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4, 시편 38, 아가서 2, 히브리서 2
묵상구절
76:1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76: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76:3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76:4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76:5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76:6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76:7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76:8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76:12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시온에서 판결을 행하시어 만민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여호와 -
(저자: 아삽. 분류:찬양시)
서론
💡 본시는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승리를 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는 찬양시로서, 제75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인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주의자들을 위험하며 대적할지라도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교훈하여 줍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LXX)에는 본시의 표제에 ‘앗수르에 관하여'라는 말이 첨가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하다면 본시 역시 제75편과 마찬가지로 A.D. 7이년에 있었던 앗수르의 유다 침공 및 예루살렘 포위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제75편이 앗수르의 예루살렘 포위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찬양시라면,
본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18만 5천 명이나 죽이심으로 앗수르군이 퇴각한 후에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드린 찬양시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시는 제 75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시의 저자 역시도 제75편과 마찬가지로 아삽 자신이 아니라 아삽의 후손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75편의 저자와 본서의 저자가 동일한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3절
그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장막을 시온 곧 예루살렘에 두신 하나님께서 선민을 위협하였던 원수들을 완전히 깨뜨리심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크게 알리셨음을 찬양하는 내용.
4-9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위협하는 원수 곧 앗수르 군대에 대하여 진노하신 결과 앗수르 군대가 진멸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어 구원받았음을 찬양하는 내용.
10-12절
선민과 만민을 향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틀 드릴 것을 권고하는 내용.
●하나님 안에서 승리(시편 76:1-6)
교회는 지금 교전 상태에 있지만 개가를 올리고 있다. 시편 기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환희의 중심이신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Ⅰ.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기뻐하고 있다(1절).
유다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알린"바 되셨다는 것과 그를 알리신 곳에 그 이름이 크시리 라는 것은, 그들의 영예이며 특권이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자신을 알리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 땅이 하나님의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백성들은 행복하며, 그 지식으로 자기의 마음을 채운 자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다른 족속에게 알리시지 않았을 때에도, 유다에게 알렸으며, 이러한 일은, 그것이 특별했으므로 그 은총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147:19, 20).
💡 76:1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 ‘알려지셨으며’ (’야다으’)
- ‘야다으’ : 피상적인 앓이 아니라 실제 체험에 근거하여 그 대상의 본질까지 철저하게 파악하며 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 본문에서는 당시 근동의 최강자였던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궤멸시킨 그 역사적 사건을 시인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의로우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졌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 특히 여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엘로힘'이란 신명이 사용된 이유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어떠한 피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강한 능력을 지니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유다에’ ‘이스라엘에’
- 상반절과 하반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두 단어 ‘유다'와 ‘ 이스라엘'이란 표현을 각각 사용하였다.
- 이것은 남왕국 유다와 복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 온 백성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본시의 저작 시기인 히스기야 당시에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멸망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시인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병치하여 표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 첫째는 시적 역동성을 살리고 반복을 피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 방법으로 볼 수 있다.
- 둘째는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백성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 ‘그 이름’ 이란 표현을 사용한 의도
-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의미를 넘어서서 그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의 본질과 역사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여기서도 시인은
-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 그리고 택한 백성을 향한 신실하심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
- 및 앗수르를 물리치신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그의 이름'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 ‘알려지셨도다’
- ‘크시도다’
- (까돌) 은 그 외형적인 모습의 크기나 부피가 크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나 그 능력의 위대함과 인격의 존귀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출 11:3; 왕하 5:1; 욥 1:3).
- 본문에서도 시인은 앗수르를 물리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사건을 통하여 널리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까돌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Ⅱ. 하나님께서 그의 의식 속에서 그들에게 특별히 임재 하시는 표적을 기뻐하고 있다(2절).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온 땅에 알려 지셨고, 거기에서 그의 이름은 위대하게 여겨졌다. "그 장막"과 "그 처소"는 "살렘", 곧 "시온에" 있었다. 그는 거기에 궁중을 두셨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백성들이 제물로써 표하는 경의를 받으셨고 제물로 잔치를 베풀게 하여,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와서 그들 자신을 그에게 아뢰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신탁에 의해 명령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그는 자기 이름을 기록하셨고, 그 장소에 대해 그는 "내가 여기 거하리니, 이는 내가 바라던 바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정해준 규례대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그 백성의 영광이며 행복이다. 그러나 그의 처소는 장막, 곧 이동할 수 있는 처소였다. "잠시간 그 빛이 우리와 함께 있도다."
