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25일 화요일 왕하9:14-26 이스라엘 왕 요람이 살해되다

Jeehyun 2023. 4. 25. 08:23

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2, 시편 36, 전도서 12, 빌레몬서 1

묵상구절

9: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9:15 아람의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부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알리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9: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 왕이 거기에 누워 있었음이라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9: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9: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물러나라 하니라 파수꾼이 전하여 이르되 사자가 그들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9:19 다시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었더니 그들에게 가서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를 따르라 하더라

9:20 파수꾼이 또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하니

9:21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9: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9: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 진지라

9:25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예후의 반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다양한 배경적 요인들

본문 역시 8:28,29의 내용과 흡사하다. 하지만 본문은 8:29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 예후가 반역의 기치를 걸고 나선 때가 북이스라엘 왕 요람이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시기였음을 밝힘으로써 앞선 1-14절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기사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아람 왕 하사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는 이 전투에서 요람이 유다 왕 아하시야와 연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하여 이스르엘로 요양하러 가게 되었고 그의 자리를 예후가 대신 떠맡아 층실히 수행함으로써 모든 군대 지도자들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이것이 예후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보도는 예후의 모반이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한 때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미 북이스라엘 왕 요람은 부상을 입어 전장을 떠나 있었고 따라서 그의 모든 병력들은 자신의 세력권 안에 있었으므로 예후의 모반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컸다. 뿐만 아니라 남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요람 왕 을 문병하러 와 이스르엘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예후의 반역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예후의 모반이 성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Ⅲ. 예후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그는 요람에 비해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점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요람은 군대를 떠났다. 심하게 부상당하여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후의 훌륭한 처신은 두 가지 사실에서 나타났다.

1.그는 군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조언과 승낙 없이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이라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후가 그들의 판결과 그들의 충성을 신뢰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둘 다 그들을 기쁘게 하고, 확고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일어나, 굳게 서기를 원하는 자들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이미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13절)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뜻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뜻에 따른 모반에의 지지를 호소함. 

2. 그는 요람을 급습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속히 그를 공격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아무도 이스라엘에 그것을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그래서 덫과 같이 파멸이 그와 그의 집에 임하게 되리라. 공격에는 때로 신속성이 공격력만큼 중요해지는 수가 있다.

👉 지금 이 순간은 아무도 이스르엘로 가지 못하게 하고 혁명이 완전 성공한 이후에 군대를 보낼 것을 의미한다. 예후의 이와 같은 명령은 모반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 현재의 상황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예후의 이 명령은 그의 모반의 성패를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만일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그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된다면 예후는 반역죄로 처형되었거나, 아니면 설사 모반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엄청난 유혈 사태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후는 모반이 비밀리에 진행될 수 있도록 군대 지도자들의 협조를 당부한 것이다.

●예후의 혁명(열왕기 하 9:16-29)

라못 길르앗에서 이스라엘까지는 하룻길의 행군 이상이었다. 두 지점 중도쯤에서 그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다. 예후는 가능한 한 아주 신속히 행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이스라엘에 이 소식이 닿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된다. 다음에는 그가 선고받은 왕에게 도달하는 것을 본다.

