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6월 8일 목요일 왕하23:24-27 요시야의 나머지 개혁

Jeehyun 2023. 6. 9. 09:45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12, 시편 97, 98, 이사야 40, 요한계시록 10

묵상구절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24-25절 매튜헨리/옥스퍼드

6.신접한 자들과 마술사들은 축출당했다(24절).

아마 요시야는 마술에 걸린 자들도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마귀 같은 행실을 좇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그가 최근에 발견한 "그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 (24절)에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행한 것이다. 그는 그 율법을 자기 통치의 법으로 삼았고, 이 개혁을 완수하는 데도 그 율법을 유념했다.

💡 21-23절이 요시야 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유월절의 준수에 대한 기록이라면, 24절과 25절은 요시야의 중교 개혁 전반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지금까지는 요시야 왕이 산당과 성전의 개혁과 같은 제도화된 대규모의 종교 개혁을 단행한 사실을 보도하였다면 본절은 각 개인과 각 가정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미신과 우상까지 다 제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신접한 자:
이들은 주술로 죽은 자의 영흔을 불러내 미래의 길흉이나 의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운명과 미래의 길흉을 묻기 위헤 그들에게 나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삼상 28:7에는 이스라엘 왕 사울 조차도 ‘엔들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실례가 나온다. 이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신 18:11-14은 이러한 자들을 이스라엘 내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고 엄격하게 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이미 선민 공동체의 순수한 여호와 신앙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각 개인과 가정에 신접한 자가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점쟁이, 드라빔 점쟁이:
미래의 일을 아는 에지의 능력을 갖춘 '예지자’, ‘예언자’. 이 역시 고대 근동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등장한 악령의 영향하에 있는 자. 드라빔: ‘치료자’, ‘고치는 것’. 그러나 이는 대부분 고대 근동 에서 각 가정마다 섬기던 ‘가족 수호신들(household gods) '을 가리키는 데 사용. 이러한 드라빔은 점을 치는 데 사용되기도 했는데(삼상 15:23; 겔 21:21) 족장 시대로부터 사사 시대나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고 포로 귀환 이후에는 가정에서도 숭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슥10:2)

우상: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입된 각종 우상들.

가증한 것:
우상숭배의 거짓된 풍습과 관련된 각종 기구들
이를 ‘가증한 것'으로 표현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에는 이미 이것들을 바라보는 신앙적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요시야는 산당과 성전의 개혁과 거짓 제사장들의 숙정 뿐 아니라 이처럼 고질화되어 민간에 깊어 뿌리박고 있는 거짓된 미신들을 박멸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였다.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서야가 어떻게 지속적이고도 정열적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줌. ‘이루려’ : ‘일으키려고’, ‘견고히 세우려고’ ⇒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히 세우기 위하여 지금의 본문에 소개된 바와 같은 종교개혁을 구체적으로 단행하였던 것.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 — 요시야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책’ = ‘성경’ ⇒ 요시야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구절 하나하나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것.

기록된 : (수동형)
여기서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물론 인간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염두에 둔 표현이지만, 히브리인의 사고에 있어서 율법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볼 때 여기에는 하나님에 의하여 쓰여진 율법의 말씀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요시야는 하나님에 의하여 기록된 율법의 조항들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종교 개혁을 부단히 단행했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바른 하나님 말씀을 견고히 세우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그의 개혁 작업은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표현을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즉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 이란 장황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이면에는 ‘그릇된 말씀도 있다'는 암시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산당 예배가 자행되고 혼합주의적 신앙 행태가 범람하게 된 데에는 잘못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 자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내세웠던 것은 잘못된 신앙 관행이나 그릇 기록된 문서일 것이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요시야가 이와 구별되는 바른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장황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주의 의는 큰 산과 같도다." 곧 분명하고, 확실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하오나 "주의 공의는 깊은 바다와 같도다." 곧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시 36:6). 우리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리요!

💡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평가 기준은
→ ‘모세의 모든 율범'에 대한 준행 여부.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 대해 본서 저자는 요시야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였고 그와 같은 자가 전무후무하다고 보도한다. 이런 최상급의 평가 문구는, 요시야의 신앙과 개혁 성과의 탁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강조적 표현. 

Ⅰ. 본문에서 보면, 요시야 왕은 다윗 왕조를 이어 받았던 가장 훌륭한 왕들 중의 한 사람임이 인정되고 있다(25절).