💡 76: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살렘과 시온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
-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처소가 있기 때문이다.
- ‘장막’과 ‘처소’는 같은 의미이고, ‘시온’ = ‘예루살렘’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 장막과 처소, 살렘과 시온은 동의적 대구법으로 같은 의미.
시인이 강조하는 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Ⅲ. 그들이 그의 원수에 대해 승리한 것을 기뻐하고 있다(3절).
"거기서 저가 화살을 깨치시도다."
그 위험이 얼마나 긴박한가를 주목하라. 유다와 이스라엘, 살렘과 시온은 이처럼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났고, 그들을 치는 무기가 연마되었다.
1.여기에 활과 살, 방패와 칼, 그리고 싸움에 쓰이는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부러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이
(1)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백성들을 위해 유다와 이스라엘서 행해졌다. 전쟁 무기가 다른 민족들을 치는 데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그 목적에 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 거룩한 민족을 향해 겨누어졌을 때는 즉시 부러졌다. 갈대아 해설판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을 때, 그는 그들 가운데 그의 위엄을 두셨고, 거기에서 화살을 꺾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를 성실하게 섬기는 동안에는 위대하고 안전했으며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갔다. 또는
(2) 시온에 있는 장막과 처소에서 그는 화살을 깨치셨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행해졌지만, 성소에서 행해졌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에게 한 기도에 응답하여서, 그리고 그가 거기에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여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사례를 역대하(역하 20:5, 14)에서 볼 수 있다. 공적인 승리는 진영에서 행해지는 것에는 물론,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에 크게 기인된다.
💡 76:3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셨음.
- 본절은 앗수르 군대가 산산조각나듯 완전히 섬멸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거기에서’
- 이는 단순히 ‘거기서’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거기로 가는 도중에’ 란 의미이다. →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 ‘예루살렘 근처의 어디에서’ 란 의미로 해석된다.
- 이러한 표현은 앗수르의 군대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 위해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상황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한다.
‘화살, 방패, 칼’ = 당시 전쟁에 동원되었던 주요한 무기들
- 화살 = ‘불화살’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 ‘없이하셨도다’ = ‘산산조각내다’ ⇒ ‘완전한 파괴’의 의미.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산산조각내듯이 완전히 섬멸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왕하 19:35-37).
- 본절에서는 완료형 단어로 사용되어 이미 앗수르 군대가 완전히 패퇴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이 승리는
(1) 이스라엘 하나님의 불멸의 영광에 매우 크게 이바지했다(4절).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그리고 주 자신이 그러하심을 명백히 나타내셨다.
[1]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크고 강한 자들보다 더욱 그러하시다. 그들은 높으며 스스로가 산처럼 요지부동 하다고 생각하나 사실상 그들은 약탈한 산이나 다름없이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제한다. 파멸시키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나, 건지시는 것은 주의 영광이다."
[2] "특별히 우리의 침입자들보다 더욱 그러하시다. 그들은 유다 성읍을 포위했을 때, 그것들을 치기 위해 포를 탑재했고 포열을 세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 교회의 원수들이 교만히 행동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보다 위에 계심이 나타날 것이다.
💡 76:4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영화로우심
‘주는’
- ‘당신’이란 의미의 인칭 대명사.
-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여기서 시인이 이러한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진정 영화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 즉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 ‘엘로힘’ 혹은 ‘여호와’란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명을 사용하여 부를 만큼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 한편으로는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대상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당신’이란 표현으로 부를 수 있는 친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영화로우시며’ (’나오르’)
- 이 단어는 물리적인 ‘빛'과 연관하여 ‘빛나다', ‘비치다', '반짝이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영화로우심이 위대하여 해같이 빛나는 것을 묘사한다.
특히 ‘나오르'에 사용된 수동(Niphil) 분사형은 진행의 의미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주의 영화로우심이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지속적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 숨겨질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약탈한 산’
-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 ‘약탈하는 산들보다 더’, ‘약탈한 산보다 더’ 라고 번역할 수 있다.
- 약탈하는 산들보다 더
- 약탈을 일삼았으며 산들처럼 우뚝 선 존재였던 고대 근동의 최강국 앗수르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공격적인지, 그리고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반영하는 표현하는 것.
