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31일 화요일 삼하23:8-39 다윗의 용사들(대상 11:10-47)

Jeehyun 2023. 1. 31. 17:50

묵상구절

  • 머리말, 첫 담대용사의 면모

23:8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23: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23: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23: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23: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 다윗의 둘째 삼대용사의 면모

23: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23: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23: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23: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23: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23: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23: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23: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3: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 다윗의 30인의 용사들의 명단

23:24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 명 중의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3:25 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

23:26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3:27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3:28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3:29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23:30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23:31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과

23:32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

23:33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23:34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23:35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23:36 소바 사람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23:37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23:38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23:39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다윗의 용사들(사무엘 하 23:8-39)

 💡 8-39절
-다윗과 그의 왕국을 위해 충성한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을 소개.
-이러한 본단락은 21:15-21의 내용과 유사성을 갖는다. 저자는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과 활동 내역을 다윗의 치세 초기와 치세 말기에 대구적으로 위치시키면서, 다윗 왕국외 시작과 완성이 다윗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부하들과 그들을 다윗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구조적으로도 보여줌.
-이러한 사실은 본단락의 병행 문단에 해당하는 대상 11:10-47의 시작에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즉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부하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며 여호와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
-대상 11:10-47에는 본단락보다 16명의 용사가 더 소개되고 있는데, ⇒ 이는 본단락이 유고가 발생하여 대체되는 사람들을 소개하지 않았거나 중요성이 덜한 사람들을 누락시킨 반면 역대기에서는 이 모든 사람들을 다 소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Ⅰ. 사무엘 기록자가 다윗 시대에 활약한 주요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1. 다윗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다윗은 그들을 훈련시켜 전쟁 기술을 익히게 했고, 훌륭한 위용의 모범을 친히 보여 주었다. 여기에 나온 것 같은 그런 훌륭한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왕의 장점인 동시에 영예이다.

2. 스스로를 훌륭하게 한 자들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다윗을 왕위에 앉게 했고, 그의 왕좌를 보호하며, 그의 정복을 돕는 일을 한 자들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자들은 갑절의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 시대만이 아니라 후대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

3. 후대들로 하여금 관대한 경쟁을 하도록 자극하기 위함이다.

4. 신앙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은 시를 통해서만 아니라 그의 건실한 예배를 통해서도 나라 안의 공신들 중에 신앙을 더욱 증진시켰다(대상 29:6). 그리고 그 공신들이 신앙으로 유명해지자, 역시 그 용맹으로도 유명해졌다.

Ⅱ. 이제 그 용사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보자.

1. 첫 세 용사. 그들은 가장 큰 일을 했고, 그래서 최대의 영예를 얻었다.

💡 8-12절은 다윗 왕국을 이방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내어 견고하게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첫 삼대용사를 소개함.

“다윗의” 용사들
-‘다윗에게 속한, 다윗을 위하는’ 용사들: 고대 사회에서 힘이 세고 강한 사람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창10:8).
즉 저자는 다윗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장수들에게 세상의 처음 영웅 니므롯에게 주어졌던 바로 이 칭호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실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은 의로운 왕을 위한 의로운 대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싸운 결과 그 이름이 여호와의 구원사를 보여주는 성경에까지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세세무궁토록 그 후손들에게 기억될 것이며, 역사가 다하는 날까지 길이 칭송될 것이다.

그들은 아디노(8절), 엘르아살(9, 10절), 그리고 삼마(11, 12절)이다. 다윗의 이야기 중 어디에도 이들에게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다가, 이곳과 그 병행 부분인 역대기(대상 11장)에만 나온다. 다윗의 위대한 많은 사건이 역대 일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영광이 아니라 결점을 말해준다. 특히 우리아의 문제로 죄를 지은 이후에 그러하다. 따라서 실상 우리가 기록에 남은 것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그의 업적이 찬연했을 것이다.
이 용감한 3총사들의 활약이 나와 있다. 그들은 외적,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1) 아디노는 자기의 창으로 한 번에 800명을 죽였다.

💡이쉬바알은 다윗이 사울의 집요한 추적을 퍼하여 블레셋 영토의 시글락에 숨었을 당시에 다윗의 용사가 되었으며(대상12:6), 다윗의 정규군의 반장으로 활동했고(대상 27:2), 창으로 적군 삼백 명을 제압할 정도의 대단한 힘과 용기를 소유한 군장이었으며, 삼십인의 용사의 두목으로 소개되고 있다(대상 11:11).

