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2월 30일 금요일 삼하9:1-13 다윗과 므비보셋

Jeehyun 2022. 12. 31. 21:56

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35, 요한계시록 21, 말라기 3, 요한복음 20

묵상구절

9: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9:2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9: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9:4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9:5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9: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9: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9: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9:9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9:10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9:11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9:12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9:13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요나단을 기억한 다윗(사무엘 하 9:1-8)

💡 앞선 8장은 제7장에 나오는 다윗 언약에 이어 다윗이 대외적인 정복 전쟁을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8:1-14) 대내적인 행정 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신정 왕국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음을 다루었다(8:15-18). 이에 이어지는 본장은 다윗 왕국이 다윗의 선정에 의해 태평 성대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를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선정은 8:15에 나오는 바와 같이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많은 사례가 있었을 것이나 본장에서는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들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것 으로 나타난다.

본서 저자가 특별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한 것은
→ 원수의 후손에게조차 자비를 베푸는 다윗의 후덕함과 더불어 과거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삼상 20:12-16) 성실하게 지키는 다윗의 신실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Ⅰ. 다윗은 사울의 패가에 남은 자들이 있는지 알아 본다(1절).

이것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훨씬 후에 일이다. 왜냐하면 사울이 죽을 당시는 므비보셋이 나이 다섯이었는데, 이제는 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12절). 다윗은 너무나 오랫동안 요나단의 은혜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생각이 난 것이다. 종종 우리가 해놓고 잊어버린 약속이 없는지 생각해 보는 일은 좋은 것이다. 늦게라도 이행함이 아주 안함보다는 낫다.바울이 우리에게 요약해 준 다윗의 일생은 이렇다(행 13:36).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기 세대를 봉사했다." 즉 선행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 실례를 찾아 보자.

1.그는 선을 행할 기회를 찾았다. 그는 요나단의 자손들 중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 주리라는 마음만 먹고 있었어도, 요나단에게 한 약속은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들을 찾았다(1절).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자 그에게 대해 자세히 물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없느냐! 내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노라" (3절). "누구 없느냐? 내가 그에게 정의를 실행할 뿐 아니라(민 5:8), 친절을 베풀리라."

💡 본문은 다윗이 사울의 왕가에 어떤 호의를 베푼다는 우월 의식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하여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행한다는 책임 의식으로 사울 왕가의 남은 자손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일찍이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삼상 20:12-16)에 근거하여 이제 다윗이 요나단의 집안에 인자함을 영영히 끊지 말아야 할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한 것.

좋은 사람은 좋은 일할 기회를 찾는 법이다. "관대한 자는 관대한 일을 행한다" (사 32:8).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야 할 진짜 대상들은 일부러 물어보기 전에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그런 자들이다. 가장 곤고한 자가 소리도 못 지른다.

2.그는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지를 묻고, 그들에게 요나단으로 인하여 자비를 베풀겠다고 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느냐?" 사울에게는 식구가 많았었다(대상 8:33). 나라 전역을 덮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어보아야 할 문제이다. "남은 자가 있느냐?" 하나님의 섭리는 그 많던 식구들도 얼마나 쉽게 멸절시키는가를 보라. 인간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울의 집안은 유혈을 좋아한 집안이었으니, 그렇게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21:1).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갚았지만, 다윗은 그러고자 하지 않았다. "사울 때문이 아니라, 요나단을 인하여 내가 자비를 베풀려 하는데, 누구 남은 자가 없는가?"

(1) 사울은 다윗의 숙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진심으로 그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려 하고 있다.