- 약탈한 산보다 더
- 실제 앗수르가 여러 나라들로부터 탈취한 물품들을 산처럼 쌓아두었음을 나타낸 표현.
‘존귀하시도다’ (’앗디로’)
- ‘앗디로’ : ‘위엄 있는’, ‘존귀한’, ‘화려한’ 이란 의미.
- 이런 의미들을 종합하여 본문을 해석한다면 ‘약탈을 행하는 나라(앗수르)보다 하나님은 더 존귀하시다' 혹은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들보다도 하나님은 더 화려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어떤 번역을 취하더라도 본문은 하나님의 위엄이 비교의 대상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시적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2) 이스라엘 원수들을 영원히 수치스럽게 하는 일에 이바지했다(5.6절).
그들은 "마음이 강한 자," 그들의 이전의 승리에 의기 양양하며, 이스라엘에 격분하고 성공에 자신 만만한 큰 용기와 결단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건장하여 봉사하기에 적합한 "장사"였다. 그들은 "병거와 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전쟁하는 데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고 또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20:7). 그러나 이 모든 힘은,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해 조준되었을 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무력하게 된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실 때 자기의 원수들을 약하게 하시고, 저절로 멸망하게 만드실 수 있다. 저희는 예수 안에서 자는 의인의 잠을 자지 않고 "자기 잠" 즉 깨어났을 때 영원한 수치와 경멸이 될 죄인의 잠을 "잔다."
[2] 장사는, 마음이 강한 자이면서 용기를 찾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손을 찾지" 못한다.
대담한 자가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한 자도 절름"거리며 그들의 손이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음을, 더욱이 그들의 대적을 해칠 수 없음을 발견한다.
[3] 병거와 말은, 그것을 모는 자들과 타는 자들이 잠이 들었을 때, 정말로 "다 깊은 잠이 들었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사람들이 멸망시키는 천사들에 의해 현장에서 죽은 채로 놓여 있을 때 병거와 말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능력과 효험을 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즐겁게 이 모든 것을 구속자에 의해 즐기는 그 유익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알려지시는 것은 그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크신 것은 그 안에서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안에 장막과 처소를 가지신 것은 그의 덕택이다. 무장한 강한 자를 격파시키고 정사와 권세를 탈취하며 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게 하신 것은 그였다.
💡 76:5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 ‘마음이 완고한 자' , ‘교만한 자'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스스로 최강국이라 여기며 다른 나라는 물론 하나님까지 무시하였던 앗수르를 지청하는 표현이다.
‘잠에 빠질 것이며’
- 표면적으로는 한글 개역 성경 그대로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하나,
- 본문에서는 일상적인 잠이 아닌 ‘죽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셔서 그들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가진 것을 빼앗기고’
-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물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대기 중이던 앗수르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에 의하여 185,000명이 죽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사 37:36).
-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시인이 재귀형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완악하고 교만함이 결국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즉 악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켰음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이다.
본문의 ‘장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 아느쉐 하일' 이다. 이는 물론 잘 훈련된 강력한 힘을 가진 앗수르 군인들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한글 개역 성경이 미처 전달하지 못한 의미들이 발견된다.
- 여기서 ‘하일'은 ‘힘'이란 뜻을 지닌다.
- ‘사람들'로 직역되는 ‘아느쉐' 의 원형 ‘에노쉬’ 는 ‘병을 앓다'(삼하 12:15), ‘부패하다'(렘 17:9) 란 뜻의 동사 ‘ 아나쉬' 에서 유래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함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힘'이란 의미를 지니는 ‘하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장사인 앗수로가 더 이상 장사가 아닌 힘을 잃은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시인이 이 두 단어를 막켑으로 결합시킨 것은 비록 겉보기에 힘이 강한 앗수르 군대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부패하고 병든 존재에 불과하였옴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은 ‘콜'은 ‘모든 (ESV, all)'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이는 모든 앗수르 군대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판이 임할 때에 하나님께 조금도 반항할 수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 그들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 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으로 대적들의 무기력함을 강조하는 표현.