  • 히스기야곤경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 있어서는 필적할 자가 없었던 것처럼(18:5),
  • 요시야 왕개혁 사업을 수행하는 그 성실성과 열성에 있어서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그는 그의 선조들이 반역하여 오던 "그 여호와께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사랑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여 돌아가는 것이 참 신앙이다. 그는 나라도 역시 여호와께로 돌아가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2.그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이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일을 행한 이유와 목적이 의로왔다. 마음을 다하여 하지 않는 일은 신앙에 아무 소용이 없다.

3.그는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즉 온 힘을 기울여 용기 있게 결단력을 가지고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인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힘과 마음을 다해 일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성취시킬 수 있으랴!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란 삼중 반복 표현은 요시야가 여호와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있어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음을 강조한다.

즉 이 가운데 하나의 표현만을 사용하여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나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완전과 충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3' 의 개념을 차용하여 요시야의 율법 준행을 향한 일념을 3중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세를 표현하는 공식 문구로서(신6:5.6) 요시야가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세에 있어서도 층일하였음을 강조해 준다. 

4.그가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그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그 율법에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성을 낸다하여 결코 어떤 불법적인 일에 말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온 힘을 다하여 규칙대로 행했다.

▶26-27절 매튜헨리/옥스퍼드

Ⅱ. 이와 같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창 시절에 횡사를 했고, 그의 나라는 그 후 2~3년 이내에 멸망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26-27절)

이와 같은 개혁에 따를 당연한 결과로는 왕조와 왕국에 번영과 영광인 것이 틀림없다고 흔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그 양쪽에 모두 구름이 뒤덮인 것을 보게 된다.

1.나라가 개혁되었지만 여전히 계속 멸망으로 운명지어졌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26절).

하나님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서(렘 28:7, 8), 만약 멸망으로 예정된 어떤 민족이 그 "죄악에서 떠나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형벌하시기로 한 "악을 돌이키시겠다" 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시야 왕 치하의 백성들은 비록 요시야의 권력에는 복종했지만 중심으로는 요시야의 근본 방침에 동화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앞선 24,25절에는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모세 율법을 엄격히 준수한 요시야에 대하여 본서 저자가 내린 극찬이 나온다. 그런데 이에 이어지는 26,27절에는 여호와께서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남유다도 버리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다.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유다를 전멸하시는 이유]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일로 인하여 유다를 향한 진노를 거두시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밝힌다. 이러한 본문의 보도는 멸망하기로 예정된 자일지라도 그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겠다고 약속하신 렘 29:12-14의 내용과 서로 상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문과 렘 29:12-14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는 요시야의 영향과 그의 전후 남유다 왕들 및 백성들의 신앙 노선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요시야 왕 당시에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셨다. 그 기간 동안 남유다는 오히려 형통한 측복을 누릴 수 있었다. 백성들 역시 요시야 생전에는 하나님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 개혁에 동참하는 등 신앙적인 자세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요시야 사후 유다의 왕들은 과거 므낫세의 악한 영향을 받아 다시금 그릇된 신앙 노선을 택하였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으며 백성들 역시도 이에 동조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의 범죄와 그로 대표되는 유다 왕들과 백성들의 고질적인 죄악상과 관련해 스바냐와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들을 통해 남유다에 내리실 심판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므낫세의 죄]

남왕국 제14대 왕이었던 므낫세는 24:3과 렘 15:4에서 우상 숭배와 불의로 인해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심판을 초래한 자로 언급됨.

므낫세의 범죄
단지 므낫세 개인의 범죄에 국한되지 않고 므낫세로 대표되는 남유다 전체가 범한 모든 죄를 총칭하는 표현. 이는 마치 북이스라엘의 죄악과 멸망이 ‘여로보암의 죄' 때문으로 묘사된 것과 같다. 여기서 므낫의 범죄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고 우상 승배를 조장한 행위,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천체 숭배에도 힘을 기울인 행위, 여호와의 성전에 바알의 단을 쌓고 아세라 숭배는 물론이고 천체 숭배를 위한 단을 쌓은 행위, 그리고 자식을 제물로 드리는 몰록 숭배 행위와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한 행위 등을 들 수 있다(21:1-18).
남유다의 악한 왕인 제7대 아달랴 왕이나 제12대 아하스 왕조차도 감히 여호와 성전 안에 아세라 목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므낫세 당시 종교적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므낫세를 정점으로 하여 온 유다는 범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범죄는 공의로우신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당한 멸망과 동일한 징벌이 남유다에게도 선언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들은 억지로 돌아 왔으나, 자발적으로 "악한 길에서 떠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의 우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여호와께는 그 선고를 취소하실 수 없었다. 즉 그 선고는, 이스라엘처럼, 유다도 포로가 될 것이요 예루살렘도 버림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27절).