"사울 집에 남은 자가 있느냐? 내가 그들을 멸하여, 나나 나의 후계자에게 더 이상 방해거리가 못되게 하리라."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기드온의 집안 중 하나라도 남겨두지 말자는 것이 아비멜렉의 정신이었다(사 9:5). 그리고 "왕손" 은 한 사람이라도 씨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비아달의 정신이었다(대하 22:10, 11). 그들은 정권 찬탈자들이었다. 다윗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울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려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고, 또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하든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다윗은 마음 바탕이 자비로와서, 그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용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피해나 불의를 행한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기회가 있으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각오를 보임으로써, 그들을 용서했다는 정직한 자세를 입증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들을 복수하지 말아야 될 것은 물론이요, 사랑하고 "선을 행해 주어야" 한다(마 5:44).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는 일푼의 동정도 베풀 수 없다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다. 또 필요할 때면 우리가 자비를 입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2) 요나단은 다윗의 절친한 친구다. 그러므로 그의 집안에 자비를 보이려 했다. 이것은 교훈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아 선대한 본문의 사건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과 사울의 세 아들이 죽은 지 약 17년에서 18년이 흐른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삼상 31:5,6). 왜냐하면 본장 에 등장하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사울과 요나단이 사망할 당시에는 다섯 살이었는데 (4:4) 현재는 아들까지 둔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12절). 그렇다면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에 대하여 깊은 책임 의식을 가진 채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된다. 이는 다윗이 대내외적으로 당면한 여러 상황들을 수습 타개하느라 그 점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대외적으로는 주변의 대적들을 정복하고 대내적으로는 행정 조직도 갖추어 여유가 생기자 드디어 지금까지 마음 속에 간직했던 요나단과의 언약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1] 우리는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약속한 것은 상대방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시니, 우리도 피차에 불신한 행위를 말아야 한다.

[2] 우정, 옛 우정을 기억해야 한다. 친구, 그리고 그들의 권속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우리의 거룩한 신앙의 규율이다. "친구를 가진 자는 먼저 우애를 보여야 한다" (잠 18:24).

섭리자께서 우리를 출세시켜 주시고, 우리의 친구와 그 집안은 망하게 했더라도, 이전의 친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때는 친구들은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하는 때요,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기회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을 지속하라는 엄숙한 우정의 명약은 없다고 하더라도, 곤궁에 있는 자는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요 6:14). "형제는 곤궁한 때를 위해 태어났느니라." 우정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던 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그 식구와 이름과 후손을 남기고 갔을 경우 그들을 보살피고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말해 준다.

  1. 다윗은 그들에게 베풀기로 약속했던 자비를 "하나님의 자비" 라고 칭했다. 그것은 큰 자비일 뿐만 아니라,

(1) 하나님을 증인으로 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했던 계약의 이행에 의해 자비이기도 하다(삼상 20:42).

(2) 하나님의 모범을 따르는 자비이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자비로와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노엽게 한 자들을 살려두신다.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요구했던 것은 이것이다(삼상 20:14, 15).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에게도 그리하라." 하나님의 자비란 사람이 보통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자비이다.

(3) 그것은 경건에 의한 자비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행하는 자비요, 그의 영광과 은총을 생각하여 하는 자비이다.

💡 하나님의 은총 : 헤쎄드 엘로힘

본문의 ‘헤쎄드 엘로힘’ 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기초해 보이시는 신실한 사랑과 같은 정도의 상호간의 언약에 기초한 신실한 사랑'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속에서 자기에게 부과되어 있는 의무를 이행하되 최대한으로 이행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헤쎄드'를 베푸는 것은 다윗 자신이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 이 계신다는 하나님 중심주의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자신은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통하여 나타난 ‘헤쎄드’ 는 곧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헤쎄드' 임을 밝힌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Ⅱ. 므비보셋, 요나단의 아들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다. 시바란 사람은 사울가의 늙은 종이었다.

그는 집안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를 불러 조사해서,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있으나, "절름발이" 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앞에서 보았다. 4:4). 그리고 지금 그는 묻혀서 살며, 아마 요단 건너편에 있는 길르앗, 로드발에 있는 자기 어머니의 한 친척과 같이 살 것이라 했다. 그는 거기서 "잊혀졌다. 죽은 자처럼 마음에서 떠났다" (시 31:12). 그저 묻혀 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 편했다. 옛날의 영광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시바 : 한글개역성경이 주는 늬앙스와는 달리 ‘사울의 집안에 속한 한 종’으로 나타낸 것.