- ⇒ 결국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평상시 용감무쌍하던 그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힘없이 일방적으로 멸절하게 되었음을 강조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76:6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 여기서 꾸짖으시는 대상은 : 산헤립의 군대로 볼 수 있고,
- 꾸짖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함에 대하여 진노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란 호칭을 사용한 이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시대부터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부터 그를 택하시고 보호하여 주셨음을 상기시킴으로써
— 그 후손들 역시 의로워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하여 주셨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서두에 출처와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 ‘미’를 사용
-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막강한 앗수르 군대를 무찔렀다는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 이처럼 시인은 본문에서 앗수르의 공격 앞에서 크게 위축되었던 이스라엘이 막강한 힘을 지닌 앗수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조상 때부터 친히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 병거와 말 = 앗수르의 막강한 군사력의 상징.
→ 당시 앗수르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 ‘깊이 잠들었나이다’
- 이는 수동 분사형으로, 여기서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그들이 잠든 것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배후에 있는 신적 능력, 즉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 이는 왕하 19장에 나오는 내용을 염두에 둔 것으로
→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에 의하여 앗수르 군대가 전멸한 것을 나타낸다(왕하 19: 35). -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필요하다던 때로 초자연적 능력까지도 사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방어와 영광(시편 76:7-12)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 해주신 이 영광스러운 승리는 여기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Ⅰ.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가려진 두려움(7-9절).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다. 주의 위엄은 숭상되어야 하며, 주의 주권은 복종함을 받아야 하고, 주의 의는 주를 거역한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이 사건으로 인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하자.
- 모든 사람이 대담하고 불경건한 죄인들을 치시는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하자. "주께서 잠시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께서 태우는 불이 되신다면, 비록 그 "진노가 잠깐이라" 하더라도, 짚과 겨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 76:7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본문은 매우 독특한 문장이다.
- 일반적인 문장에서는 흔히 생략되는 2인칭 대명사 ‘앗타'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 시인이 이처럼 예외적으로 ‘앗타'틀 두 번 사용한 이유는
- 하나님의 절대자되심, 지존자되심과 ‘오직 주님만이' 경외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경외할 자시니’
- 원형 ‘야레’ : ‘두려워하다, 존경하다, 놀라게 하다’
- 여기서 수동 분사형, 이는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취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피조물로부터 존경과 두려움과 놀람의 대상이 됨을 보여준다.
- 특히 여기서 사용된 ‘야레' 동사는
→ 단순한 개념적 표현이 아니라,
→ 역사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한 시인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근거한 살아 있는 신앙 고백이 함축된 표현인 것이다.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 원문이 강조하는 바는 회수가 아니라 주의 노함의 치명적 결과가 지속된다는데 있다. 이러한 시인의 확신에 찬 고백은 자신이 선포하고 고백하는 바를 스스로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던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룻밤 사이에 멸절한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시인은
—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운 분노를 발하신다면
→ 어떤 대적들도 감히 그에 맞설 수 없고 필경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널리 선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76:8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심판하신 판결
'하늘에서'
- 원문은 ‘하늘에서’ 에 해당하는 ‘밋솨마임’ 본문 서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신다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처럼 높으신 하늘 보좌에서 심판을 내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가지 상황이나 여건에 좌우되는 세상 법정과 달리 철저하게 공의롭고 완전하다.
- 그러나 시인이 본문에서 ‘하늘에서'를 문장 서두에 배치한 이유는
→ 당시 정황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초월성과 전능성, 그러고 만국을 높은 위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이고 전능하시며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이므로 — 땅의 열왕이나 거대한 세력을 지닌 제국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 세상 나라들이 보기에 누구도 앗수르와 같은 대국과 그 왕의 행사에 대해 판단하고 심판 수 없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을 초월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열국을 심판하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시인은 본문과 같은 확신의 선포를 하는 것이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 절대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의 공의롭고 엄정한 관결에 따른 결과
- ‘땅’ (에레츠)
- 9절의 ‘에레츠’와 본절의 ‘에레츠’는 상반된 대사을 가리킴.
- 9절 = 가치 중립적 의미. 세상 그 자체를 나타냄.
- 8절 =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세상, 앗수르와 같이 군사력만 믿고 자신들을 높이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멸시와 모독의 말을 내뱉는 교만한 세상 나라와 그 왕을 지칭하는 상징적인 표현.
- 9절의 ‘에레츠’와 본절의 ‘에레츠’는 상반된 대사을 가리킴.
