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2, 시편 83, 84, 이사야 30, 유다서 1
묵상구절
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19: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19: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앗수르 군대의 파멸(열왕기 하 19:35-37)
때때로 예언이 성취되고 약속이 실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이 나오자마자 곧 시행되어졌다.
💡 35절,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 친지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으나, 원문상 본절은 ‘와예히’ 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발생하였다'로 직역될 수 있는 ‘와예히'는 새로운 내용이 도입될 때 주로 사용되는 구문이다. 이처럼 사건의 전환이나 새로운 화제를 도입할 때 쓰이는 히브리 관용적 표현인 ‘와예히’ 가 본문에 사용된 것은 이 이후의 내용이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앗수르의 군대가 몰살되는 사건으로 본장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Ⅰ. 앗수르의 군대는 완전히 패주하였다.
히스기야에게 이 메시지를 보낸 다음날 밤에, 적들은 곧 그 성읍 앞에 진을 치고, 참호를 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에 적군의 주력 부대가 그 장소에서 천사에 의해서 살육되었다(35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역습하고 그들의 진영을 공격할 만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칼과 활로 그들을 살육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천사 곧 파멸시키는 천사를, 한밤중에 보내어 그들을 강습케 했다. 그리고 그 파수병들은 그 천사를 볼 수도 저항 할 수도 없었다. 앗수르의 군대가 엎어진 것은 "용사의 칼이나 어떤 평범한 인간의 칼에 의해서" 가 아니었다. 즉 전혀 어떤 인간의 칼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애굽의 처음 난 자들을 살해했던 그러한 천사의 칼에 의해서였다(사 31:8).
💡 여기서 우러는 예언하신 바를 지체하지 않으시고 실행에 옮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호와의 사자’ = 천사.
본문에 나온 여호와의 사자는 앗수르 군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자는 23절에서 언급된 산헤립의 사자와 대조를 이루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앗수르 군대에 심판을 수행함으로써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산헤립에게 이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하나님의 사자는 당시 최강의 군사력을 가졌던 앗수르의 군대 ‘십팔만 오천명'을 하루밤 사이에 죽이는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보도는 출애굽시 애굽에 임한 마지막 재앙이었던 장자 재앙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출 12:29). 이 사건도 본단락의 산헤립의 경우처럼 교만한 바로 왕이 여호와를 대적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다.
본절과 관련하여 학자들은 앗수르의 대군이 어떤 방법으로 하룻밤 사어에 죽게 되었는지 다각도로 분석하여 보았다. 어떤 이는 지진이나 화산 분출과 같은 극심한 자연 재난 때문으로 해석하였고, 갑작스런 역병이 돌았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이둘도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를 구스왕 디르하가와 전쟁에서 전사한 앗수르 군대의 사상자 수라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헤석들은 모두 추측이나 지나친 인위적 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본서 저자조차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본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산헤립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인헤 이처럼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날 밤 사이에 되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세푸스(Josephus)는 그것이 역병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 역병은 그들을 즉사케 했다. 살해된 숫자는 엄청나서 18만 5천 명이었다. 아마도 랍사게는 잔존자들 중에 끼였던 것 같다. 포위되었던 자들이 아침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들이 되었다." 그들 중에 생존자는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어떤 이는 시편 76편이 이 때에 씌어졌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보면,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奪取)를 당하여, 자기의 잠" 즉 마지막이고 긴 잠을 "잤도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시 75:5).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본문은 앗수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람사게를 내세워 남유다 왕과 백성들, 그러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조롱했던 18장의 상황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본문에서 앗수르의 군사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송장으로 변한 동료 군사들을 목격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인간적인 요인이나 다른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순식간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3:22).
‘보니’ : ‘그리고 보라!’ → 당시의 상황이 전혀 사전에 예기치 못한 매우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을 생생하게 나타냄.