-다윗이 10절에서 시바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길 자로 임명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그를 ‘사울의 집안의 종’으로 소개함으로 간접적으로는 그의 섬김의 영역이 여전히 사울의 집안에 속할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을 통해 저자는 사울에게서 발견되는 부정적 성향을 시바 역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시바는 후에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을 기회로 므비보셋을 모략하여 궁지에 빠뜨리고 그의 재산을 착복한다(16:1-4).
-이처럼 시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대의를 저버리고 부정을 자행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끊임없이 대항하였던 인본주의자 사울과 유사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본서 저자는 그를 특별히 ‘사울 집 안에 속한 종’ 으로 소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4절 본문, ‘원문으로 볼 때 본문은 ‘보소서’ 라는 말과 시작한다
-시바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야말로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바는 자신의 정보 능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Ⅲ. 그를 궁전으로 데려왔다.

 💡 5절에서는 2개의 와우 계속법이 사용되어 므비보셋의 소재를 파악하자마자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는 다윗의 신속한 행동을 보여준다. 또한 다윗 왕을 주어로 내세워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개인적인 관심이 너무나 큼을 나타내 주었다.

왕은 (아마 시바를) 보내어 예루살렘으로 신속히 데려오게 했다(5절). 그래서 마길의 수고를 덜어 주었고, 아마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해 준 시바에게는 상급을 주었을 것이다. 이 마길은 마음이 퍽 관대한 사람 같다. 다윗이나 그의 정부에 대해서 어떤 반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한 임금의 아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심정으로 미브보셋을 환대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가 압살롬을 떠나와서 다윗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보게 된다. 마길은 마하나임에서 왕이 곤궁해 있을 때, 그에게 음식을 제공해 준 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17:27). 그러나 다윗이 그에게서 므비보셋을 데려오려고 했을 때에는, 자기가 마길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그때에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푼 것을 생각하여, 마길은 더 즐거운 마음으로 다윗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데 너그러워야 한다. 언제 우리 자신이 곤궁에 빠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전 11:2). "물을 주는 자가 물을 받게 되리라" (잠 11:25)

  1.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나와 깎듯이 부복했다. 그는 절름발이였지만, "엎드려 절했다" (6절).
💡므비보셋은 유아 시절 이후 왕궁에 출입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요나단의 아들이기 이전에 몰락한 사울 집안의 사람으로서 당시 숨어 사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갑작스런 부름에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묘사된 므비보셋의 자세는 왕 앞에 보이는 일반인들의 자세에 대한 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므비보셋의 두려운 마음이 그의 몸짓에 드러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첫 대화이다. 다윗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히브리 관습으로 볼 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상대에 대한 호의와 더불어 그의 실체를 인정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다윗이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므비보셋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므비보셋의 대담을 보면 오히려 두려움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 자신은 다윗 왕의 노예와 같은 비천한 존재로서 어떠한 처분도 감수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패망한 왕조의 후예일 뿐 아니라 과거 할아버지 사울이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을 생각할 때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절에서 다윗은 먼저 그를 안심시킨다.

다윗도 요나단이 왕위에 오르려 했을 무렵, 그에게 그렇게 영예를 표했었다(삼상 20:41, "그가 요나단에게 3번 절하니라"). 그리고 이제는 사태가 완전히 역전되자,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그렇게 절한 것이다. 낮은 자리에 있을 때에 경의를 표한 자들은 자기들이 높은 자리에 있게 되면, 경의를 받게 될 것이다.

2.다윗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를 맞았다.

(1) 그는 놀랍고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므비보셋! 오! 그 사람이 살아 있었구나?" 그는 므비보셋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그가 태어날 때쯤에는 요나단과 친했기 때문이다.

(2) 다윗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두려워 말라" (7절). 다윗의 시선이 그에게 당혹함을 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므비보셋에게 어떤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부르러 보냈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었으리라. 높은 사람은 자기 하급자들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좋아해서는 안 된다(위대하신 하나님도 그러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급자들을 오히려 격려해 주어야 한다.