그러나 이러한 멸망의 본의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죄악이 극도에 달해서 곧 멸망할 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이 최악의 상태에 도달하여 곧 치료를 받아야 할 절박한 순간에 놓여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치료처방은 실효를 거두어 죄악까지도 제거하게 될 것이었다.

 💡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어떤 일이 있은 후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으로 주어진 메시지(여호와의 직접 화법).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남유다에게 내려진 심판이 그들이 자초한 것이며 이에 대한 심판이 여호와에 의하여 엄중하게 집행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원문은 본문을 ‘또한’, ‘심지어’, ‘참으로’ 등 다양한 강조의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로 시작.
⇒ 여기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바로 마음에 새기지 못하므로 이제는 남유다조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한 아쉬움이 드러난다.

‘내 앞에서 물리치며’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로부터 죄를 범한 유다를 떠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 하나님의 얼굴은 정직한 자만이 볼 수 었고(시 11:7; 17:15) 의인에게 향하는 것이며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상징한다(민 6:25,26).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당신의 얼굴에서 떠나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영적•도덕적으로 범죄함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가운데 거하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의 소유자가 될 것임을 나타낸다.

2.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이처럼 유다를 물리치겠다고 선포하신 데 이어 ‘이 성 예루살렘'과 ‘이 전’ 즉 성전까지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 성’ :
원문은 하나님게서 힘주어 지목하시는 의미로 표현됨.

‘이 성’의 목적어는 ‘예루살렘’을 가리킴. 그런데 사실상 이는 앞서 ‘내가 택한 이성'과 동격으로서 밝히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택한 이 성'이 ‘예루살렘'임을 밝히는 것은 →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인하여 평화를 누리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전’ :
이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거듭 강조하신 후에 이제는 그 범위를 더욱 좁혀 ‘이 전' 곧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신다.
여기서 ‘이 전'은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으로 수식받고 있다. 이는 ‘성전에 내 이름을 두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표현으로서 (왕상 8:29; 9:3) 성전의 존재 의의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성전이 더러운 우상 숭배의 소굴이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에 부적합한 장소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성전까지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민의 가장 확실한 증표로 여겨졌던 성전을 버리시겠다고 선포하신 데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에 의해 존재하는데, 하나님이 그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다면 이제 더 이상 이들은 역사 가운데 존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남왕국 유다의 멸망으로 현실화되었다. 

▶옥스퍼드 21-23장 스페셜 포인트 후반 결론부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다옴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므낫세의 아버지인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선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므낫세는 남유다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왕이었다. 즉 므낫세는 부왕 히스기야의 신앙과 경건을 본받지 아니하고 사악한 길로 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비록 그 아비가 선을 행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악만을 행함으로써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히스기야가 선을 행한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악 외에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인간의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인지를 알 수 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거나 그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여 인간 자체에 어떤 희망 을 둔다면 단적으로 인간의 미래는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진정한 소망은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 의를 덧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율법의 기능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요시야는 성전을 보수하던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통하여 이제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옷을 찢으며 통회하였다.

이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첫번째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롬 7:7).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는 것이지만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율법의 중요성을 깨달아 늘 율법을 상고함으로써 우리의 숨겨진 죄까지도 깨닫고 회개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3. 선민의 범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은 자를 통해 소망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면면히 계승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다.

이는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선한 치적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는 항목이다.

특별히 요시야는 31년 간의 치리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쉬임 없이 종교 개혁을 수행해 나가며 남유다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부단히 세우고자 하였다.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가 행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역시도 바로느고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그의 개혁 운동 마지막을 내리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토록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의 이처럼 허무한 죽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그의 사후 남유다는 지속적으로 타락의 내리막 길을 걸어감으로 요시야의 사적은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룩하신 개혁 운동은 남유다로 하여금 이 기간을 통해 다시금 당신 앞으로 돌아같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백성 중 남은 자를 두시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남유다 그 나라 자체는 점점 기울어져 바벨론에 의하여 끝내 파멸당하게 하셨지만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만큼은 간직하고 유지하게끔 하신 것이다.

이들 남은 자들은 비록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수처와 고난을 당헤야 했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회복게 하심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에 따라 그들 흑은 그들의 후손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훼파되고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남유다 열왕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하였고 그 백성들 역시도 왕들의 죄악을 본받아 행악함으로 파멸에 이르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것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와 은혜로 남기신 자들을 통해 구속 역사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실패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쉬엄이 없을 것이며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진행하여 궁극적으로는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사 3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