 👉 16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 이 부분은 예후가 이스르엘로 회군하여 모반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그 이유를 제시한다.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이끌어지는 구문으로, 직역하면 ‘왜냐하면 요람이 거기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요람의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전쟁으로 인해 그가 부상 당하여 치료 중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누웠음이라'에 헤당하는 ‘쇼케브'의 원형 ‘솨카브’ 는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는 상황과 관련해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휴식이나 성관계틀 위해 눕는 행위를 묘사할 어떤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 이는 본문에서 요람이 누워 있는 장소로 언급되는 ‘이스르엘'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르엘에는
— 아합 이래로 왕들이 여름에 집정하거나 휴양처로 이용하였던 상아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의 저자가 ‘이스르엘'이라는 지명과 ‘와카브' 동사를 함께 사용한 것은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신복들은 전장에서 강력한 아람 군대와 대처하고 있음에도 왕인 요람은 안일하게 상아궁에서 휴양 하고 있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 이는 이후 21절에서 요람이 병거를 타고 나가 예후를 맞이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 부상이 충분히 치료되어 다시 전쟁을 지휘할 만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는 요람의 안일한 자세를 지적 해주는 동시에 당시 군부가 예후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본서 저자는 전쟁의 상황에서 ‘병거를 타고 가는 예후'와 ↔ ‘누워서 휴양하고 있는 요람'을 시각적으로 비교 대조함으로써, 두 인물의 상반된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즉 병거를 타는 예후의 역동적인 모습은 — 새로운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여 역동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될 모습을, 반면 누워 있는 요람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모습은 — 예후의 모반으로 맞이하게 될 오므리 왕가 의 최후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6절,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기 위해 내려옴
본문은 8:29의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예후가 본격적인 모반을 일으키기 위해 당시 요람이 었던 이스르엘로 진격해 오는 상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아하시야는 단순히 동맹 관계틀 맺고 었는 북이스라엘의 요람 왕이 부상당한 것과 관련해 단순히 문안차 온 것에 불과하지만, 그 시점이 예후가 이스르엘로 공격해 들어오는 시기와 일치하였다는 것은 아하시야가 멍에를 같이한 요람과 더불어 예후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예시한다(27절). 

Ⅰ. 요람의 파수꾼이 먼저 멀리서 예후와 그의 종자(從者)들을 보고, 왕에게 한 무리의 가까이 옴을 알렸으나, 그들이 우방인지 원수들인지를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왕은(그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안달이 나서, 그리고 아마도 그에게 부상을 입힌 아람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여 그의 궁전에 피를 흘리게 하고 그리고 그를 사로잡으러 오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놓지 못해서) 먼저 한 연락병을 보내고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정보를 가져오도록 했다(17-19절). 그는 그가 전투에서 겪은 커다란 공포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죄책에 대한 그의 양심은 그를 끊임없는 전율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사신들은 모두 동일한 질문을 했다. 즉 "평안이냐? 우리 편이냐 적군 편이냐? 희소식이냐 흉보냐?" 하는 질문이다.

각기 대답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안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내 뒤로 돌아서라" (18, 19절)고 예후는 대답했다.

👉‘일개 병사인 네가 전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예후가 되묻는 내용이다. 이는 아합 왕가를 심판하기 위해 반역의 기치를 올려든 그에게 평안을 묻는 인사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예후의 거침없는 성품이 잘 드러나 있는 말이다

마치 이렇게 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내가 대답할 답변은 너에게가 아니라, 너를 보낸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너는 네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내 뒤로 돌아서며, 나를 따르는 병사들 중에 편입하라" 는 뜻이다.

👉 19절, 여기서 우리는 요람이 병사틀 다 시 보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병사를 다시 보내는 요람의 행위에는 그 무리들이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판단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요람이 그 무리를 적군으로 보았다면, 그는 정찰병을 다시 내보내 무모한 희생을 치르는 대신 이스르엘 성의 경계 태세를 강 화하였을 것어다. 그러나 그는 이스르엘 성으로 몰려오는 무리가 이스라엘 군대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가 보낸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찰병을 보내 그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였던 것. 요람의 이러한 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보낸 정찰병이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마중하러 나가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자신이 보낸 정찰병이 연속해서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요람은 좀더 신중하게 현실을 관망했어야 마땅했다.

이로 볼 때 요람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둔하고 매우 성격이 급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었다.
요람의 이러한 둔감한 모습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영적으로 둔감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감 지하지 못하는 영적 판단력이 무뎌진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요람의 부주의한 모습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그가 처한 상황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셨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어라고 볼 수 있다. 즉 정상적인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정찰병을 계속 보내며 마침내 스스로 성에서 나와 예후에게로 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고자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요람은 예후를 통해 날아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24절). 

