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18, 누가복음 21, 욥기 36, 고린도후서 6
묵상구절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22: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22: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22: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2: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22: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22: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22: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2: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2: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2: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2: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2: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22: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22: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다윗의 역경 속에 예표된 메시야의 극한 수난과 회복 후의 찬양 선도 -
서론
💡 [1]
제22편은 일차적으로는 원수들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당한 다윗이 그 찔어지는 듯한 영육간의 고통과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 개인 비탄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그러한 개인적인 고통의 토로와 구원의 호소를 통하여 다윗이 에표하는 분으로서 본래 성자 하나님이셨으나 택한 백성들의 대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셔서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 온갖 박해를 받으시다가 급기야는 십자가형까지 받으신 예수 그러스도의 수난을 예언한 메시야 예언시입니다.
메시야 예언시
시편에는 총7편의 메시야 예언시가 나옵니다(2.16,22.24.45.72,110편).
메시야 예언시들로 불리는 이유
- 일차적으로는
- 모두 다윗이나 기타 하나님의 사람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앙의 교감을 노래한 것입니다.
- 그러나 그러한 시들은 궁극적으로는
- 하나님 자신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사람의 원형으로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 성품이나 구속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오묘하고도 함축적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메시야 에언시로 분류됨니다.
본시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칠언 가운데 제4언으로 인용된 1절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가 시사하는 것처럼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실로 처절한 수난과, 이를 초극한 부활 승리를 예언한 것으로,
- 어떤 메시야 예언시보다도 그 예언의 양상이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이라는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특히 본시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도의 처절한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시를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본시는 흔히 ‘십자가의 노래' 흑은 ‘수난의 시'라고 불리며,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로 인하여 ‘새벽 사슴의 노래’ 로 불러기도 함니다. ‘아앨렛샤할' 은 ‘새벽 사슴' 이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 입니다.
💡 [2]
본시 저작 배경
본시의 표제에는 저작 배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 도울 자가 없는 고독한 상태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아 절박한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이 본시 전반부의 주된 내용이란 점에서,
추정
- 다윗이 자신을 살해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때 지었거나
-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그의 통치 말기 최대의 위기였던 압살롬의 반역 사건 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본시에 위기 자체가 강조되어 있기는 하나 고난의 원인과 자신의 죄를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견해가 더 합당한 듯하다.
- 어떤 사람은 본시를 다윗이 중한 질병과 그로 인한 대적들의 발호를 보고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본시는 제69편과 싹을 이루고 었는데, 수난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본시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하다.
본시 분류
그리고 본시는 무고하게 핍박받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비탄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실 본시 전반부인 1-21절은 비탄시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후반부인 22-31절은 구원자 하나님을 향한 찬양시에 가깝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 다윗의 시대로부터 1.000여년 후에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메시야의 수난과 영광을 예언하는 메시야 사상이다.
시편 전체에는 다윗의 저작 네 편을 포함하여(16.22,24,110편) 모두 일곱 편의(2,45,72편) 메시야 예언시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도 본시는 시 전체를 통해 십자가상에서의 처절한 수난과 이를 초극한 부활의 승리를 가장 구체적이며서도 생생하게 노래한다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시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본시에 포함된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떤 인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표현들이 나타난다(Hengstenberg).
→ 즉 본시는
- 저자 다윗의 삶의 정황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지만,
- 다윗의 삶의 경험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표현들이나 상황 묘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 그리고 본시에 포함된 이러한 표현들은 장차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실 수난 체험을 너무나 분명하게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심지어 본시에 사용된 표현들은 메시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내뱉은 말씀들, 그리고 그 당시의 처절한 상황과 놀라울 만큼 자구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
→ 본시가 메시야 예언시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메시야 에언시로 분류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본시를 묵상함으로 독자들은
- 신앙의 용장 다윗을 본받아
-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으며
- 선취적 신앙으로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본시는
- 본시의 저자인 다윗의 고난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독생자이면서도 -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 사단의 세력에 의하여 처절하게 고난을 받으셨으나 - 결국 승리하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구원과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메시야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처절한 수난의 현장을 돌아보게 하고
- 결국 극심한 수난과 죽옴의 세력을 극복하신 그러스도의 구원 사역의 승리에 동참하는 벅찬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다.
●슬픈 원망 (시편 22:1-10)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의 표제, "아얠렛샤할"(Aijeleth Shahar)- 즉 "어린 암사슴"이라는 표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향기로운 산들의 어린 사슴과도 같이 날렵했고(아 8:14).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사랑스런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 같았다(잠 5:19). 그는 "놓인 암사슴"에 비유된 납달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창 49:21). 그는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있는 어린 암사슴이다(16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이 시편의 곡조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물러가심을 슬프게 원망함(1,2절).
💡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의 하나님’
‘엘리’ = ‘엘로힘’ 하나님의 축약형+’나의’
- 구약 성경에서 ‘엘리'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 그분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 표현.
- 그만큼 본문의 ‘엘리' 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 하나님을 가깝고 친근하게 느꺼게 하는 표현인 것.
