 근거해 경솔히 다윗의 의견에 찬성한 나단이 아니라 다른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나단을 사용하신 것은 선지자가 멸시받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때 하나님께서 다른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를 주셨다면 선지자마다 계시의 내용이 다른 것으로 인하여 혼란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잘못된 조언을 하였던 나단 선지자가 경멸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이 멸시받음으로 당신의 영광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장차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건립에 있어 크게 기여할 나단의 권위가 실추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배려하셨다.
그러면 그 소식의 내용을 살펴 보자.
Ⅰ.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려는 다윗의 의도는 기각된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알고 계셨다. 그는 사람의 심중을 아시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8장 18절에 있는 때로, 하나님은 그 뜻을 매우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네게 있음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그 뜻을 이행하지는 못하게 했다(5절).
"네가 나를 위하여 거할 집을 짓겠느냐? 아니다. 그러지 말지니라(대상 17:4). 네게는 먼저 해야 할 다른 일을 명하리라."
다윗은 무사였다. 그는 정복을 계속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생기면, 그 안에서 사용할 시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레위인들의 질서를 정해야 한다. 반면에 그의 아들의 재질은 성전을 짓기에 다윗보다 적합하며, 그 비용을 부담할 더 좋은 보화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할지니라." 성전 건축은 시간이 드는 일이므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알리셨다.
👉 6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부터 계속하여 장막과 회막에 거하셨으므로 당장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이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는 성전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현재 돌로 지어질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장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기 이전부터 영원히 지어질 성전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12, 13절에 나오는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은 비단 솔로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솔로몬에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6,7절에서는 성전 건축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셨음에도 왜 13절에서는 당연히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12,13절에 나오는 성전은 ‘영원성’ 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은 솔로몬의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 성전도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메시야 왕국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하나님이 반대하신 것은 곧 이 땅 위에 성전을 지을 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에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성전 건축 자체는 절대적으로 기정 사실이 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 일은 결코 다윗에게 맡겨질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그가 전쟁에 너무 매어 있었으며(왕상 5:3), 피를 심히 많이 흘렸기 때문어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대상 22:8 ; 28:3).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건측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일차적으로 부정한 자가 정한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정한 이치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다윗의 뒤를 어어 이스라엘의 왕이된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피를 많이 흘리진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부정할 수밖에 없는 솔로몬에게는 왜 성전 건축이 허락된 것일까?
또한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에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내다보셨다면 왜 솔로몬에게는 가시적인 성전의 건축을 허락하신 것인가(대상 22:9.10)?
솔로몬과 성전 건축에 관련된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찌되었든지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에 세워질 그 성전을 염두에 두시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곳을 명령하실 때에 쉽게 거두어 없앨 수 있는 커튼으로 된 장막을 만들도록 명하셨다. 반면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인간의 욕망은 보다 멋있는 가시적인 성전을 만들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져 갔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일단 가시적인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시되 다윗과 달리 피로 얼룩지지 않았던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인간이 짓는 성전은 영원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을 12,13절에서 영원한 성전을 언급하시면서 암시해 주신다.
1.하나님은 지금까지 집이 없었다(6절).
회막에서 지냈다. 조금 더 회막을 이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의 장황함을 중시하지 않으신다. 궤가 성전에 있을 때든 장막에 있을 때든 언제나 그는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신다. 궤가 천막 속에 있다는 것이(가변적이요, 비천한 자리였다) 다윗에게는 좋아보이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조금도 불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한 곳에 거주하지 않으시고, 행동하신다. 그러나 고단하거나 지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마치 장막이나 회막에서 지내신 것과 같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기" (행 10:38) 때문이며 아버지의 집, 위에 있는 처소에 가시기까지는 자기의 집에서 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법궤처럼 이동적이고, 장막에 거한다. 교회의 현재 상태가 목회적이요 동시에 군사적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원한 도성은 앞으로 올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시편에 종종 회막을 성전이라고 불렀다(시 5:7; 27:4; 29:9; 65:4). 비록 회막은 휘장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의 앞에서는 성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은 겉모양으로 속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 백향목 궁에 거한 그 어떤 후계자들보다도 더욱 진실한 신앙심과 더욱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졌을 것이다.