- 이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은 심판을 당하기 이전에는 마치 자신들이 하늘 위에 앉은 것처럼 위세를 드러내고 점점 교만히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악행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고 심판의 날을 작정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면 그들은 죽은 자와 같이 잠잠할 수밖에 없다. - ‘잠잠하였나니’
- 죄악을 자행함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태,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이미 심판을 받아 죽은 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
-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당시 시인이 경험한 역사적 상황과도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자신들의 강성한 군사력을 믿고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나라 유다를 멸시하는 온갖 악독한 말들을 마음대로 지껄여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하루 아침에 전군이 몰살당하자 그들 진중은 수치와 부끄러움, 두려움으로 아무 소리조차 내지 못하였고 앗수르 왕 산헤립과 몇몇 살아남은 자들은 입을 가리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2.모든 사람들이 압제 당하는 무죄한 자와 그의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위하는 그의 빈틈없는 배려를 두려워하게 하자.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신 때라. 그리고 그때에 땅이 주의 이 영광스러운 출현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기다리면서, 두려워 잠잠하였다."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겸손한 자들"(습 2:3),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35:20)로서, 어떤 해도 견딜 수 있으나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
(2) 비록 땅의 온유한 자들은 그들의 온유함으로 인해 해를 당할 위험이 클지라도, 하나님은 조만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나시어 그들의 소송을 변호해 주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때, 그는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실" 것이다. 그는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가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는 자들에게 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행해진 것을 곧 자기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신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시는 것으로 보이나 조만간 그는 판결을 듣게 하실 것이다.
(4) 하나님 게서 하늘에서 판결을 말씀하실 때는, 땅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침묵 속에 그 자신을 가라 앉히는 때이다. 법정이 열릴 때, 선포로서 장내가 조용하게 되는 것처럼,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됨을 알지어다" (46:10).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한 것은 여호와께서 일어나시어" 판단하심이라(슥 2:13). 이 시편을 산헤립의 군대가 패주한 경우에 대해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은, 판결을 집행하여 멸망시키는 천사들은 당연히 우레를 동반하고 내려왔을 것이므로,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판결을 선포 하셨고 땅은 두려워하였으나 (즉, 지진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확실하다.
💡 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 시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단행하신 이유는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그러한 구원의 시점에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힌다.
- 즉 악인들의 심판과 온유한 자의 구원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따라서 악인들의 경우 심판은 두렵고 절망적인 사건, 피하고 싶은 사건이지만
- 의인들에게는 도리어 구원의 사건, 위로와 회복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온유한 자’
- 이는 물질적인 가난의 의미보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강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산상수훈 가운데서 말씀하신 천국을 차지하는 축복을 누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마5:3).
-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는 원수들의 압박과 위협 앞에서도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과 긍휼을 구하는 자들, 대적들의 모독과 멸시로 인한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고대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다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들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단행하시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위로(10절).
우리는 우리를 매우 귀찮게 자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한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많이 느끼며, 그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1.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사람의 분노를 내뿜도록 허락하시는 한, 그는 그것을 그에 대한 찬송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며,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목적을 돕게 하실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분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분노가 무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될 때, 그 인간의 분노에 가해진 저지 때문에 만이 아니라, 잠시동안 분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그 자유에 의해서까지도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의 분노에 의해 당하는 역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에 이바지하도록 된다. 그리고 "열방이 분노"할수록, 또한 "여호와의 그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려고 음모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을 그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것에 대해 더욱 찬미 될 것이다(2:1, 6). 천군들이, 하나님께서 "이방들이 분노할지라도 큰 권능을 잡고 왕노릇하신" 것을 찬송의 소재로 삼을 때(계 11:17, 18) 그때에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찬송에 광채를 더한다.
2. 그에게 찬송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는, 노를 발하도록 방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사람들은 결코 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하고 싶을 때는 저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나운 파도를 제한하시는 것과 같이, 사람의 분노도 제한하실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고, 더 이상 가지 말라." 이에 "그 교만한 파도가 잔잔해지니라." 하나님은 산헤립의 남은 노를 제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코를 꾀며, 자갈을 그의 입에 먹이셨기 때문이다(사 37:29).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허풍을 떨도록 허용하셨을지라도, 그가 의도한 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재재 하셨던 것이다.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Ⅲ.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11,12절).
모든 사람이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 굴복하여 그의 충성된 신하가 되게 하자. 다음을 주목하자.