 💡 다윗이 므비보셋을 안심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패망한 왕가의 일원이 아닌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놓고 대화하고 있는 것에서 더 잘 드러난다.
다윗은 ‘내가 반드시 (언약의) 신실함을 너와 함께 행하리라’고 말한 것.
⇒ 즉 본문에서 다윗은 왕으로서 므비보셋에게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언약 관계에서 행하여야 할 자신의 책임을 언약의 동반자인 므비보셋에게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다윗은 왕권의 이름으로, "그의 아버지 사울의 모든 땅" 곧 그의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 주었다. 당시 그 재산은 이스보셋의 반란으로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것은 그에게 말로만의 자비가 아니라 현실적인 은총이었다.

 💡 이는 패망한 왕주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떤 당시의 상황에서는 너무나 큰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4) 이토록 그를 부양할 만한 충분한 재산을 주고도, 요나단으로 인하여(아마 그의 얼굴이 유난히 요나단을 닮았을 것이다) 항상 자기 식탁에 같이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거기서는 잘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지체에 맞는 동료들을 가지게도 된다. 비록 므비보셋이 절름발이라 보기는 흉했고 일을 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아니했는지 몰라도, 그의 훌륭한 아버지를 생각해서, 다윗은 그를 자기 식구처럼 대한 것이다.

 💡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는 표현은 단순히 옆에 앉혀서 음식을 먹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는 므비보셋을 다윗 자신의 가족의 일원처럼 친근하게 대하겠다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 즉 다윗은 자격이 안되는 므비보셋을 지목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해 줌과 동시에, 더 넓게는 나라의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렘 52:32,33).
-이렇듯 국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왕의 식탁은 중요한 정치 현안들이 긴밀하게 논의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3.므비보셋은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이 은혜를 수락했다.

그는 마치 빚이라도 받듯이 모든 자비를 취해 버리고, 그런 것은 친구들에게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반대이다. 다윗이 베푸는 은혜에 놀랐다(8절).

"주의 종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이처럼 돌아보시나이까?"

그는 얼마나 자기를 낮추었는가! 한 방백의 아들이요, 임금의 손자였지만 그는 자기를 "다윗 앞에서 죽은 개" 라 칭했다. 이토록 하나님의 섭리가 낮아지게 만들었을 때는, 스스로 겸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를 낮추시고, 우리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면, 우리는 편한 마음을 갖자. 그렇게 겸비한 자는 다시 높아질 것이다.

💡 ‘나와 같은 죽은 개를’…

-‘죽은 개’ : 므비보셋이 장애를 가진 자신의 무가치함을 나타낸 표현.
므비보셋은 이처럼 엄청난 장애를 가진 자신의 상태를 ‘죽은 개'로 표현하여 다윗 앞에서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또한 ‘죽은 개’ 라는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자기보다 월등한 자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겸앙의 표현으로 흔히 쓰였다. 과거 다윗도 사울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라고 표현하여 자신을 극도로 낮춘 적이 있었다(삼상 24:14). 그러나 이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 나아와 동일한 말로써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다윗을 얼마나 찬양했는가! 마음만 있었다면, 다윗을 헐뜯기도 쉬웠으리라. 다윗이 내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 준다고? 그것은 내 것을 내게 주는 것일 뿐이다. 같은 식탁을 사용한다고? 그건 나를 감시하려는 정략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므비보셋은 다윗의 말을 모두 존중했고, 아주 큰 자비로 받아들였으며, 자기를 지극히 낮추었다(삼상 18:18 참조).

●므비보셋에게 베푼 호의(사무엘 하 9:9-13)

므비보셋 문제가 일단락 짓는다.

  1. 그의 아버지의 재산 소유권이 그에게 확정되고, 시바가 그 증인이 된다(9절). 아마 사울은 그의 아버지도 부자였으므로 재산이 퍽 많았던 것 같다(삼상 9:1). 땅과 포도원을 물려받았다(삼상 22:7). 그것이 얼마나 되든, 이제는 므비보셋이 주인이 되었다.
  2. 그 재산 관리는 시바에게 일임되었다. 시바는 내용을 잘 알고 있으니, 관리도 잘할 수 있었고, 그의 아버지의 종이었으므로 믿을 수도 있었고, 많은 식구와 하인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 일을 하기에 충분했으리라(10절).