👉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지금 시점에서 성전 건축이 불필요함을 밝히심.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레26:12에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이 말씀 이전 구절인 레 26:11을 보면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라는 말씀이 나온다. 즉 장막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당신은 한 곳에 제한되어 임재해 계시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2.하나님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어느 홀 혹은 사사(대상 17:6 방백은 "홀" 이라 칭했다. 겔 19:14, 저 위대한 방백도 그렇게 불리우셨다, 민 24:17)에게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이나 암시조차 하지 않으셨음을 알리셨다(7절).
명령된 것은 오직 용납될 만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일을 하려 했는가?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게 하자. 하나님이 명하신 천막이 인간의 고안으로 나온 성전보다 더 낫다.
👉 7절 본문 전체를 다시 번역하면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내가 두루 행하면서 다니던 모든 곳에서’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는 결코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더욱이 여기에는 하나님온 장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물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 바로 그곳에서 그들을 통치해 왔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Ⅱ. 하나님이 다윗에게 베푸신 큰 일들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다윗이 비록 이 일을 맡지 못할지라도, 하늘의 총애를 받은 자임을 스스로 알게 한 것이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결코 다윗의 선한 의도 때문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함께 하셨음을 알려 준다(8, 9절).
👉본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그 유명한 다윗 언약(David’s Covenant)이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대언자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과 맺으신 편무 언약인 다윗 언약은 만왕의 왕, 만국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육적 후손으로 오셔서 영원히 왕 노룻하실 것을 암시하는 언약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은혜 언약인 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 이후 맥맥히 이어온 그 어전의 모든 구약의 언약을 총망라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다윗 언약은 다옴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8,9절: 다윗 개인의 영광을 보장하는 내용
2. 10,11a절: 이스라엘의 평안을 보장하는 내용.
3. 11b-16절: 다윗 가문의 왕권 보존과 성전 건축에 대해 약속하시는 내용이다.
8절,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내 종 다윗에게 말하라: ‘내 종’ 과거의 신실한 다윗의 행적을 보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임과 동시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섬기는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암시해 주는 호칭.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는 먼저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 당사자인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밝힌다. 다윗의 삶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를 강성케 하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하여는 5:10, 6:2,18에서도 언급.
→만군의: ‘다윗은 종’ 이라는 사실과 대조.
→여호와: 언약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강조.
⇒ 다윗의 삶이 전적으로 그 위대하신 언약의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자의 삶으로 지속되어져야 할 것임을 시사함.
1.하나님은 낮고 천한 자리에서 다윗을 끌어 올리셨다.
"하나님은 그를 목장에서 취하여 내셨다." 크게 출세한 자들은 자기들의 미천하던 초기를 기억하여 늘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 ”내가 .. 내가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취하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기 때문임을 밝히심. 과거 다윗은 벽촌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양을 치던 목동으로서 지금의 이스라엘의 왕의 신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리에 있던 다윗을 친히 취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신 것이다.
-주권자(나기드): 선포되어진 자, 지명되어진 자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스스로 권위를 쟁취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지목되어 공적으로 ‘선포되어진 자’ 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은 왕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없고 앞절에 나온 ‘내 종' 이란 호칭에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사울 왕도 ‘나기드' 란 호칭으로 불리웠던 것을 보게 되는데(삼상 9:16; 10:1), 그는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의로 왕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그 직분을 잃게 된 것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다윗이 다스릴 백성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 ‘나의 백성 이스라엘’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다윗의 직분이 청지기의 사명인 것을 확실하게 나타내 준다.
2.하나님이 다윗을 원수에게 이기게 하셨다(19절).
"네가 어디로 가든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쫓김을 당할 때는 보호해 주었고, 쫓아갈 때는 빨리 달리게 해 주었다. 내가 네 모든 원수들을 멸하였느니라. 그들은 네 길을 막고 안정을 방해하던 자들이었다."
3.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다윗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열방 중에서 명성을 떨치는 영예도 주셨다.
"내가 네 이름을 존귀하게 하였느니라." 다윗은 용맹, 지략, 큰 업적으로 유명해졌고, 그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의 얘기거리가 되었다. 위대한 이름이란 감사히 여김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고 좋은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으나, 그러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는 자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이름이 더욱 바람직하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으나 아주 편안히 살다 간다.
👉 9b,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 만들어 주리라”
-8,9a절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다윗 개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는 내용이었던 데 반해 본문은 미래에 다윗 개인에게 임할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다윗의 이름을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너를 위해 큰 이름을 만들어 주겠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을 볼 때에 본문의 언약은 분명하게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창 12:2,3에는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라는 말과 “땅의 모든 족속이” 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 창대케 하리니” 라는 말도 문자적으로는 “내가 크게 하리니'란 뜻이다.