파수꾼은 그 사신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파수꾼은 그 군대의 지휘관이 예후처럼 말을 몰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예후는 맹렬하게 모든 것으로 알려진 것 같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일에 뜨겁고 열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임을 보여 주었고, 전력을 다하여 전진하는 자임을 드러내었다. 그러한 격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야 예후에게 맡겨진 그 일에 대한 최적임자가 될 수 있다.

👉 20절, 그 병거 모는 것이 … 미치게(’솨가으’ 동사 파생) 모나이다
⇒ 파수꾼이 자신이 파악한 바에 따라 이스르엘 성으로 접근하는 자가 예후처럼 보인다고 왕에게 보고하는 부분.

‘병거를 미치게 몰고 있다'는 것은 예후가 먼지와 소리를 일으키면서 병거를 매우 격렬하게 몰았음을 나타낸다. 평소에 예후는 병거를 격렬하게 모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파수꾼은 멀리서 관찰해도 그가 예후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후의 특징을 반영하는 ‘솨가으' 동사는 11절에서 예후에게 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 생도를 군대 지휘관들이 ‘미친 자’로 규정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선지 생도가 행한 일련의 행동과 에후가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동일시하려는 저자의 세심한 의도 때문에 동일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선지 생도가 엘리사를 통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후를 만나 그 사명을 다했던 것처럼, 예후 역시 아합 왕가를 심판하라는 선지 생도를 통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르엘로 진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파수꾼의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예후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할 적절한 도구를 선택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의 격렬성 때문에 알려진다면, 그것은 명예스런 일이 아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갈대아 의역본은 정반대의 의미를 준다 즉 "통솔하는 모습이 예후의 통솔법과 같습니다 그는 조용히 통솔하기 때문입니다" 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 급히 올라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별로 지체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천천히 행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요람이 자기에게로 나아올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서, 자기가 성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미리 처분하려 했기 때문이라 한다.

Ⅱ. 요람 자신이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리고 유다 왕 아하시야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나갔을 뿐 적을 예상하지 않았고, 싸울 준비도 하지 않은 채였다.

사람들은 때로 자기들의 멸망의 날이 오면, 급히 나아가 멸망을 맞으려 하니, 섭리자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나 기묘하게 조정하시는가?

 👉 21절, 요람이 병거를 메우라 명령하고 그 병거를 타고 이동함
요람이 보낸 정찰병들은 말을 타고 나갔는데, 본문에서 요람은 병거를 준비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병거가 전쟁시에 사용된 무기였을 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교통 수단으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처럼 요람이 병거에 오르는 내용은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이미 요람이 전쟁에서 업은 부상으로부터 충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도 전달하고 있다.

요람과 아하시야의 경솔한 행위
정찰병들이 반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은 사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았음. → 하나님께서 판단력을 흐리심. 요람과 아하시야 두 사람이 이스르엘에 함께 있었음 각자 병거를 타고 예후 일행을 마중 나감 → 조급한 마음에서 나온 실수. 조금이라도 인내심을 갖고 이스르엘 성안에 머물렀다면, 예후의 반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들어 사용하셔서 아합 가문을 심판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이처럼 많은 실수와 착오를 범하게 하셨고 결국 예언대로 심판은 성취되게 하시고 예후 가문의 북이스라엘 통치 또한 가능하게 된 것.

이러한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 왕의 권세를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왕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을 때에만 그 기능을 을바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합의 가문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1.요람이 예후를 맞은 곳은 불길한 장소였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났다고 했다(21절).

그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요람을 두려워 떨게 하여 예후를 승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요람은 나봇의 피를 흘린 죄가 있었고, 이제 예후는 나봇을 위하여 싸운 엘리야의 저주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는 사건들의 상황을 기묘하게 조정하사, 죄와 벌의 관계가 얼굴과 거울 속의 얼굴과의 관계와 같게 하신다.