특히 선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러한 하나님의 신명을 더욱 절실하게 불렀는데
- 그것은 ‘엘’ 의 완전한 표기로 이해되는 ‘엘로힘' 이 하나님의 강하고 능하신 힘, 곧 그분의 전능하심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 신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본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라고 거듭하여 부르는 것은
⇒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
⇒ 크신 권능으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호소를 함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 시인의 당혹스러움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즉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자신의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 도리어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린 듯한 현실로 인해 어찌할 바 몰라 부르짖는 시인의 당혹스런 심경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강한 위기 상황,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사 가운데서도 시인은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말을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이를 하나님을 더 강하게 붙드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시인의 신앙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1.이것은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밤낮으로 그를 계속 부르고 그의 은혜로운 응답을 진정으로 갈구했지만 응답도 도움도 받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서 진심으로 위로를 호소하는,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처럼 하나님의 불유쾌하심에 눌려 그 밑에서 신음하고 그가 은총의 표적을 나타내시기를 원하는 다윗이나 하나님의 어떤 자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1)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는 성도들에게 가장 쓰라린 환난이 된다.
하나님의 증거가 가리워지고 거룩한 위로가 의심스러워지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당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자기들을 사로 잡을 때, 사람들의 영은 얼마나 슬프며 그들의 모든 위로는 얼마나 위축되겠는가!
(2) 이러한 괴로움을 원망하는 것까지도 영적 생활과 영적 사려의 시련을 나타내는 좋은 표시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내가 아픕니까? 어찌하여 내가 궁핍합니까?” 하고 부르짖는 것은 불만과 속된 마음을 의심해보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그 행복을 두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언어이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러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정도의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첫째는, ‘어찌’ 라는 의문사에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지금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 왜 자신을 구원해주시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다.물론 이러한 의구심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의구심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즉 시인은 세상의 여러 가지 고난에 부딪힐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권능만 믿어왔는데 그 크신 하나님의 권능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의흑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둘째로 ‘왜 ,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 가운데는 자기 자신의 행사에 대한 회고와 돌아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이러한 부르짖음을 내뱉으면서 시인은 분명 하나님께 버림받을 만한 어떤 죄나 허물이 자신에게 었는지를 돌아봤을 것이다.
- 그러나 자기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러설 만한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들의 압박과 학대에 내놓으신 것에 대해 시언은 납득할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로 인해 본문에서와 같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고 었는 것어다.
- 셋째, 시인의 이 탄식은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자의 절규를 들어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 이를 증명하는 것이 서두에서 거듭 말하고 있는 ‘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내 하나님'이란 표현에는 시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도 있다.
- 즉 전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 자신의 운명까지도 내맡긴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외시키시는 듯한 이러한 현실은 고통 속에서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시적 현상일 뿐,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멀리하여'라는 말은
- 하나님께서 영 사라져 버리심으로 자신과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거나 존재하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시면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외면하시는듯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외에 도울 자 없는 시인은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본절 이하 21절에 이르기까지 애절하게 자신의 사정을 고하고 간구하는 시인의 부르짖음은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따라서 본문의 이러한 상황은
⇒ 다윗에게 있어 신앙적 분발의 의지를 더욱 일깨우는 각성제가 되고 있다.
- 그래서 시인은 절망스러운 만큼,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의미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역설적 소망이 함축된 표현인 것.
다윗에게 있어 진정 큰 고통은..
신음 소리를 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듣지 않옴에서 오는 영적 고독감.
(3) 우리가 하나님의 물러가심을 탄식할 때에도 우리는 그를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하며, 그를 우리들의 것으로 여기며 요청하기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믿음이 부족할 때 우리는 믿음에 고수하여 살아가야 한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간데,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나를 죽게하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리라. 비록 그가 내게 즉시 응답하지 않으실 지라도 나는 계속 기도하고 기다리리라. 비록 그가 잠잠하시더라도 나는 잠잠치 않으리라."
2.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도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첫 원망의 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토로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마 27:46).
아마도 그는 이 다음 구절들도 계속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의 의견대로 소리내어 크게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왜냐하면 그들이 이 첫 번째 말을 트집잡았기 때문이다)속으로는 이 시편 전체를 반복하셨을 것이다.
💡 다윗의 애절한 외침인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는 -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으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의 원래 형태이다(마 27:46).
- 마태는 이를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합쳐진 표현으로 기술하였지만 본래 히브리어 형태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인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처셨던 가상칠언 가운데 네번째 외침인 이 절규는
- 단순히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육체적 고난과,
- 사람들의 조롱과 질시로 인한 - 정신적 고통에서 나온 절규만이 아니라
-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죄인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영적 고통을 호소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천여년 전에 이미 그 그림자로서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고통의 절규를 발하였으며 이를 성경의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본문과 주님의 부르짖음의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 이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이
→ 우연이 아니라
→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에 의해 진행되어 온 사건임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는 그이 고난 중에 그의 아버지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그와 함께 계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셨다. 그는 "낮에도"십자가 상에서 부르짖으셨고, 동산에서 심히 번민하시던 "밤에도" 부르짖으셨다. "그는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을 올렸고"거기에는 일종의 두려움도 또한 섞여 있었다.(히 5:7).