이리하여 므비보셋은 아주 편안하게 되었다. 염려없이 많은 재산을 누렸고, 수입은 많으나 지출의 필요가 별로 없었다. 다윗의 식탁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 몫 외에 자기 아들과 하인들을 위한 식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바의 아들들과 종들이 그의 수입원으로 살았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들의 수효가 여기에 나온 것 같다. "아들이 15, 종이 20이라." 아마 이들은 그 수입의 거의 전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재물이 늘면, 먹을 자도 느나니, 주인이 자기가 쌓아 둔 것을 눈으로 본들 낙이 무엇이랴?(전 5:17) "시바의 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므비보셋의 종이 되었다" 했다(12절). 즉 그들은 모두 므비보셋 덕으로 먹고 살았다. 그의 재산의 기생충들이었다. 그러면서 그와 그의 일을 돕는 다는 구실을 붙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속담이 있다. "종을 많이 둠은 곧 도둑을 많이 둠이다."

시바는 이제 기뻤다. 그는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왕이 명하신 대로, 주의 종이 다 행하리라" (11절).

 💡시바가 자신을 이러한 칭호로 나타낸 것은 비록 그가 사울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임명이 되었지만, 그 명령은 다윗으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신이 사울의 집안을 섬기면서도 다윗의 왕국을 배역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다윗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는 충성의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시바는 다윗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번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본문에서 므비보셋의 아들이 언급된 것은 사울의 집안이 므비보셋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아들로 계속하여 가계가 이어지게 될 것을 암시한다. 즉 본서 저자는 요나단과의 언약 안에서 다윗이 베푼 은혜가 므비보셋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아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와 같은 언급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후대 기록인 대상 8:35-40; 9:41-44을 보면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의 자손들이 매우 왕성하게 번성해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사울로 인해 비록 그 가문 전체가 형벌 가운데 처하여졌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의로운 자였으므로 사울 가문이 심판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요나단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흥왕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외형적 측면에서 이러한 흥왕은 본절 하반절의 ‘무릇 시바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는 표현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윗이 므비보셋의 철저한 후견자가 되어 그 접을 흥왕케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므비보셋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세 가지 사실은

첫째, 그가 거처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살고 있다는 것과
둘째, 왕의 상에서 먹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장애를 가진 자라는 것이다.

이중에서 므비보셋의 장애가 다시 한번 언급된 것은 그 개인으로서는 다윗의 사랑을 입기 매우 어려운 상태였지만 다윗과 언약을 맺은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특히 본절에서 그가 두 발을 다 절뚝거린 사실을 밝힌 것은 그가 중증 장애인이었음을 밝혀 그를 향한 다윗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육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이며 사람에게 은혜를 입기도 부적합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는 이제 사울의 가문이 예전의 영화는 다 지나가 버리고 다시 제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다윗은 그리스도, 곧 그의 주(主)의 아들, 뿌리요 자손인 자의 한 예표이므로,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어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타락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을 예증하셨다.

이 은혜는 다윗이 요나단에게 대해 의무를 이행했듯이, 그렇게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한 죄수들이요, 사울의 집과 같이 그를 배신한 형벌을 받고 있으며, 타락으로 인해서 절름발이와 쓸모없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타락한 인종을 불러서 찾으시며, 요구하기도 전에 그들을 먼저 구하러 오신다. 그에게 불복하여 자기를 맡기는 자들은 잃어버렸던 유산을 도로 찾아 주실 것이요, 아담이 잃어버린 것 이상의 더 좋은 낙원을 물려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식탁에 자녀들과 더불어 앉게 될 것이요, 하늘의 음식으로 즐기게 되리라.

"주여, 인간이 무엇이관대, 이토록 높이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