(2) 엘르아살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쳤듯이, 블레셋을 섬멸했다. 그러나 그 용맹은 골리앗보다 더욱 컸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도망간 뒤에도, 그는 자기의 진을 지켰을 뿐 아니라, "일어나 블레셋을 쳤다." 이에게 놀라운 용기를 주셨듯, 하나님은 저들에게 놀라운 공포심을 주셨던 것이다. 그의 팔이 피곤해졌으나, 그의 칼은 계속 일을 했다. 마지막 힘이 떨어지기까지, 그는 칼을 휘둘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비록 우리의 육체는 피곤해지고 약해졌더라도-정신만은 즐겁고 단호한 태도로 일해야 한다. 피곤하나 달려가고, 손이 피로해 있으나, 칼을 놓지 아니했다(삿 8:4).

이스라엘 병사들이 싸움터에서 물러간 후에도, 엘르아살은 적을 쳤다. 그래서 그들은 뒤늦게 와서 노획에 참여했던 것이다(9, 10절). 할 일이 많을 때 물러간 자들도, 얻을 게 있을 때는 신속히 모여드는 것이 인간의 상례다.

💡 엘르아살 사람들 -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인물이 다윗의 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선왕 사울 가문을 권력에서 배제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른 지파 사람들과 동등한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는 능력에 따른 인사를 하였을 뿐 지연이나 혈통에 따른 인사에 편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 따르면 엘르아살이 다윗과 함께하였을 때에 블레셋 군사들이 보리가 많은 바스담밈으로 쳐들어왔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 뒷걸음질 쳤으나 엘르아살은 불굴의 투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비스담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접경인 엘라 골짜기의 한 부분, 과거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가 있었던 곳.

세 용사가 싸움을 돋움
-싸움을 돋다 = ‘비웃다, 비난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시119:42).
문맥적으로 볼 때 당시 일반 사병들은 블레셋 군사들을 보고 겁을 먹어 퇴각했지만, 다윗의 세 용사들은 그들을 보고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맞섬으로써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을 정도로 싸움..

=-공동 번역은 본문을 ‘손이 굳어져서 칼 잡은 손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라고 외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본문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칼을 잡고 휘둘러대서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전투가 끝나고 엘르아살이 잡은 칼을 놓으려고 했을 때에 한 동안 손이 펴지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엘르아살의 용맹성과 열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날에 블레셋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암시한다.
-당시 엘르아살의 역할이 대단하였던 것은 블레셋의 위용에 위축되어 도망하였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앞서 나가 적들을 처는 엘르아살의 공격에 힘입어 다시 돌아왔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다시 돌아왔으나 엘르아살의 뒤를 따르며 전리품만 거둘 정도로 이미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엘르아살의 대단한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음
-저자는 블레셋에 대한 엘르아살의 큰 승리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구원의 결과였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는 전쟁의 승패 여부가 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전쟁 수행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진리를 전달한다(삼상14:6).
-삼상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전쟁에 대한 이러한 진리는 비단 본절에 등장한 엘르아살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단락에 언급된 모든 용사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윗 치세 후기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본장에서 굳이 용사들의 명단을 장황하게 제시하고 있는 목적은?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충성만을 찬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여호와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찬양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3) 삼마는 적의 일단이 군량 때문에 헤매고 있는 중에 만나서 쳤다(11, 12절). 그러나 이번 원정과 지난 번 것을 비교해 보라, 여기에는 "여호와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다" 고 했다.

도구(사람)의 용맹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결과의 찬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싸웠으나, 승리는 하나님이 이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자라도 자기의 힘을 자랑하거나 군사적 활동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그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

💡 삼마는 본래 유다 산지, 혹은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인물.
그는 다윗의 첫 삼대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삼십인 용사에도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3절). 양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삼십인의 용사인 동시에 첫 삼대용사로서 그의 직급이 상향 조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병행 본문인 역대상 11장에는 그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을 블레셋이 침범함, 삼마가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음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대한 언급은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약탈하기 위해서 침입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대상 11:13에서는 삼마가 활약하는 ‘녹두나무 밭' 대신에 엘르아살이 활약하는 ‘보리밭׳ 이 언급된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침공 목적이 대부분 농작물 약탈에 있었으며 그 시기가 대충 추수 때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떼를 이뤄 쳐들어 온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에 속한 밭을 점령하여 그 곡식을 모두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었으나 삼마가 그 곡식을 그들의 약탈로부터 지켜내었던 것이다.