‘다 송장이 되었더라(메침)’ 여호와의 능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앗수르의 무능력한 상태. 열방들을 마치 연약한 풀처럼 휩쓸어 버리던(26절) 앗수르가 여호와 앞에서 그와 동일한 운명에 처하였던 것. 이러한 본문은 앗수르의 대군을 심판하시는 놀라운 이적을 통헤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한분밖에 없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편 이러한 본문의 사건은 앞선 18장에서 유다의 군사력을 업신여기고 이천 필의 말을 낼 터이니 탈 사람을 내어보라고 했던 랍사게의 조롱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조롱 이후에 랍사게는 히스기야를 가리켜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처겠는가"라고까지 하면서 히스기야와 남유다를 업신여기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바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하게 호언장담하던 앗수르 군대가 풍문을 듣고 일시에 퇴각하였을 뿐 아니라(7.8절)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침으로 무려 185.000명이나 죽게 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이 얼마나 헛되고 무력한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거룩한 천사들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라. 한 천사가 하룻 밤에 그렇게 큰 살육을 할 수가 있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최대로 강한 자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가를 보라. 그 누구가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완악하게 행하고도 성공하였는가?
왕의 교만과 망령됨은 그의 군대의 파멸로 징벌된다. 이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시온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큰 집결이 이루어지기를 즉 "그들이 곡식단과 같이 타작 마당에 모아지기" 를 기다리셨다고 미가 예언자는 말한다(미 4:12, 13).
Ⅱ. 앗수르 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가 아무리 교만스럽게 자랑했지만, 그 후에는 자신을 대하기가 부끄럽게 되었고, 전쟁에 패하였고, 정복을 추구할 수도 없게 되었고, 자기의 병력(아마 이 때가 최강성기였을 것이다)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자신이 그러한 타격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니라" 고 했다(36절). 즉 이 표현 방식은 그의 마음이 혼란에 빠져 심란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산헤립)의 두 친아들" 의 손을 통하여 그를 살해하게 한 것은 그후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앞절이 앗수르 군대에 임한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을 묘사했다면, 본절과 37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 개인에게 임한 여호와의 심판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은 여호와의 에언의 성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본절에 나타난 산헤립의 귀환은 7, 28, 33절에 나타난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음을 나타낸다.
니느웨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동쭉 언덕에 위치한 성읍으로 B.C. 12세기부터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으나, 이곳이 앗수르의 수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산헤립 때부터였다. 이 성읍은 산헤립, 에살핫돈, 앗술바니팔 등에 의해 계속적으로 재건축되어 당시 근동의 최고의 도시이자 요새가 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니느웨의 주위는 장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길어는 10km가 넘는다고 한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2개의 구릉이 있었고 요나서의 보도에 의하면 니느웨는 그 주위를 도는 것만으로도 3일이 걸린다(약 96km 내외)고 기록되어 있다(욘 3:3). 역사적으로 포악과 잔학 행위가 수없어 자행된 이 도시는 그토록 거대하고 견고한 성채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B.C. 612년경 바벨론인과 스구디아인, 그러고 매대인들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이 성읍의 함락과 함께 앗수르 역시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본문에서 니느웨성은 산헤립의 거주지로 소개되어 ↔ 히스기야의 거주지인 ‘예루살렘성'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본장에서 이 두 성읍은 각각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의 심판 장소와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구원 장소라는 대조적 이미지틀 전달한다. 아울러 본문은 이같은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그분의 심관 선고를 받은 자는 아무러 견고한 요새나 성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마땅히 보호할 의무가 있는 아들들이 자기들의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매우 악한 짓이다. 얼마나 극악한 무리들인가!
2.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셨다. 아버지가 자기를 지은 하나님께 거역할 때, 그 자식들이 또한 그 아버지를 거역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정당한 귀결이다. 자기 자녀들이 불효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당신은 마땅히 예배되어야 할 분이심을 산헤립에게 충분히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는 우상 섬기는 일을 계속 고집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의 거짓 우상에게서 보호받기를 구했다. 그는 우상 숭배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증거를 보고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하게도 그의 피가 희생 제물의 피에 혼합된 것이다. 그를 살해한 아들들은 도피했고 아무도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의 신하들도 그러한 오만한 자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그들 자신도 그를 제거하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트릭(Patrick) 주교가 제의하는 바와 같이, 산헤립 왕이 자기 신에게 그 아들들을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맹세했었음이 사실이라면, 그의 자식들의 행위는 그래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들이 아버지를 희생시킨 것은 그들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였다.
