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II)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이 논문의 제1부에서는 현대 방언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6가지 방언 말하기의 원칙과 비교하여 성경적이 아님을 입증했다. 여기 제2부에서는 방언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권위 있게 방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또한 그런 주장들이 성경적인가를 고찰해 보고 저 한다. “ -편집자 주- )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 세 가지 근거로 현대 방언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첫째, 성경에서 “방언 말함을 금하지 말라”고 하고 (고전 14:39 ) “예언을 소멸치 말라”라고 살전 5:20) 하지 않는가?
둘째,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을 제한할 수 있는가?
셋쩨, 방언을 경험한 사람이 현재 우리들 주위에 많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들의 방언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이제 그들의 이 <세 가지 근거>를 성경적으로 검토해서 과연 이런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알아보자.
1. 성경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39)라고 말하고 있고, 또 “예언을 소멸치 말라” (살전 5:20)에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방언을 금하는가?
물론 성경 고린도전서 14:39 에서는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20에서는 “예언을 소멸치 말라” 고 한 것이 사실이다. 이 말씀을 바로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울의 초기 전도사역과 후기 전도사역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설교할 때 주님의 재림을 많이 설교했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 당대에 주님이 재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주님의 재림 소식은 없고 하여 교인들이 동요하자 바울이 그의 13개 편지 중 제일 먼저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했으니 데사로니가 전서는 바울의 초기 전도사역 때의 편지이다. 고린도전서도 바울의 사역의 초기의 편지이다. 이 당시는 구약만 있을 뿐 아직 신약성경은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속 환상, 계시, 방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던 때 이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며 더욱 방언 말하기를 사모하라고 했고 또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하면서 예언을 소멸치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으라고 명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아직도 하나님이 계속 계시의 말씀을 주시던 때이다. 그러므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바울의 후기 전도사역을 보자, 디모데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등은 바울의 후기의 사역중에 기록한 편지들이다. 여기 어디에도 방언 언급이 없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오는 일반 서신 8개에도 방언 언급은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는데 (행 1:8), 사도 행전 2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이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전에는 모세와 그를 돕는 자 70인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신약 교회의 시작과 함께 이제는 유대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셨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에 빌립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집행되었다. 물론 8장에서는 방언했다는 말이 없지만 문맥을 보아서 방언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넬료에게 전도하여 방언을 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승천할 때 말씀하신 “유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이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세상 끝“에서 이제 ”세상 끝“ 에 전도하는 것만 남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에베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세상 끝“ 인줄 알았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복음 전파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 그곳의 장로 12명이 성령을 받고 방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이제 주님이 승천하실 때 사도행전 1:8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성취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에서,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세상 끝인 (당시의 생각으로는) 에베소에서 까지 성령이 강림하여 전도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었고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인치도록 방언을 주었다.
그 후에는 방언에 대해서 성경은 잠잠하고 일체 언급이 없다.
왜? 더 말해 보아도 그것은 “세상 끝” 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의 연속일 뿐이겠기 때문이다. 주님의 최종 목표는 세상 끝까지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방언이 성도의 구원에 필수라면 방언은 복음서에도 기록되었을 것이고, 바울서신 13개에 모두, 그리고 일반서신에서도 반드시 언급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중요한 방언이라면 겨우 사도 행전이나 고린도 전서에서만 언급하고 말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 후에 우리는 성경에서 방언에 관해서 읽어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끝났고, 계시가 끝났으니 그 계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주셨던 방언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방언의 언급이 없는 것이다. 목적이 달성되었는데 수단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로 하나님의 목적과 수단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목적은 성경기록, 수단은 방언과 환상, 꿈, 천사의 내방, 꿈해몽 등이었다.
만일 오늘의 방언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방언과 같은 성격과 같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수단이라면 방언을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되며 방언으로 계속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날 방언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시는가? 아니다. 오늘이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증언한다. 계시록 22장 18-19절이 이를 증명하며 히브리 1:1 이 이를 증명한다. “옛적에 여러 선지자로 말씀하시던 계시가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 것이다.”하나님의 계시는 종결되었다. 이는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또한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이 그렇게 증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제1절이 그렇게 증언한다.