세 용사들의 교훈
-이 용사들의 명단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왕국에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몸과 행동으로 충성을 다하는 용사들임을 교훈한다고 할 수 있다. 

2. 그 다음 세 사람

이들은 삼십인과 구별되고 그들보다 존귀하였으나 첫 삼인에 미치지는 못했다(23절).

위대한 자라고 하여 전부가 다 같은 규모는 아니다. 일등성이 아니면서도 밝고 따뜻한 별은 많으며 일급은 아니면서도 좋은 배는 많다. 두 번째 3인조 중에서는 아비새와 브나야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윗의 이야기에 종종 나타난다. 양인은 계급상으로는 처음 삼인보다 열등했지만 그 유용성으로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1) 이들 세 사람이 용감한 합작 행위. 이들은 다윗이 도피 중 아둘람 굴에서 곤란을 겪을 때 그를 시종하던 자들이다. 이들은 그와 함께 고난을 겪었기에(13절) 나중에 중용되었다.

💡 아둘람 굴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던 당시에도 얼마 동안 그곳을 자신의 지휘부로 삼아 은신해 있었으며, 약 6백 명의 군사들이 그곳을 드나들면서 그를 도왔다(삼상 22:1).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고,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고향 땅의 우물물을 갈망하였음
-이 사실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13-17절 전개상 필요하기 때문.
-당시 이스라엘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블레셋의 공격에 대항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당시 상황을 언급하여 앞으로 세 용사가 보여주는 다윗에 대한 충성심을 부각시키는 것. 이들은 다윗의 바람에 대하여 충성과 용기를 다해 순종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가져옴으로서 다윗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나타내었다.

다윗과 그를 시종하던 용사들은 아주 용감하게 블레셋인들을 막았지만 사울의 치세시에 시세가 불리하여 쫓겨다니게 되었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동굴과 성채에 숨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치고 심지어 베들레헴에까지 수비대를 두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13, 14절). 만약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좋은 친구들과 신앙의 투사들을 핍박할 정도로 교회를 그릇 인도 한다면 공동의 적이 그 기회를 틈탈 것은 명약관화하다. 다윗이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베들레헴이 어찌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갔겠는가! 다음을 살피자.

[1]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몹시 갈망했다.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애국적 소원으로 해석하여 "오! 우리가 베들레헴에서 저 블레셋의 수비대를 쫓아내고 저 사랑스런 성읍을 다시 우리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란 의미로 받아들인다. 왕왕 강이 국가를 상징하듯 우물은 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설령 그런 의미로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 주위 사람들은 그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다윗의 신체적 쇠약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때는 추수기여서 일기는 더웠고 그의 갈증은 심했다. 아마 먹을 만한 물은 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단 한 모금이라도 마셔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소년시절에도 그 우물 물로 심신을 상쾌하게 한 적이 어디 한두 번 뿐이랴! 지금은 비록 접근조차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우물 물이 아니면 못살 것 같은 심경이었으리라. 다윗은 이상하게도 까닭 모를 기분에 젖었다. 갈증이라면 다른 물을 마셔도 될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독 베들레헴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한 것이다. 이런 묘한 기분을 즐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런 기분의 충족을 고집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식욕이 다른 것보다 더 맛있고 참으로 구미에 맞는 음식을 향해 과도히 발동할 때 우리는 그 식욕을 억제해야 마땅하다(진찬을 탐하지 말라, 잠 23:3). 하물며 이 같은 기분을 충족시키려는 일이랴!

💡 다윗의 지휘 본부가 있었던 아둘람 지역의 수질은 좋지 않았던 반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수질온 좋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베들레헴에서 보냈던 다윗은 고향 가까운 곳에 진을 치게 되자 과거에 마셨던 그 물을 다시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아둘람굴을 요새로 삼아 거하고 있었던 다윗에게 실제로 물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객관적 근거는 없다. 따라서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자 갈망했다는 본절의 진술은 이방 블레셋이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고향의 시원한 우물물을 한 번 마셔봄으로써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나그네 삶을 살아온 다윗이 고향의 향수를 느껴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다윗의 세 용사 곧 아비새와 브나야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용사는 용맹무쌍하게 호구인 블레셋인의 진영을 통과하여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길어 왔다(16절).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으나 다윗은 이를 알지 못했다. 다윗이 처음 이 소원을 피력할 때 자기 부하 중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이를 감행해 주도록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세 사람은 이 일을 해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이들은 자기 군주를 몹시 중히 여겼으며 그를 섬기는 일이라면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서슴치 않았다.