-이로 보건대 본문의 ‘땅에서 큰 자들' - 창 12:2,3의 ‘땅의 모든 족속’ 과 대응되며, 본문의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 창 12:2,3의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다윗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을 자로 하나님께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좋은 안정이 약속되었다(10, 11절).
이 사실은 하나의 괄호처럼 나와 있다. 즉 다윗 자신에 대한 약속이 있기 전에 나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그로 알게 하여, 그 백성이 그의 통치 밑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임한 평화를 예상하고 다윗 자신도 지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때에 "그의 자녀의 자녀들을 보리라" 는 약속도 주어졌다(시 128:6). 훌륭한 왕은 자기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이 다음에 나오는 약속은 그의 집안과 후손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정을 말한 이 약속은 다윗 자신의 통치의 행복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약속 내용은 두 가지이다.
1.평온한 자리에 대한 약속.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정하리라."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정된 것이지만, 그들이 실망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제는 실현되리라. 아무런 방해없이 저들이 가나안을 향유하게 되리라.
👉 약속1
-신11:24에 언급된 약속, 창15:18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동일한 내용.
-신11: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한편 본장 1절에서 설명했듯이 본장의 배경어 되는 시기는 다윗이 대적들을 다 물리치고 신11:24이 언급하고 있는 영역을 다 차지한 때이다(9a절).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완료형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이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약속이다.
즉 예언적 완료형이 사용되어 미래에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보다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절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두실 ‘한 장소’는
-이후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됨과 같은 고통의 시기에 그들이 내다볼 소망과 위로와 안전이 주어질 장소로서의 땅을 가리킨다(렘 32:37).
-렘 32:37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본문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상징적 표현.
-또한 12,13절이 내다보는 메시야 왕국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안정된 위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2.그 자리를 조용히 즐기리라는 약속이다.
"악한 자녀들(특히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블레셋을 지칭한다)이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라. 전에 내가 사사들을 통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고, 내 모든 대적들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11절).
즉 "내가 그 평안을 지속시키고 완성하리라. 그리고 사사 때와는 달리 그 땅이 전쟁에서 쉼을 얻으리라" (영문 원본에는 "사사 대와 같이" 로 되어 있음-역주).
👉 약속2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와 같이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으나 미래에는 이러한 고난에서 벗어날 것이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이나 솔로몬이 다스리던 시대의 일정기간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 적은 드물었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 통치자가 아니라 장차 임할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메시야 왕국에 임할 항구적인 평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궁국적으로 세우실 메시야 왕국은 결코 불의한 아들들이 함께할 수 없는 나라이며(고전 6:9),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릴 나라이기 때문에 메시야 왕국이 온전히 완성되는 때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다시 고통이 없게 되는 것이다.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 때와
한글 개역 성경이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라고 하신 사사가 통치하던 그 시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설상 사사 시대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란 사사기 마지막절인 삿 21:25에 나오는 대로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나 적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사들이 나타나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기만큼은 그렇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여 그들의 원수들을 물러친 사사 시대의 사건들을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치 못하게 한 실례로 삼으셨던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사들의 후계자로 보시고 그가 이상적인 사사로서의 사역을 수행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 약속3
11절,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본문은 10절 이후 제시된 이스라엘의 평안에 대한 3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
-여기서 하나님의 쉬게 하는 역사가 다윗을 위하여, 혹은 다윗에게로 향해 있는 것으로서, 그 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지속적으로 다윗을 향하여 주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 다윗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육적, 영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육적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나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스릴 메시야 왕국의 시민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쉼을 예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이미 잡혀 있는 상태나 위혐받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원문은 이미 대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즉 원문의 의미는 대적에게 잡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Ⅳ. 축복이 다윗의 집안과 후손에게 허락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려 했다. 그런데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너에게 집을 지어 주리라" 고 약속한다(11절)(이것은 가문의 형성을 말함-역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또는 섭리가 그 실행을 못하게 했을지라도, 그것은 "결단코 상급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름을 크게 해 주시겠다고 했다(9절). 여기서는 집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 한다. 그 집은 그의 이름으로 불리울 집이다. 다윗이 생존시에, 자기가 죽어도 그의 집안은 번영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의 교회의 행복 다음으로는, 우리에게서 날 후손이 우리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에 지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야 한다.