💡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인의 신앙적 인내와 호소
시인의 부르짖음은
- 극한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 하나님과의 만남을 열망하면서,
- 그 만남을 통하여 실제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자 하는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이러한 극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었다.
⇒ 그러므로 시인의 부르짖음은 그의 신앙적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시인은 낮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표현할 뿐 아니라 고요해야 할 시간, 잠들어야 할 시간인 ‘밤' 에조차 잠잠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그의 기도의 사투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나타낸다. 즉 시인은 밤낮없이 하나님을 향혜 계속 부르짖었던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밤에 누구나 취하는 쉼조차 취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르짖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밤낮없는, 쉼없는 기도의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만 봐도
- 그가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심각하고 혹독한 것인지,
- 또 그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처절한 기도
이처럼 밤낮없는 기도의 사투 역시도 그리스도의 처절한 기도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준다.
전인류의 죄책과 그 찌꺼기까지 담긴 잔(75:8; 마 26:39)을 마셔야만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홀로 감수하여야만 하는 형편에서, 그리스도는 가능하면 그 잔을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하시기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처절하게 기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면서 처절한 기도의 사투를 벌이셨다.
본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앞두고 또 수난을 당하시면서 밤낮없이 계속하여 부르짖었던 처절한 기도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예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고 그를 도우시기는커녕 그의 기도도 듣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가 어떠한 그의 고난보다도 더욱 원망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대적들의 손에 넘기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육신적인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한 그의 진노와 불쾌하심을 그에게 부과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사 53:10).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그의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굳게 지키셨다. 즉 그는 하나님께 고용되어 그를 섬기셨으며, 곧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실 것이었다.
Ⅱ. 그 원망에 대한 격려(3-5절).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그를 돕지 않으셨지만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1. 그는 하나님에 대해 선하게 생각할 것이다.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어떠한 시여도 불의하거나 거짓되거나 잔인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의 환난당하는 백성들에게 즉시 위로를 주시지 않을지라도 주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진실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합 1:13).
그리고 주께서는 무한히 정결하시고 의로우시므로 주의 의로운 백성들의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주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나이다.
주는 주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시기를 즐기시며 주의 백성들이 찬송을 올리고 있는 성소에 특별히 임재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즐기십니다.
여기에서 주는 항상 그들의 경의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회중이 모이는 성소에 대해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성스런 숭배자들에 대한 그의 놀라우신 겸양을 나타내고 있다-(즉 하나님은 천사들의 찬송으로 섬김을 받으실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기를 즐기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모든 원망 속에서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라는 말은
-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텍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그 구원을 자신에게도 베풀어 주셔서
- 자신 역시도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도록 해달라는 의미.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육와 전혀 관련이 없으신 분이라는 의미.
-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노래하는 것은 죄틀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히는 죄인들을 진멸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 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 따라서 이 역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대한 찬양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구하는 애절한 호소가 내포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귀를 막고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는 그의 백성들의 찬송을 매우 즐거워하시므로 합당한 때에 그들에게 그들의 음성을 변화시킬 기회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우리 주 예수는 그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주시하여 그것에 대한 경의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려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거룩한 것들이 허물 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그의 은혜의 거룩함의 주시하셨다.
2. 그는 전 세대에 성도들이 믿음과 기도로써 유익을 얻었던 그 경험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것이다(4,5절).
"우리 열조가 주께 부르짖어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합당한 때에 나를 건지실 것입니다. 주께 소망을 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했고 주를 구한 자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한결 같으시며 예전에 주의 백성들에게 대해 주셨던 것과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었으며 주의 백성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롬 1:28)."
언약의 유업은 믿음의 후손들을 돕기 위해 마련되어 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셨던 자가 우리의 하나님이심에 틀림 없으므로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그의 고난 가운데 이러한 사실-즉 고난을 당하신 그의 모형이 되는 모든 조상들, 노아, 요셉, 다윗, 요나 등은 합당한 때에 구원되었고, 또한 그의 들리우심의 모형이 된 사실로써 스스로를 격려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아셨다(사 50:7).
💡 시인이 이렇듯 자신의 조상들 즉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은
- 시인이 고통을 겪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의 문제들 때문이다.
- 즉 시인은 현재 당하고 있는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의 조상들이 혹독한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는지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과거사 회상은
-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며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풀 수 있는 거울로 삼기 위한 것이다.
⇒ 즉 과거 조상들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지금 시인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 현재화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 과거 조상들은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혼들림 없이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 그것을 나타내주는 말이 바로 ‘의뢰하였고' 이다.
- 조상들의 이러한 확고 부동한 믿음에 대한 회상은
- 시인 자신도 조상들의 믿음을 따라서,
- 지금의 극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 결코 흔들림 없이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
- 또한 이러한 시인의 결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있는데,
= 그것은 곧 조상들이 그 확고 부동한 믿음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시인은 ‘건지셨나이다' 라는 말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해 준다.
- ‘건짐’ =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자가 받는 결과적 축복
⇒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간절한 소망과 확신을 표현한다.