다윗은 비록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유형당한 죄인이나 다름없었고 추종자들의 애호나 존경을 끌 만한 외면적 이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중용하거나 상 줄 만한 능력도 없는 가난한 군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보상의 시기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렇게 열성적으로 그의 마음을 흡족히 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모험을 강행해야 한다. 비록 고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결국 득세하여 손해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자답게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섬기자. 그들은 자기 군주의 극히 작은 암시만 받고서도 그처럼 분연히 뛰쳐나가 그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우리가 주님께 인정받으려고 탐내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미 그의 말씀과 성령과 섭리로써 자기 의사를 갖가지로 암시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 뜻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것처럼 보인다. 다윗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만약 그들이 다윗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존경하고 사랑했다면 이와 같은 행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윗을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했기에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절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릴 물을 긷는 것처럼 다윗을 위하여 정성을 다해 물을 길러 왔던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이 이러한 인간적 관계 안에서의 절대 순종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다윗의 납득하기 힘든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도 이와 같이 목숨을 바쳐 가며 임하였다면, 평소 이성적인 판단으로 내린 명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헌신적으로 충성하였겠는가?
다윗에 대하여 전폭적인 충성을 보이는 이들의 이러한 행동 배후에는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요나단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윗을 자신의 최대 정적으로 간주하여 제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신하의 신분에 있던 다윗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삼상 18:18)

둘째, 그들은 블레셋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블레셋인을 무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들이 남몰래 적진을 돌파하고 그 돌파술이 너무도 교묘해서 적에게 발각되지도 않았는지, 아니면 공공연하게 침투하고 그 표정이 너무나 두려워 블레셋인이 감히 막지 못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칼을 손에 쥐고 힘들여 길을 열었던 것처럼 보인다.

[3] 다윗은 멀리서 떠 온 이 귀중한 물을 받자 굉장히 극기심을 발휘하여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다(17절).

💡 16절,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처음에 다윗은 고향의 물을 마시기를 극도로 ‘사모했으나׳ 이제 돌연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와 같은 행동은 부하들의 절대 충성에 대한 감격과 여호와에 대한 신앙심에서 나온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대적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적 목적도 아니고 단지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는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하 세 사람을 적진에 들여보내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포악한 전제 군주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 용사들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어가 물을 떠왔던 것이다.
-부하들의 그런 충성스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무분별하였음을 자각한 다윗은 피보다도 더 값진 그 우물물을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첫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부하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나타내고자 했고 그들의 피를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음을 나타내려고 했다(시 72:14).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둘째, 그는 이로써 자기의 어리석은 발언에 대한 유감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다윗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목숨을 적군에게 내어 주려고 한 셈이었던 것이다. 권세자들은 말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그 말을 곡해하거나 오용할지도 모르는 때문이다.

셋째, 이렇게 하여 그는 장차 있을지도 모를 자기 부하의 성급한 처사를 방지하려고 했다.

넷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미련한 취미를 억제하고 그런 것을 즐기고 탐닉한 자신을 책하려 했다. 그는 자기가 경솔한 행위를 시정할 만큼 건전한 사고를 하고 있으며 극히 좋아하는 것에도 극기할 줄 안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했다. 지혜로운 자와 권세자와 선한 자에게는 이런 폭넓은 극기가 어울린다.

다섯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얻은 물이 자기가 마시기에는 너무도 값비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물을 하나님께 전제로써 부어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 물이 그들의 피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였다. 피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패트릭 감독은 다윗이 동경한 물이 자연수가 아니라 생수를 가진 메시야였다고 생각하는 어떤 자들을 언급한다. 그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을 파괴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곱째, 다윗은 자기 부하들이 피의 위험을 무릅쓰고 획득한 물을 매우 귀중히 여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 자기 보혈을 흘려가면서 사신 은혜를 우리는 더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언약의 축복을 과소 평가하는 자들처럼 언약의 피를 값없이 여기지 말자.