1. 우리 모두에게 그의 주위에 있어 그를 의지하거나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의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각자는 왕들의 왕께 경의를 표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서원하고 갚으라." 즉,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것을 마음에 두어 지키라. 그의 것이 되기로 서원하고 네가 서원한 것을 갚으라. 네 영혼을 그에 대한 맹약으로 묶으라 (왜냐하면 그것은 서원의 본질이다). 그리고 나서 네 스스로에게 지운 의무를 따라 행하라. "서원하지 않는 것이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왕으로 삼은 후, 군주에게 예물을 드린 신하들처럼(삼상 10:27), 그에게 예물을 드리도록 하자. "너희는 이 땅 처리 자에게 어린양들을 드리라"(사 16:1).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어떤 예물이 필요하다거나 그것에 의해 그가 혜택을 입으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처럼 그에게 존경을 바치고, 우리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 그리고 특히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물인 것이다.
💡 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너희’ = 남유다 백성들.
- 그들은 고대 근동의 최강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구원을 받았다. 시인은 바로 이들을 향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하여 취할 바 행동을 권면하는 것이다. 본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신명인 ‘예흐와’ 와 ‘엘로힘’이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
- ‘예흐와': 택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호칭,
- ‘엘로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눙하심을 부각시키는 호칭.
- 여기서 이 두 호칭을 동시에 사용한 이유
- 오로지 하나님만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 그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합당한 태도를 취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시인의 권고
이스라엘과 이웃하는 이방신을 섬기는 주변 국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섬겨왔던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권고한다.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 이 표현에는 ‘정관사’가 사용되었는데
→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 한분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즉 시인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그분의 심판을 목도한 이방 모든 민족들을 향하여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며 경외해야 할 존재이신 하나님에게 헌신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의무를 시행하여야 하는 이유.
"모든 자들에게 줄 것을 주라...... 그리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라"(롬 13:7 참조).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
(1) 그는 경외함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단어 그대로) 두려움이시다." 그의 이름은 영화로 우시며 두렵다. 그리고 그는 우리 두려움의 적합한 대상이다. 그에게 두려운 위엄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이 경외하는"이라 불리우고 있다(창 31:42). 그리고 우리는 그로 우리의 두려워하는 자를 삼도록 명령받고 있다(사 8:13). 우리가 그에게 예물을 드릴 때, 우리는 그를 크게 두려워해야 할 자로서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거룩한 곳에서 엄위 하시기 때문이다.
(2) 그는, 경외함을 받는 것을 자기의 독점적인 특권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도 경외함을 받을 것이다(12절).
그는 "방백들의 심령을 꺽으실" 것이다. 우리가 꽃을 줄기에서 따내듯이 또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따내듯이 그는 그것을 꺽으실 것이다 (그 단어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매우 대담한 자들의 기를 꺽으실 수 있으며, 그들을 용기 없게 만드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며, 또 그렇게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굴복하지 않을만큼 지혜롭지 못하다면, 조만간 그는 그들이 "산과 바위에게 그들 위에 떨어져 그의 진노에서 그들을 가리우도록" 요청하는 것을(계 6:16) 헛되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과 겨룰 자 없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또한 우리의 지혜이다.
💡 76:12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고관들'=세상의 왕들
-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 나라의 통치자들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기를 꺾으시리니'
- 이러한 본문이 시사하는 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방의 악한 통치자들의 교만을 꺾고 필요하면 목숨까지 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 ‘두려움이시로다’로 번역된 ‘노라’
- 7절에서 ‘경외할 자시니’로 번역된 표현.
- 본시에는 ‘두려움’과 ‘존경’을 뜻하는 ‘야레’ 동사가 거듭 사용되어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에 대하여 인간이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시인이 이러한 하나님의 측면을 거듭 부각시키는 이유
-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패퇴한 앗수르의 궁극적 과오가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도리어 자고하여 하나님을 이방신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멸시하였기 때문이다(대하 32:13.14.17). - 시인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훈을 얻어야 함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패퇴한 앗수르의 궁극적 과오가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본시는 남유다의 역사상 가장 큰 위기의 사건이었던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내시고 초자연적인 역사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감사 찬양시이다.
그러나 시인은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진리를 들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즉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 선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고 당신께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본시에서 시인은 평범하지만 사단의 세력이 준동하는 이 세상에서 주의 성도가 좌절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명심해야 할 진리를 득자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하기 위하여 다양한 문예적 기교를 동원하고 있다.
즉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시적 운율을 살리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고 교차 대구법과 동의 대구법, 은유법, 신인동형론적 표현 등을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이를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적 습득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