💡 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응답에 대한 믿음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시인이 혹독한 고난 중에서도 그 시야가 현재 봉착한 고난에만 매여 있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혹독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과거 조상돌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역사와 신실한 응답의 역사를 회상하는 통시적인 안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고난에 봉착하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현실의 고난에만 매여,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의 축복의 역사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도가 역사성 있는 신앙적 안목을 소유하게 되면
혹독한 고난에 직면해서도 과거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래 하나님이 베푸실 응답과 최종적 승리를 믿음으로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본시의 저자인 다윗은 혹독한 시련 중에서 하나님을 향해 밤낮으로 부르짖었으며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과 같은 현실 속에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하였지만 본시 말미에서 자신의 회복을 확신하고 회중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본절에서 언급된 신앙 역사에 대한 통시적 안목에 근거한 선취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Ⅲ. 또 다른 근심으로 야기된 원망.
그것은 사람들의 경멸과 조롱이었다.
이 원망은 이전에 그가 하나님께서 물러가셨을 때 원망하던 것처럼 그렇게 비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은혜로운 영혼을 건드린 것처럼 그렇게 비통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매우 상하기 쉬운 고결한 영혼을 건드리고 있다(6-8절).
우리 조상들은 영화롭게 되었었다.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 당대의 초기, 또는 말기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위대하게 나타났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한 단계 내려섰다는 것으로 큰 겸양이었으며, 그것은 천사들의 경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이 되시는 것이 너무 과분하고 큰일인 것처럼 그는 사람이 아닌 벌레가 되고 있다.
- 그는 "아담"-즉 "더러운 사람"이었고, "에노스-즉"슬픈 사람"이었으며, "로 이쉬"-즉 "보잘 것없는 사람"이었다.
- 그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던"것이다(사 52:14). 사람은 고작해야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그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그 자신을 벌레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그처럼 짓밟히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단어는 주홍이나 자색을 물들이기 위해 사용되었던 벌레를 의미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피흘리는 고난을 언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어떤 굴욕을 당하셨는가를 보자.
- 그는 악인으로서, 불경스러운 자, 안식일을 범한 자, 음주가, 거짓된 선지자, 가이사의 대적으로서, 그리고 마귀들의 왕과 동맹한 자로서 비방당했다.
- 그는 천하고 경멸할 만한 자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는 자로서, 그의 나라에서 명성이 없으며 초라한 목수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닌 어중이떠중이들을 추종자로 갖고 있는 자로서 멸시당했다.
- 그는 어리석은 자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속이는 자로서 조롱 당했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을 본 자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염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몰락을 비난하는 무례한 온갖 몸짓과 표현을 다함으로써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그를 향해 입을 비죽거렸고 그를 희롱했으며, 그의 고난을 조롱했다. "저희가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이 사람이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실 것을 신뢰한다"고 말한 자이니"이제 구원하실걸 하나이다." (마27:39; 막15:29)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인해 때로 빈정거림을 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서 이것은 정말 글자 그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바로 이러한 동작들이 그를 모욕하던 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마 27:39). 즉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의는 그들이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43절)이라는 바로 그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스스로 잊게 했다. 우리 주 예수는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께 행했던 영예롭지 못한 일을 대속하려 하셨을 때, 가장 비참한 모욕과 수치에 굴복하심으로써 그것을 행하셨다.
💡무지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천사들도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하는 그분께 같은 사람에게조차 하지 않는 참람하고 모독적인 행동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그토록 참람한 자들의 극심한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을 인내하심으로 다 감당하셨다(마 27:29; 히 5:8, 9).
그리하여 죄 인된 우리의 구속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Ⅳ. 이 원망에 대한 격려(9,10절).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나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 다윗과 그 밖의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저희 열조의 하나님(4절)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자마자 곧 그들을 돌보기 시작한 그들의 요람시대의 하나님이셨으므로 그가 결코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소망으로써 흔히 그들 자신을 격려했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 주고 있다. 도움 없고 무력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위해 매우 은혜롭게 행하셨던 하나님, 우리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일으켜 세우시고 키워주셨을 때 우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일찍부터 우리를 돌보시는 것을 보라.
1. 출생 때.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거기서 죽었거나 태어나는 도중 질색했을 것이다. 일반적 시간이 하나님 존재의 함축성 있는 증거, 즉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의 풍요한 증거와 더불어 시작한다.
2. 품 속에 있을 때.
"주께서 나를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즉,
"주께서 내게 영양을 공급해 주시고 내가 당하게 될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심으로써 그렇게 의지하게 해 주셨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주께 의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모친의 젖을 먹을 때의 축복은 태의 축복에 대한 유종의 미인 동시에 우리 일평생의 축복에 대한 전조이다. 그때에 우리로 젖을 먹게 했던 그가 결코 우리를 굶어 죽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욥 3:12).
3. 우리가 일찍이 그에게 헌신되어졌을 때.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나이다."
아마도 이것은 팔일째의 할례를 언급하는 말일 것이다. 그때 그는 그의 부모에 의해 그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께 맡겨졌고 바쳐졌던 것이다. 할례는 언약의 날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매우 일찍부터, 매우 엄숙하게 "하나님의 위엄의 날개 아래 모여든" 자들은 그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다.