1.그 약속들 중 어떤 것은 그의 후계자 솔로몬과 유다 왕국의 왕손에 관계된다.
(1) 하나님이 솔로몬을 왕좌에 오르게 하시리라. "네 날수가 다하여, 네 조상들과 잠들게 될 때" 라는 말은, 다윗 자신이 평안히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때에 "내가 네 씨를 세우리라." 이것은 정말로 위대한 은총이다. "내 양을 치" 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모세나 여호수아나 어떤 사자들에게로 이런 은총이 내린 적이 없다.
허락된 첫 내용이 다윗의 정권이었다. 그 왕국의 그리스도에게 향한 약속은 그의 영적 자손들에게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라면 상속인이 되리라."
(2) 솔로몬의 보좌를 안정케 하리라 했다. "나는 그의 나라(12절), 그의 나라의 왕위(13절)를 견고케 하리라." 그의 왕권은 분명하고, 경쟁될 수 없으며, 그의 권세가 확실해지고, 그의 정부가 시종여일하리라.
(3) 하나님은 솔로몬을 그 성전 짓는 일에 쓰시겠다고 하신다. 다윗은 그 생각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으리라" (13절). 다윗은 못하지만, 그 일은 꼭해내야 한다.
(4) 양자의 계약을 그와 맺으리라 하셨다(14, 15절).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할 일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 이상 다른 일이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을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사 자기의 아들로 삼으시고,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상하고 관후하신 아버지라면, 우리는 그에게 대해 복종하고 의무를 지키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1] 필요가 있으면 그 아버지가 징계하리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으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는가?" 환란이 계약의 한 조항으로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어버이 같은 사랑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만일 범죄하면(왕상 11:1 에서 나타났듯이), 내가 그를 경계하여 회개케 하리라. 그러나 사람이 막대기를 사용하듯이, 사람의 막대기로 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큰 권능을 가지고 그를 치지 아니하리라" (욥 23:6). 아니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하리라. "내가 그의 기질을 고려하여, 필요할 때는 가장 유순하게 징계하리라. 그것은 채찍으로, 사람의 자녀들(인생들)로 되리라. 그러나 죽음이나 상함으로 하지 않으리라.
[2]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지 않으시겠다 하셨다(15절). "내 자비(이것이 아들들의 유업이다)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열 지파의 반동은 다윗 자손의 범죄에 대한 징계였다. 그러나 끝까지 묻고 있던 두 지파는-능히 왕가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는데-다윗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이 약속에 따라서 보존한 것이었다. 그 가문이 오래 못 갔지만, 사울의 집안처럼 멸족되지는 않았다. 어떤 집안도 다윗 집안처럼 유다의 왕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구속과 은총의 계약에 대한 전형으로 찬미권 왕권의 계약이다(시 89:3 등).
2.그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된다. 그는 가끔 다윗과 다윗의 아들이라고 호칭된다. 이 약속들은 그 다윗의 아들을 지시하는 것이요, 그에게 실현되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 이다(행 13:23).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다윗의 보좌를 주셨다" (눅 1:32). 즉 천지에 있는 모든 권력과 심판을 행할 권위를 주신 것이다. 그는 곧 복음의 성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을 지어야 할 자였다(눅 6:12, 13).
"나는 네 아비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저 약속은 사도에 의해서 분명하게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히 1:5). 그러나 또한 그의 집, 그의 보좌 그의 "나라" 를 영원히(13절에, 그리고 16절에 두 번 "영원히") 세리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아니고는 적용시킬 데가 없다. 다윗의 집과 나라는 오랜 후에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영원히 있을 것, "그 정의와 평화가 끝없이 증가" 될 것은 메시야의 나라뿐이다.
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가정은 실로 메시야 자신에게는 적용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영적 자손들에게는(마음 놓고) 적용시킬 수가 있다. 참된 신자도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징계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멸절되지는 않는다. 계약을 범한다 하여, 그것이 우리를 계약권에서 쫓아내지는 못하리라.
(1) 이 소식은 나단이 성실히 다윗에게 전했다(17절). 자기의 생각과는 달리 성전 건립을 금하라는 명령이었지만, 하나님의 생각에 더욱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그는 주저치 않고 전했다.
(2) 때가 되자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성실히 이 약속을 이행하셨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지르려는 그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이룩해 주시겠다는 그의 약속을 실현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계약의 취지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 계약을 이행함에 있어서 많은 잘못을 범하지만, 하나님은 계약 이행에 아무 잘못을 범하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