 👉 ‘나봇의 토지'

아합 왕의 탐욕과 이세벨의 악한 간계로 말미암아 왕궁의 소유가 된 땅이다. 그리고 이곳은 토지의 주인이었던 나봇의 억울한 피가 홀려졌던 장소인 동시에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가의 멸망 예언이 선포된 장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아합이 나붓을 살해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웠던 죄악으로 인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언하셨던 바로 그 장소를 아합의 아들인 요람과 아합의 외손자인 아하 시야를 심판하시는 장소로 택하심으로써, 당신의 엄정한 공의를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본 사건은 우연의 일치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하게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아합 가문에 속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격노케 한 북이스라엘 왕 요람과 남유다 왕 아하시야가 그들을 심판할 자인 예후 앞에 동시에 서게 되고 또한 그들이 엘리야를 통해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이 선포된 유서 깊은 장소인 이스르엘 나봇의 포도원에서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 가운데 긴밀히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요람의 물음은 동일했다. 즉 "예후여, 평안이뇨? 너는 아람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오는가, 아니면 그들을 정복하고 오는가?" 요람은 그것이 평화인 줄로 알았다.

다른 어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흔히 매우 악질적인 죄인들은 자기들이 비록 멸망 직전에 있을 때에도, 만사가 잘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뽐내며 스스로에 대해 평화를 소리쳐 외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3. 예후의 대답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예후는 그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답했다.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비록 그녀는 왕의 미망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섭정을 하는 여왕이었다)" 예후가 얼마나 그를 단순하게 취급했는가 보라. 전에는 그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한 마음을 가졌었다. 죄인들이 항상 달콤한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들의 몫을 받게 될 것이다(시 36:2).

👉 전쟁의 상황을 묻는 요람의 질문에 대해 놀랍게도 예후는 태후로 있는 이세벨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정확히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 서두에는 ‘~하는 한(so long as)'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드'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전처사 ‘아드'는 일종의 조건문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데, ‘아드' 이하의 문제가 있는 한 평화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예후는 요람의 어미의 죄악을 꾸짖었다. 왜냐하면 제일 먼저는 그가 그 죄악을 배웠고, 다음에는 자기의 왕권으로 그것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음행, 곧 육체적 음행과 영적 음행으로(그녀는 우상을 섬겼고, 그것도 아주 음탕하게 섬겼다) 비난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그녀의 우상들을 위하여 사용된 점과 복술과 마술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런 일들은 수 없이 많았다. 또 음행과 복술을 더욱 심하게 했다. 왜냐하면 악한 길에 자신을 던진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멈추어 설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

(2) 이러한 이유로, 예후는 그를 평안을 가장하는 모든 허식에서 추방시켰다.

"뉘우치지 않은 죄악이 그렇게 많은데, 그 집에 무슨 평안이 임할 수 있겠는가?"

👉 이러한 예후의 대답의 이면에는
참된 평화는 전쟁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바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세벨이 나서서 여호와 신앙을 탄압하고 이방신 숭배를 강요하니 이스라엘에 무슨 평화가 있겠느냐는 의미가 함측되어 있다. ⇒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상황을 염두에 둔 말.

죄의 길은 결코 평안의 길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사 42:21). 죄인들이 하나님과 무슨 평안을 가질 수 있겠으며, 자기 양심에 무슨 평안을 지니겠는가? 여전히 자기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 무슨 선한 것과 평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죄를 고집하는 한, 아무 평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뉘우치고 버리면, 즉시 평안이 있게 되리라.

👉 요람에게 있어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태후인 이세벨에 대한 비판의 말을 쏟아놓는 것은 현재 왕인 요람 자신에 대한 비판의 말보다 더 큰 모멸감을 주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울러 이는 예후 자신이 지금 일으키고 있는 혁명의 근본 목적과 명분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예후는 이세벨의 죄악과 음란함, 슬수를 이스라엘로부터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요람에게 천명한 것이다.

4.즉시 처형이 시작되었다. 요람은 그의 어미의 죄에 대한 말을 듣고 낙담했다. 그는 곧 오랫동안 자기에게 위협을 주던 그 최후의 날이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예후가 바로 우리의 원수이며, 지금은 우리가 안전을 위하여 도망갈 때로다" 하고 소리쳤다. 두 사람이 다 도망갔다.