4. 우리가 우리에게 언제나 꾸준히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보존시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체험을 얻을 때.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즉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오늘날까지. 내게 유익한 것을 공급하시고 나를 돌아 보신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성(理性)을 활용할 능력이 생기자마자 하나님을 신뢰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길을 그에게 맡겼다면, 우리는 그가 항상"우리 소년 때의 우의와 우리 결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시리라는 (렘 2:2) 사실 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 적용될 수 있다. 즉 그가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시고, 곧 헤롯의 악으로 인해 애굽으로 도망하셔야 했을 때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성육신과 탄생을 특별히 돌보셨던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 내셨다"(호 11:1).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고난 중에 있는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방했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위축시키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격려하셨던 것이다.
●메시야의 고난 (시편 22:11-21)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기도를 읽을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고난을 내다보게 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도록 지시하고 있다.
Ⅰ. 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다.
다윗은 실재로 자주 환난을 당했고 대적들의 공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여기에 열거된 여러 가지 세부적 상황은 결코 다윗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깊이 굴욕 당하신 그리스도께 적용되어야 한다.
1. 그는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다.
"환난"과 고통이 "가깝고" "도울자," 격려해 줄 자"없나이다"(11절). 그는 혼자 포도주 틀을 밟았다. 그의 모든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했던 것이다. 모든 도움과 구조가 끊어졌을 때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예이다.
2. 그는 여기에서 그의 대적들에 의해 모욕당하고 포위당하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힘과 광포는 살찌고 포식하는 오만하고 심술궂은 황소, 즉 "바신의 힘센 소"에 비유되고 있다(12절).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더럽고 게걸스런 개의 비유되고 있는데(16절), 그들은 그를 쓰러뜨리기에 지칠 줄 몰랐다.
그를 칠 계교를 꾸미는 악한 무리가 있었다(16절). 대제사장들이 회당에 앉아 그리스도를 잡을 방법과 수단을 의논했던 것이다. 이 대적들은 무수했고 또 혼연일치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헤롯과 빌라도처럼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타산을 지닌 자들이 나를 에워싸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계획을 많이 수행했으며, 이제는 그들의 목표를 획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둘렀기" 때문입니다.(12절).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16절). 그들은 거대하고 위협적입니다.(13절). 그들이 내게 그 입을 벌려, 나를 삼키려 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으르렁대며 먹이를 찾아 다니는 사자가 먹이를 덮치는 것과 같은 큰 힘과 맹렬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3. 그는 여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
그의 죽음의 특별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사용되지 있지 않다. "악한 무리가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절).
그의 수족은 저주받은 나눔에 못박혔으며 온몸도 거기에 매달렸었다. 그 결과 그는 가장 격렬한 고통과 고문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구약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이처럼 철저하게 타락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뛰어난 예언으로서 분명히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4. 그는 여기에서 죽어가고 있다(14,15절).
고통과 번민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가 고통을 초래하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번민 속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그의 상태를 살펴보자.
(1) 그의 몸의 골격이 용해되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나이다." 그는 물같이 연약하셨으며 인상의 모든 도움들을 버리고 사망의 권세에 굴복하셨다.
(2) 그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않도록 주의가 기울여졌으나(요 19:36) 그의 몸을 고문대 위에서처럼 십자가 위에 우악스럽게 펴서 박았기 때문에 모든 뼈마디가 어긋났다. 또는 이것은 그가 동산에 있었을 때 그를 번민 속에 사로잡은 두려움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에 그는 몹시 번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큰 두려움을 느낄 때 그러하듯이, 단 5:6),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쳤을 것이다. 그의 뼈는 하나님께 전부 다시 만들어 주셔야 할 정도로 어그러졌었다. 그 마디를 어그러지게 한 것은 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그러진 뼈도 다시 맞추어 주실 것이다.
(3) 그의 마음은 녹았다.
"그의 마음은 촛밀 같아서"그가 대속하고자 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영향을 받자 녹아버렸다. 죽어가는 사람의 기력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대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또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욥은 그의 내적인 고통에 대해 언급할 때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욥 23:16; 시 58:2 참조).
(4) 그의 자연적인 힘이 쇠하였다.
"내 힘이 말랐다."그의 마음에 스며든 거룩한 진노의 불에 의해 근본적인 습기가 소모되었으므로 그는 질그릇 조각같이 바싹 타버리고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그때에 누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혹은 누가 그것의 능력을 알겠는가? 푸른 나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물며 마른 나무는 어떠하겠는가?"
(5) 그의 입은 찐득였는데 이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일반적인 증세이다.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갈증과(요 19:28) 고난 가운데에서의 그의 침묵 때문이었다. "그는 털깍는 자 앞에 선 양이 잠잠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고"뿐만 아니라 그에게 행해진 어떤 일도 거역하지 않았던 것이다.
(6) 그의 기운이 다 하였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나는 이제 막 음부로 떨어지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생명을 박탈당했다. 그러므로 그 제물의 생명은 그것을 위한 속죄의 대가임에 틀림 없다. 아담에게 내려진 죽음의 형벌은 "너를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표현 되었다. 따라서 그 형벌을 지켜 죽음에 복종한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와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5. 그는 벗김을 당했다.