💡이러한 제사는 헌신과 회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삼상 7:6). 즉 물을 쏟듯이 자신을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린다는 의미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행위도 다윗의 헌신과 회개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다윗은 부하들이 떠온 소중한 물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는데, 이러한 행동 속에는 부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고 했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다윗에 대한 부하들의 신망을 다시 한번 드높이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길어 온 물이 여호와께 바쳐졌다는 것은 그만큼 군주인 다윗에 의해서 거룩하고 값진 물로 여겨졌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물을 여호와께 제사로 드림으로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의 덕을 발휘하였다.

일부 번역에서는 (NJB) 이 제사에 대하여 다윗의 의지가 아닌, 여호와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함.
-이러한 번역을 염두에 둔다면 우러는 본문을 통하여 다윗의 신앙적이며 윤리적인 결단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욕구를 억제토록 하셔서 군왕의 덕을 갖추게 하신 여호와의 섭리를 찬양하게 된다.

(2) 또 다른 경우에 나타난 두 사람의 용감한 행동. 아비새는 한 때 삼백 명을 살육했고(18, 19절). 브나야는 효용한 일을 많이 행했다.

💡 19절의 3인
-아비새, 브나야,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익명의 용사.
-이들은 장수로서의 힘과 무술에 있어서는 첫 삼대용사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다윗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 장수로 분류되는 뛰어난 맹장들이었다. 
 💡 아비새는 가장 3인중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아비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인 것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장수로서의 자질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존귀히 여김 받고 큰 영예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첫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저자는 아비새의 활약이 매우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첫 삼대용사들이 가졌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 내리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아비새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등장하는 브나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내려지면서(23절). 첫 삼대용사에 비해 둘째 삼대 용사가 여러 모로 부족하였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를 어머니로 두었던 다윗의 조카 아비새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아버지로 두었던(대상 27:5) 브나야가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다윗의 왕국에 있어서 주요 직책에 임명되는 것이나 명예를 얻는 것은 출신이나 배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공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윗 왕국이 이러한 공평한 인사와 인물 발탁의 원리를 표방했던 것은 사람의 외적 조건이 아닌 ‘행동을 달아보시는 여호와' (삼상 2:3)를 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압도 다윗 왕정의 최고 군대 장관으로 오랜 세월을 봉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리에 부합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윗외 용사들의 명단에서 아예 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브나야는 두 모압인을 죽였는데 그들은 사자처럼 용맹하고 대담하고 강하고 흉포하고 맹렬했다.

[2] 그는 함정에 빠진 사자를 죽였다. 이는 삼손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사자가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에 애국심에서 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설기였던 터라 그는 여늬 때보다 몸을 움직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며 사자는 더 흉맹하고 굶주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자를 제압했다.

[3] 그는 애굽인을 죽였다. 그 시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애굽인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브나야는 무기라곤 막대기밖에 없이 그를 공격하여 그의 손에 들려있던 창을 잽싸게 빼앗아 그를 찔러 죽였다(21절). 이런 전공과 다른 유사한 공훈으로 다윗은 그를 시위대장으로 중용하였다(23절)

💡 본 전투 기사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시킨다(삼상 17-41-51). 소년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창과 방패를 든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쳐죽였는데, 바로 이 브나야도 막대기 하나만을 들고서 창을 든 장대한 애굽 장수를 쳐죽인 것이다.

특별히 ‘막대기를 들고 나갔다'라는 것은 상대방을 할례 받지 않은 개와 같은 존재로 여겼옴을 보여주기 위함인 듯하다(삼상 17:43). 이는 두려움을 모르는 그의 용기와 뛰어난 무술 실력을 드러냄은 물론 만군의 여호와께서 택한 자를 지키신다는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묘사라고 볼 수 있다.