(1) 그러나 이스라엘 왕 요람은 즉시 살해되었다(24절).

예후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를 처치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갑옷의 접합점 사이로 그 운명의 화살이 뚫고 지나 갔는데, 화살이 그렇게 모험적으로 당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후는 요람이 도망갈 때, 그의 양 어깨 사이로 화살을 쏘았다(그것은 하나님이 "그 박해자에 대하여 정하셨던" 하나님 자신의 화살들 중의 하나였다. 시 7:13). 그리하여 그 화살은 그의 심장을 뚫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는 아합의 집의 종손이었으므로 제일 먼저 제거되었다. 그는 율법의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죽었다. 예후는 그 율법의 선고를 시행하는 자로서 그 죽은 시체를 처리했다.

👉 본문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람의 한 병사가 우연히 쓴 화살을 아합의 갑옷 솔기에 명중시켜 그를 심판하셨던 것처럼 그 아들 요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예후가 쓴 화살에 명중시켜 심판하고 계심을 묘사하는 것.

본문은 한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예후의 숙련된 활 솜써를 입증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예후가 아무리 명사수라 할지라도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요람의 병거를 향해, 그것도 얼격에 요람의 급소를 정확히 화살로 맞추어 관통시키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 그런데도 예후가 화살 한 방으로 요람의 염통을 맞추었다는 것은 — 예후가 요람을 죽이는 그 배후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셨음을 암시한다. 이는 적군의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로 인하여, 그것도 갑옷 솔기 사이를 맞아 죽임을 당했던 그의 부친 아함 왕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왕상 22:34).

또한 아합과 요람이 모두 병거 위에서 최후를 맞어했다는 보도 역시도 — 아합 왕가의 멸망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은 굳어 버렸고, 그것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선고한 파멸의 전말을 요람에게 생각나게 했다. 엘리야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내가 나봇 자신의 피와 또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25, 26절).

👉 본문은 예후가 장관 빗갈에게 요람의 시체를 나봇의 토지에 던지라고 명령하면서, 그 근거로 왕상 21:19의 예언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
그런데 본문은 왕상 21:19과 달러 나봇의 피와 더불어 ‘그 아들들의 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나봇 뿐만 아니라 나봇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들들 조차도 함께 제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과거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어젯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이 지난 사건이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심을 강조한 것이다.

‘내가•••보았노라'에 해당하는 주어는 여호와 자신으로서,
아합이 속임수와 살인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것을 여호와께서 생생하게 목격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은 아합과 이세벨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인간사를 살피시는 여호와를 속일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후는 아합 왕가의 후손인 요람에 대한 죽음의 심판이 매우 정당한 것임을 엘리야의 신탁을 인용해 장관 빗갈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또..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또.. 갚으리라’ 에 해당하는 단어는 ⇒ ‘그리고 그가 완전하게 하셨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하시는 방법과 내용이 절대로 부족함이나 넘침이 없이 ‘완전함'을 암시함. 여호와께서는 나봇과 그의 아들들이 피를 흘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합(왕상 22:38)과 이세벨(36,37절) 그러고 요람을 포함한 아합의 후손들을 멸망케 하심으로써(10:14), 나봇에 대한 보수를 완전히 이루셨음을 나타낸다 

그 아이들은 아버지 나봇의 범죄 공모자로 함께 처형되었거나 아니면 그 후에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그래야 아들들이 탄원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들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복하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를 잃었다 해서 그들이 낙담하지 않을 것이며, 또는(그의 전 재산이 그의 포도원과 함께 몰수되었을 때) 그들의 생활 터전을 잃는 일이 없도록-그렇게 되면 실상 죽게 되는 것이다-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아합의 집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요람이 아주 교만하고 유쾌한 태도로 그 무죄한 피를 희생시키고서 자기가 차지했던 바로 그 땅이 이제는 극장이 되어서 거기서 그의 자식의 죽은 시체가 세상에게 구경거리로 되어야 했던 것이다.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가 시행하시는 심판에 의해서 알려지신다(학가욘, 셀라)(시 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