발가벗을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옷을 빼앗기셨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그의 의의 옷으로 입히시어 우리의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그의 몸이 이처럼 벗겨졌을 때 그것은 어떻게 보였는가?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17절). 그의 축복된 몸은 그의 모든 사역의 과정 동안에 수고와 슬픔과 금식으로 인해 여위고 쇠약해졌다. 그것은 그가 불과 33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에, 우리가 요한복음 8장 57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로 하여금 거의 50세가 다 되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주름살이 그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불리우기에는 아주 거리가 먼 자라는 것을 해석된다. 그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그의 갈빗대를 세기 쉬웠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나이다." 즉 그의 뼈가 뒤틀리고 그것을 덮을 살이 없어"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욥 16:8)라고 말한 욥과 같았으므로 그들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또는 "구경꾼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의 뼈가 이처럼 튀어나온 것을 보고 놀라나이다. 그리고 나를 동정하기는커녕 이처럼 불쌍한 광경을 보고서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2) 그들이 그에게서 취한 옷으로 어떻게 했는가?(18절)
"저희가" 각 군병들이 몫으로 "내 겉옷을 나누며"호지 아니한 옷이라고 "제비뽑나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은 정확히 이행되었다(요 19:23, 24).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뚜렷한 일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서 성경이 실행된 훌륭한 일례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기록되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에 따라 수난을 당하셨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그를 참된 메시야로 여기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고, 그를 제일가는 친구로 여겨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불붙이도록 하자.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고난을 당하셨지 않은가!
Ⅱ. 여기에 그리스도의 기도가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그의 고난으로 인한 괴로움 가운데서 그 자신의 힘을 북돋우고 있다. 그리스도는 번민 가운데 그 잔이 그에게서 옮겨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이 세상의 왕이 위협적으로 그를 공격하고 "입을 벌림이 부르짖는 사자" 같았을 때, 그는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다윗의 기도는 이것에 대한 모형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힘"이라 부르고 있다(19절).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노래로서 즐거워할 수 없을지라도 그를 우리의 힘으로서 의지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영적인 기쁨에 도달할 수 없을 때라도 영적인 힘에서 오는 위로를 취하도록 하자.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마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는 멀리하지 마옵소서"(11절).
그리고 이것을 다시 19절에서 반복하고 있다. "누가 나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주께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빨리 하나님 가까이로 나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우리 가까이에 오시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서둘러 도우시고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도록 도우시어 그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되도록, 그가 그의 사업에서 물러나거나 주저앉지 않게 되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를 들으셨고"(히 5:7) 그로 하여금 그의 사업을 완성할 수 있게 하셨다.
3.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시고 구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20,21절).
(1) 그가 돌보고 있는 보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 "나의 사랑하는 영혼을 안전케 하시고 그것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리로다(49:15).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오니 낙원으로 안전하게 옮겨 주소서."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그의 영혼을 그의 "사랑," (단어 그대로) 그의"유일한 것"이라 부르고 있다. "내 영혼은 내 유일한 것이옵니다. 내가 돌볼 영혼은 오직 유일하오니 내가 그것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매우 큰 수치이며, 그것을 파멸케 한다면 그 손실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나는 그 영혼의 영원한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영혼을 모든 해로부터 보호하고 그것을 위한 필수품을 모두 공급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의 행복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나의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2) 그가 건져지기를 간구하는 위험은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라. 그것은 "칼에서," 어느 곳에서나 휘둘러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화염검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그를 두렵게 했다(창 3:24).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손에 놓여진 쓴잔 속의 쓸개즙과도 같았다. "그것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여호와여, 비록 내 생명은 잃을지라도 주의 사랑은 잃지 않게 하옵소서. 나를 개의 세력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 이것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던 그 사탄을 여자의 후손이 치열한 격투를 벌여야 했고 또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 세상 임금을 (요 14:30)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여호와여, 내가 그의 협박에 압도되지 않도록 구원하소서." 그는, 주께서 이전에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즉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에게서 나를 구하셨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의 시험을 이기시어 얻은 승리를(마 4장)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마귀는 얼마 동안 그를 떠나 있었으나(눅 4:13) 이제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와 무섭게 그를 공격해 온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그 때에 내가 승리하게 하셨사오니 이제도 내가 주권과 권세를 잡고 세상 임금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들소 뿔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우리가 시달리지 않게 해 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자의 입에서 구해져 찢기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도록 하자. 건지셨던 자가 건지시며 또 건지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물론 응락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항상 그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아버지께서 사망에서 그를 건지시지는 않았을지도 사흘 만에 그를 죽음의 티끌에서 일으키셨는데, 이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도우시는 것보다 더욱 큰 은총의 일례였다.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셨다면 그것은 그의 사업을 방해했었을 것이나 그의 부활은 그것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노래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영혼 속에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의 동참을 체험해야 한다.