둘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가? 라는 말을 살펴보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제주권을전제 주권을 침범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막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제 주권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표와 계획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방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사역을 제한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항상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항상 같은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항상 동일한가? 흔히 말하기를 히브리 13:8에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라고 하는 성경구절을 방언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이 과거 행하신 모든 일을 지금도 하신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 제자들과 같이 육신으로 거닐면서 병자를 고치고 이적 기적을 행하시던 일을 지금도 행하신다는 말인가? 주님이 지금도 십자가에 달리시는가? 주님이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피를 흘리시는가? 주님은 지금 영광중에 계신다. 그 분은 옛날 행하시던 그런 방법으로 지금 역사하지 않으신다. 십자가 사건은 다시없다. 반복되지 않는다. 오순절 사건도 다시없다. 마치 구약의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 (救贖史, Redemptive History)에서 유일회적 (唯一回的事件, unique events in God's Redemptive History) 일뿐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이다. 한국의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본문 히 13:8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 면에서 지금은 그의 영이신 성령과 말씀으로 전 세계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지만 그의 인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점진적 계시 (漸進的啓示, progressive revelation) 의 종교이다. 구약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신약에서 모두 완성되었다. 에베소서 1장에서 “감추었던 비밀” 의 “비밀, 헬라어의 mystrion” 이란 바로 복음을 말한다. 구약에서 말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말한다. 그 비밀(복음)이 모두 이제 마지막 때에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 보여 주었다는 말이다 (히 1:1).
그래서 옛날에는 이혼을 허락했었다 (신 24:1),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19장에서 “당시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임시로 허락했던 것 뿐 본래는 그렇지 않다 “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또 마태 15:24 절에 딸이 귀신 들린 가나안 여자가 예수에게 나와서 고쳐 주시기를 원하니 예수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외에는 보냄을 받은 일이 없다 “ 고 하셨다. 이방인에게 전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그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9-20에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천하에 두루 다니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했다. 감람산에서 승천할 때도 “세상 끝까지 나가서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도 초기 사역 때와 후기 사역 때 말씀이 달라졌다.
또 구약 때는 의식법에 따라서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의식적으로 부정하여 먹지 말아야
했고 비늘이 없는 생선도 먹어서는 안 되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자 인 의식범에 속하므로 그림자가 아니고 실물인 그리스도가 모든 의식법을 완성했으므로 이제 그런 의식법은 철폐되었고 따라서 그런 의식법에 얽매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골로새 2:15-17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서로 앞뒤가 다른가?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언제나 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CONTEXT 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해석의 원칙은 항상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 차이는 전자는 “왕국 중심 신학”이고 후자는 “구속사 중심의 신학”(救贖史中心神學) 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한다는 이들이 근거도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셋째, “내가 방언하는 경험이 있으니 이는 성경적이다” 라고 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무엇이든 내가 경험하기만 하면 그것이 진리 이고 성경적인가? 그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 이다. 그럴 수는 없다. 저마다 어떤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터득했다고 주장하면 성경의 권위는 설 자리가 없다. 개혁주의 성경해석 방법의 근간은 성경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무려 1,400 년간에 걸쳐서 기록한 말씀, 완성된 그 말씀, 그 “기록된 성경말씀 만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 (NORM) 이라고 개혁주의 신앙은 주장한다. 우리의 신앙은 경험 중심이 아니다. 이는 모든 경험은 주관적 (subjective) 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주장은 개인의 특권이고 개인의 생각일 뿐 개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객관성이 결여된 것은 무엇이든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진리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는 바로 정경(正經) 인 성경뿐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경 (canon) 이라고 한다. “canon' 이란 원래가 “잣대”(ruler) 라는 의미이다. 모든 신앙 문제는 성경이 그 잣대 이어야 한다. 이유는 성경만이 틀림이 없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계시로 기록했으므로 틀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확 무오” 하다고 한다(infallible and inerrant).