💡본장의 마지막 37절은 7절의 예언에 따라 산헤립이 죽음을 당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본문은 ‘와에히' 즉 ‘그리고 ~이 발생하였다' 란 새로운 내용의 서술을 시작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본문에서 ‘와예히'는 지금까지 너무나 교만하였으며 왕성하게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던 산헤립의 비참한 말로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니스록
본문에 등장하는 ’니스록' 은 앗수르의 주요 우상이나 학자들은 이것이 독수리 머리를 한 날개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형상은 앗수르의 비문에 많은 수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사람 머리를 한 황소나 사자와 같은 신화적 동물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싸우는 모습에서 ‘니스록' 은 항상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니스록' 은 전쟁의 신이면서 동시에 앗수르의 최고의 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문에서 저자는 산헤립의 죽음을 — 니스록을 경배하는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산헤립이 앞서 열방의 신과 함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동류로 취급한 것을 상기시켜 준다. 즉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강요하던서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가 멸한 다른 나라의 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조소한 바 있다(9-13절). 그러나 이런 교만한 말을 내뱉은 산헤립은 그 이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군대가 궤멸되는 비극을 당하였고, 궁극적으로 왕궁이 있는 니느웨 성에서, 그것도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경배를 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방신들과 구별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부각시켜 준다. 동시에 니스록이 산헤립을 결코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라 산헤립이 섬기는 니스록이 이방의 신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전달해 준다.
본절은 계속적 ‘와우'로 시작하여 앞선 36절에 나오는 바 산헤립이 니느웨로 퇴각한 후 곧바로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하였고 거기서 죽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산헤립은 B.C. 681년에 죽었다.
이는 히스기야가 죽은 B.C. 687년으로부터 5년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이다. 따라서 산헤립이 정복 사업 실패 후 고국에 돌아가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왕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다른 언급없이 산헤립의 퇴각과 니스록 묘의 경배와 죽음을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7절에 나오는 바 산헤립의 퇴각과 죽음에 대한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아무런 장애없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산헤립은 그 아들들에 의해 암살 당함.
산헤립의 암살자로 언급된 ‘아드람멜렉' 과 ‘사레셀'은 산헤립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에살핫돈'과 마찬가지로 산헤립의 아들들이다. 앗수르 비문에 의하면,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아버지인 산헤립을 죽였으나 에살핫돈에게 패하여 아르메니아의 황무한 고원 지대였던 ‘아라랏' 지방으로 도망하였다.
‘아드람멜렉' : 동부 수리아의 사브라임에 해당하는 ‘쎄파르바임' 지방의 신으로, B.C. 722년 이후에 사마리아 지방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섬긴 신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17:31).
이처럼 신의 이름은 당시 왕의 자손이나 고위 계층의 자손에게 붙여졌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신의 가호를 바라는 부모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기도 하고, 이름 자체에 고귀함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다.
산헤립의 계승자는 다른 한 아들 에살하돈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같이 자기의 정복지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복지들을 잘 활용할 생각을 가졌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17:24),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앗수르의 식민들을 사마리에 이주하도록 한 것이었다. 에스라 4장 2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리로 데려온 자는 에살하돈이다" 라고 말한다고 했다.
💡 본장의 마지막 구절인 본절은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대로 산헤럽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해 비참한 죽옴을 맞이하고, 그의 뒤를 이어 ‘에살핫돈' 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음을 보도한다.
에살탓돈(B.C. 681-669년)은 산헤립의 아들로 아버지를 암살한 자신의 형제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을 내쫓고 왕이 된 인물이다. 그는 선왕이 파괴한 바벨론의 시가지를 재건한 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통치를 통해 앗수르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은 열왕기에 거듭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의 즉위 기사와 유사하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앗수르가 비록 이방 족속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섭리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왕권을 이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라고 풀어된다
💡 19절 결론,
이상 18장과 본장은 앗수르의 침공과 관련하여 히스기야와 남유다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심각한 열세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앗수르 왕의 오만하고 신성모독적인 편지를 받고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개입을 구한다.
이같은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고 강권적인 개입을 통해 남유다를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신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진심어린 기도가 응답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의 결과였다.
따라서 본장은 본서의 일차 독자였던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즉 비록 당장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강제 유배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강력한 앗수르를 물리치시고 히스기야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자신들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