●메시야의 승리 (시편 22:22-31)
스스로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원망으로 시작된 이 시편은 여기에서 개가와 함께 끝나고 있다. 이러한 개가는 어느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다. 원망을 표한 첫 마디의 말이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개가를 나타낸 이 첫 번째 말도 특별히 그에게 적용되고 있으며(히 2:12) 그 자신의 말이 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라." 그리스도 앞에 놓여진 기쁨에 대한 확실한 전망은 그의 기도에 대한 만족스런 응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원망을 찬미로 변하게 했다. 그는 영혼의 진통을 보았으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다 이루어졌다"라는 승리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매우 만족하셨다.
여기에서 고난 중에 그리스도께서 만족히 여기시고 개가를 부르셨던 다섯 가지 전망이 언급되어 있다.
Ⅰ. 그는 세상에서 교회를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영원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 그에게 모여들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서 암시되어 있다.
즉 그가 "그 씨를 보게"될 것이다(사 53:10). 다음과 같은 사실은 그를 기쁘게 했다.
-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됨으로써 명확하고 흠없는 영원한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에게 모여들 것이며 그에 의해 하나님께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역자들은 이 교리를 세상에 알리기에 힘 쓸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사신이고 음성이므로 그들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곧 그의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그의 것이고 그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 이처럼 부름 받은 자들은 그의 형제로서 그와 매우 가깝고 귀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크게 기뻐하신다. 즉 믿는 유대인들이나 그의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같은 몸에서 나서 같은 후사가 된 이방인들도 또한 기뻐하신다(히 12:11).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형으로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마련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그에게로 향하고 우리가 기꺼이 그의 다스림을 받고자 하기를 기대하신다. - 이러한 그의 형제들은 회중에, 큰 회중에 연합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전 세계적인 교회, 그로부터 임명된 전체적인 가족이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시고" 그들은 그 안에서 통일 된다(요 11:52; 엡 1:10). 그리고 그들은 좀 더 작은 모임으로 그 큰 집단의 일원으로 거룩한 예배를 위한 많은 경건한 집회로 나누어질 것이며, 그 위에 기독교의 얼굴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그의 세력이 북돋아지고 증진될 것이다. - 이들은 야곱과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간주될 것이다(23절). 그리고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들 위에 아브라함의 복이 미치고(갈 3:14), 그들에게는 "골육의 이스라엘"에게와 마찬가지로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예배가 주어질 것이다(롬 9:4; 히 8:10). 복음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불리우고 있다(갈 6:16).
Ⅱ. 하나님은 그 교회로써 그를 크게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모든 일을 이루어 좋은 것이었다.(요 17:4). 특히 고난 가운데서 그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하고 엄숙히 요청하셨다(요 12:27, 28). 그는 기쁘게 다음과 같은 것을 예견하셨다.
-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여들 교회에 의해 영광 받으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찬송을 위해"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 모여들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형제들에게 선포하실 것이며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대한 회중의 대변자로서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찬미되도록 할 것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송할 것이며(23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118:2-4; 135:19, 20 참조). 그리스도인의 일은, 특히 그들의 엄숙한 종교적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존귀에 대한 거룩한 경외감을 갖고 그를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요구되는 자들은 그를 두려워하도록 권고되고 있다.
- 하나님은 구속주와 그의 사업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집회의 주인이시며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찬송의 중보자이실 뿐만 아니라 교회 찬송의 핵심이시기 때문이다(엡 3:21). 우리의 모든 찬송은 구속 사업에 집중되어야 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크게 감사해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때로 그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 안에서 아버지께 인정받으셨다(24절). " 그는 곤고한 자(즉 고난 당하는 구속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 그것을 충분한 속죄로서,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려는 귀한 문제로서 은혜롭게 용납하셨다. 비록 그것이 우리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그는 우리를 위해 그것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사울이 자기의 아들이 자기가 대적으로 여긴 다윗을 위해 중재해 주려 했을 때 화를 냈던 것처럼 그의 얼굴을 그리스도로부터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부르짖으셨을 때, 그의 피가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 주셨다. 이것이 우리 기쁨의 핵심이며 또한 우리감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자기의 기도가 멸시되거나 청종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자들도 계속 기도하고 기다린다면 자기들이 구한 것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2) 그는 친히 그의 사업을 계속하시어 그것을 완성시킬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하고 말하신다(25절). 많은 아들들로 하여금 영광에 이르도록 하신 그는 최대한으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며 그 누구도 잃지 않으실 것이다.
Ⅲ. 겸손하고 은혜로운 모든 영혼은 그의 안에서 아주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다(26 절).
그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진실된 모든 믿는 자들은 영원한 위안을 얻으리라는 사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주예수를 위로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축복 가운데, 영적인 축복 가운데 부요케 될 것이다.