오늘 교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것은 소위 “경험”이다. 옛날 18세기 19세기 합리주의자들의 생각이 바로 이런 경험위주의 위험한 철학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이를테면, Voltaire 나, Jean-Jacques Roussau, Montesquieu 등은 모두 기존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서 합리적이 아니면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상은 미국에 들어와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장수(長壽)를 누리며 살았던 뉴욕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친 John Dewey의 실용주의 (Pragmatism)로 연결된다. John Dewey의 철학은 오늘 성행하고 있는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의 기수 중의 한 사람인 Jacques Derrida에게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Postmodernism의 비조(鼻祖)인 Michel Foucault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사회를 결단내고 신학계에 큰 해악을 끼쳐 오늘의 emergent church 운동 같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철학 사조를 낳게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경험” 에 호소하는 신앙행위이다. “내가 경험했으니 그것은 ‘절대적 진리’이고 그런 경험을 못한 사람은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런 주장의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가 가장 배척하는 것은 성경은 접어 둔 채 “경험” 만 고집하는 비정상적 신앙 태도이다. 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이 진리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A라는 사람의 경험과 B라는 사람의 경험이 서로 다를 경우 어느 사람의 경험이 진리인가? 이런 경우 두 사람의 주장 모두 비진리이거나 한 사람이 맞거나 할 수밖에 없으며 두 사람 모두 진리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는 두 사람 모두 오류를 범한다. 한 사람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문제가 아니다.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 성경이고 이 말씀만이 진리이다. 개혁주의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배격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도 성경의 권위 밑에 있는 것이며 절대로 이단집단처럼 신조가 성 경위에 있거나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진리 여부는 성경에 비추어 판가름 난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경험”을 했다고 떠들어도 성경에 위배되는 ‘경험“ 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며 진리 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 완성 이후에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계시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 (Sola Scriptura)를 외치고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믿는 것이다.
“경험했다‘ 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는 만족할지 몰라도 그런 경험이 객관성 있게 진리라고 입증될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 한 사람의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험은 믿을 것이 못되며 더욱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성경과 같은 차원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방언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 방언에 관한 몰이해(沒理解) 나 오해(誤解) 로 인하여 한국이나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 교계가 손상을 입고 있다. 교회도 분열되고, 가정도 파탄되고 복음을 바로 전하는 목회자는 설 땅이 좁아지고 사이비 목사들이 온통 교계를 주름잡으며 ‘다른 복음 (to heteron euanggelion, 토 헤테론 유앙겔리온, another gospel)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무서운 흑암의 세력에 붙들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거짓 복음인 것을 모르거나 혹은 일부러 사람의 인기에 영합하고 저 바른 복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평신도는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에 백지(白紙)이므로 그들의 잘 못된 가르침이 진리인줄 알고 속아 넘어간다.
끝으로 꼭 짚고 넘어갈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요즘 Wayne Crudem 을 많이 인용한다. 한국 목사들 중에는 그가 쓴 “조직신학”을 애용하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조직신학 책은 Louis Berkhof 나 프린스톤 신학의 거장 Charles Hodge의 조직신학 (세권)이나 RTS의 교수로 있는 R. Reymond 교수의 것이 Crudem의 조직 신학보다 훨씬 좋다. 이 글을 읽는 분들로서 기독교의 교리를 바로 알고저 하는 자는 반드시 다음 개혁주의 학자들이 쓴 책을 읽기 바란다. 즉:
루이 벌콥 (Louis Berkhof) 저.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 요강, 기독교 교리사
찰스 핫지 (Charles Hodge) 저. 조직신학 (3권)
로버트 레이몬드 (Robert Reymond) 저. 기독교 조직신학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enridge Warfield) 저. 기독교 교리, 거짓 기적, 영감론,
그래셤 매천 (John Gresham Machen) 저. 바울 종교의 기원
허만 바빙크 (Herman Bavinck) 저 개혁주의 교의학 (4권)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저. 기독교 변증개요 (3권)
존 칼빈 (John Calvin) 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영문은 McNeill 이 편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