브나야가 다윗의 둘째 삼대 용사 중 한 사람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무술 실력과 용맹성, 그러고 그가 거둔 수많은 업적들이 본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를 둘째 삼대용사의 반열에 들게 하였고 23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다윗의 경호 대장이라는 직책에 앉게 해 주었다.
💡 첫 삼대용사들의 행적(8-12절)파 둘째 삼대용사들의 행적(18-23절)을 서로 비교할 경우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도출된다.
-우선 첫 삼대용사들의 행적은 둘째 삼대용사들의 행적에 비하면 자세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단순하다. 그러나 전자의 행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간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심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후자의 행적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첫 삼인에게 미치지 못했다'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들의 우열은 다윗의 개인적 판단이나 용사들 개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께서 전쟁에 간섭하신 결과 큰 승리와 큰 영웅을 낳았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 24-39절, 다윗의 삼십인 용사에 대한 출신지역과 그 이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함.
-다윗이 지연, 혈연과 같은 측면을 보고 관직을 주는 정실 인사를 철저히 배격하였으며, 오직 그 개인의 능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용사들의 이러한 구성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데 있어서도 지연이나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도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두 번째 삼 인보다는 못하나 이름을 크게 날리던 삼십 인의 명단이 여기에 나온다(24절).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은 아사헬이다. 그는 다윗의 통치 초기에 아브넬에게 살해되었지만 이 명단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다음에 오는 엘하난은 첫 번째 삼인 중 하나인 엘르아살의 아우였다. 이들의 이름 앞에 붙은 별칭은 출생지나 거주지에서 따온 것인 듯하다. 전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용맹한 자들이 선발되어 왕을 섬겼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 중 몇몇은 다윗이 연중 한 달씩 체번하도록 임명한 반열의 반장으로도 나타난다(대상 27:1). 가치 있는 일을 한 자들은 그 공을 따라 승진되었다. 아히도벨의 아들도 그런 자 중 하나였다(34절).

💡 엘리암 : 아히도벨의 아들, 모리아의 아내였다가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의 아버지로 추정(11:3).
⇒ 다윗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자신을 원수로 여길 수도 있는 인물을 장수 중에 둔 것이 되는데, 이는 다윗이 결코 개인적 감정에 치우지지 않는 공정한 인물이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아버지가 군신 회의장에서 모략으로 유명했듯 아들은 전장에서 용맹을 날렸던 것이다.

요압은 이들 중에 언급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는 너무나 큰 자여서 언급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삼인 중 첫째 인물은 군장 중 두목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총사령관격으로 이들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2) 또는 그가 너무도 악하여 언급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위대한 군인이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고 자기 전리품을 하나님의 전에 바칠 정도로 신앙이 깊은 인물이었지만(대상 26:28), 다윗의 두 친구를 살해함으로써 얻은 불명예는 적군을 살육해서 얻은 명예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 요압의 병기든 자가 다윗의 용사 명단에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요압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는 요압이 전군의 군대 장관이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인 용사들의 목록에서 생략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신정 국가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인본주의적 인물로 판단하여 저자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는 지나친 권력욕으로 아브넬과 압살롬, 아마사 등을 무자비하게 살해함으로써 다윗의 성정을 거슬렀으며,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른 인물이었기에 이스라엘과 다윗에 대한 충성 봉사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다윗의 용사의 명단에서 삭제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삼십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헷 사람 우리아에게 이르러서는 다윗의 죄가 회상된다. 그것은 다윗의 죄를 더욱 가중시킨다. 자기 왕과 나라로부터 상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 우리아: ‘빛+여호와’ ‘여호와는 나의 빛이다’ 라는 의미
-우리아가 이와 같은 신앙 고백적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는 비록 '헷 사람’ 이었지만 그의 부친은 일찍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가 임신하자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전쟁을 빌미삼아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말았다(11장). 다윗의 삼십인 용사 가운데 들 정도로 용맹하고 뛰어난 장수 우리아는 그렇게 그의 주군인 다윗의 탐욕과 죄악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다윗의 치부를 대대로 드러낼 장수 우리아의 이름이 다윗의 용사의 명단 마지막에 기록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다. 즉 누락될 수도 있는 우리아의 이름을 이와 같이 마지막에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이 연약한 다윗의 능력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은혜를 베푸신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 든든히 세워졌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인 그리스도께도 존귀한 용사들이 있다.

이들은 다윗의 용사들처럼 그리스도의 모범에 감화를 받고 그의 나라의 영적 원수들과 싸우며 그의 강한 힘으로 정복자들 이상 가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그의 직계 시종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효용한 일을 많이 했었고 그를 위해 크게 고난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그와 함께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구약에 언급되고 있듯 사도들은 신약에서 존귀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계 21:14 참조). 아니, 그리스도의 모든 선한 군사들은 이들 존귀한 자들보다 그 이름이 더욱 잘 보존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성인들은 이런 명예와 존귀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