주린 자는 선한 것들로 배부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물이 용납되었으므로 성도들은 율법 아래서 화목제를 즐기는 것 같이 그 제물을 먹고 즐길 것이며, 또한 재단에 참여할 것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생명의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열망으로써 채워질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기질과 형편을 알고 있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의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그들을 배불리고 편하게 하기 위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며, 그들이 일을 행했을 때 그이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기도를 많이 한 자들은 감사도 많이 할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를 구하는 동안일지라도 그 소망에 의해 그리스도를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구하는 마음이 진지할수록 그들은 그를 발견했을 때 더욱 그를 찬송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에게 바쳐진 영혼은 그와 함께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너희 마음은 온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배부르며 꾸준히 하나님을 구한다. 따라서 너희 육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너희가 지니고 있는 은혜와 위로는 영생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말씀하셨으니(요 14:19) 그 생명은 그의 것이 있는 한 확실히 계속될 것이다."
Ⅳ.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모든 구석까지 미칠 것이며 모든 종류의 백성들을 취할 것이다.
1.그것을 멀리까지 미칠 것이다(27,28절). 즉 유대인들만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이 되어 왔었지만 이제는 땅의 모든 끝이 교회로 돌아오며, 간막이가 무너짐에 따라 이방인들도 들어 올 것이다. 여기에 예언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개심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리로다." 신중한 반성은 참된 전향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며 훌륭한 걸음이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돌아서야 한다. 탕아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그의 아버지께 돌아왔던 것이다.
(2) 그리고 나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를 섬기는 무리들과의 교제에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저희가 주 앞에 경배하리니," 이는 "각처에서 하나님께 분향하며 제물을 드림이라"(말 1:11; 사 66:23).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그 앞에서 경배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방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께 경의를 지녀야 하는 좋은 이유는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28절). 그의 나라, 그리고 그의 나라만이 보편적인 군주국이다.
[1] 자연의 왕국은 주 여호와의 것이며 그의 섭리가 열방들을 다스린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그를 경배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자연적 신앙과 그 신앙의 원리와 법칙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나 우리가 배반했던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본래의 충성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돌아가셨다.
[2] 은혜의 왕국은 주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는 중보자로서 열방들을 다스리고 그의 교회의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도록 하자.
2.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지위에 있는 자들을 포괄한 것이다.(29절).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속박당하는 자와 자유로운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된다.
(1) 그리스도는 여러 위대한 자들로부터 경의를 받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즉 권세를 지니고 호화롭게 사는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다" 배불리 먹을 정도로 풍부하게 사는 자들까지도 풍족함과 형통함에 대해 주 하나님을 송축할 것이다.
(2) 또한 초라한 자들도 그의 복음을 받을 것이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진토에 앉아 있는 자(113:7), 생명과 영혼을 거의 함께 지키지 못할 자도"그 앞에 절하리로다." 주 예수는 궁핍한 자의 왕이 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시며(72:12). 그의 보호는 특별히 그들의 충성을 유도한다.
또 이것은 부유하든 가난하든지 간에 죽어가는 모든 자들에 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의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보라. 우리는 판결 받은 대로 진토에 내려가 거기에 곧 우리의 침상을 만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도 살게 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영적이고도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 앞에 절하고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그의 신하와 경배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큰 유익이다. 이것이 진토에 내려갈 때 우리의 행복을 안전케 하는 유일한 길이며 확실한 길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할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구원하실 수 있고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고 그것과 함께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대대로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인류는 대대로 계승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 그리스도는 소멸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 자들로부터 영광을 얻게 되며('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그 앞에 절하리로다," 29절.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절하며 죽어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와 같이"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있다") 또한 새로 일어나는, 그리고 이 세상에 오는 자들로부터 영광을 얻을 것이다(30절). 다음을 관찰하라.
- 그들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기울인다.
"후손이 그에게 봉사할 것이요," 엄숙히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이며 주님으로서 그에게 복종을 고백하고 또한 실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까지 세상에 교회를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대대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사역자들이 계승될 것이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다."즉 다소간에 남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을 봉사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아마도 같은 사람들의 후손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은혜는 혈통으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저희의 후손 'their seed'라 하지 않고 후손 'a seed'라 하고 있다) 극소수가 될지 몰라도 상속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그리스도는 그들을 인정하신다.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로다." 즉 그는 전(前)세대의 사람들에게 대하셨던 것과 같이 후 세대의 그들에게도 대해 주실 것이다. 친구들에 대한 그의 호의는 그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그들과 자손과 계승자들에게 이어질 것이다. 조상들로부터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으로 인정된 후손들에게 이어질 것이다.(사 61:9; 65:23). 의로우신 하나님의 후손들은 그의 보물이며 자손으로 인정될 것이다. - 그들은 그의 대리인이다(31절). 그들이 "와서," 즉 그들의 날에 일어나서, 지나간 세대의 덕을 지키고 그들 세대의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영화와 영혼들의 행복에 봉사할 것이다. 그들은 그 세대 사람들에게 흠없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그 신성한 위탁물)을 전할 것이며 장차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 두 가지 일을 선포할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영원한 의가 있다는 사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쁨의 근원됨을 선포할 것이다(롬 1:16, 17 참조).
(2)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 사업은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며(118:23) 우리들의 계획이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셨음을 자손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것은 비밀 가운데 있는 그의 지혜이며, 계시된 그의 팔이다.
이것을 노래함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개가를 불러야 하며, 우리 스스로 그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서 그를 찬송하고 있을 때 땅에서도 그를 찬송하는 백성들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