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8월 13일 화요일 묵상구절 잠22:1-29

Jeehyun 2024. 8. 14. 00:26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상 3, 로마서 3, 예레미야 42, 시편 17

묵상구절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22: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22: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22:12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22: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22: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22: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22: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2: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2: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22: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2:25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22: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2:27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2:28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1) 22:1-16

 💡 서론22:1-16


● 재물보다 나은 명예와 은총(잠언 22:1)

여기에는 큰 재물보다 한층 더 고귀하여 우리가 재물보다 더 탐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등장하고 있다.

  1. 좋은 평판.

"많은 재물보다 명예(즉 "이름", 하나님이나 선한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로 인해 얻는 "좋은 이름")를 택할 것이니라." 즉 우리는 큰 재산을 얻고 늘리는 일보다 좋은 평판을 얻거나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행하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재물은 큰 걱정을 동반해 오며, 소유주를 위험에 내어 줄 뿐 그에게 실질적 가치는 덧보태지 못한다. 우매한 자나 악한 자는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예는" 사람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하며, 그가 지혜롭고 정직한 자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며, 그 사람에게 선행의 기회를 보다 크게 제공해 준다. 많은 재물로써는 타인의 신체적 궁핍을 구제할 수 있지만 선한 이름으로는 남에게 경건한 신앙을 권장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

이것은 "은이나 금보다" 더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은과 금을 지니지는 않으셨으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셨다"(눅 2:52).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 재물에 대해서는 거룩한 멸시의 눈길로 바라보고 우리 마음을 거기에 두지 않으며, 가급적이면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는"데(빌 4:8) 주의를 기울이도록 가르치고 있다.


빈부를 지으신 여호와(잠언 22:2)

 💡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1. 하나님의 섭리는 인생들을 어떤 자는 "부"하고 어떤 자는 "가난"하게 정하시고, 사회 안에 같이 섞어 놓으셨다.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들의 존재를 지으신 이도, 그 운명의 분깃을 나누어 주신 분도 여호와이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도 하나님을 자기 창조주로 인식해야 하며,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인간과 같이 그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 아래에 있다. 극빈자라도 최고의 갑부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의 손이 지어낸 작품이란 영광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말 2:10; 욥 31:15).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부자로 만드셔서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게 만들어서 부자에게 도움이 되게 하신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전 12:21).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은 가난하게 만드셔서 인내심과 만족심과 하나님께 대한 의지심을 단련시키시며, 또 딴 자들은 부자로 만드셔서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과 적선하는데 도를 연단하신다. "가난한 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있다." 빈자는 결코 땅에서 그치지 아니할 것이며, 부자 또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 여러 모로 "빈부"간에 내재하는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의 일에서 "함께 만나며"("섞여 살며":우리 성경), 특히 "여호와"앞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들 모두를 지으신 자"이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이다(욥 34:19). "빈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정에서 "서로 만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며 죄 아래서 끝나고 불의한 중에서 잉태되었으니, 부자나 빈자가 모두 한 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만나는 것이다. 거기서는 빈자도 부자만큼 환영을 받는다. 거기에는 그 양자에게 동일한 그리스도가 계시며, 꼭같은 성서와 성령이 계시며 동일한 언약이 약속된다. 빈자에게도 부자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어 있다. 반면에 돈 많은 죄인에게는 가난한 죄인과 마찬가지로 지옥이 있다. 빈부가 다 같이 죽어 무덤에 묻히듯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수준에 서 있는 것이다. "작은 자나 큰 자가 다 거기에 있다."

● 재앙을 피하는 슬기(잠언 22:3)

 💡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1. 지혜와 심사숙고의 혜택.

"슬기로운 자는" 자기 슬기의 덕택으로 "재앙"이 오기 전에 미리 "보고 숨어 피하느니라." 그는 자기가 시험을 당하게 되는 때를 알아차리고 전신갑주를 입고서 경계태세를 취할 것이다. 폭우를 내리려고 먹구름이 모이고 있으면 그는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견고한 망대이신 여호와의 성호 밑으로 피할 것이다. 노아는 홍수는 미리 보았고 요셉은 기근을 예견하였으므로 그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 경솔과 몰지각함의 화.

"어리석은 자들은" 아첨해 주는 말은 무엇이나 믿으면서 경고해 주는 말은 하나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원뜻:"벌을 받는다"). 그들은 죄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듣고서도 모험적으로 죄를 지으며, 정당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환란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주제넘음을 후회하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의 실제 예를 보라(출 9:20, 21). 경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다는 것보다 귀중한 영혼에게 더 치명적인 일은 없는 것이다.


겸손과 경외함(잠언 22:4)

💡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1. 경건한 신앙의 어디에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에, 즉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그의 명령하시는 말씀과 섭리의 처분에 극히 겸손하게 복종할 정도로 그의 엄위로우심과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겸손히 처신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낮추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있는 곳에 겸손이 있을 것이다.

2.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선하다고 보시는 범위 안에서 주시는 "재물"과 "영광"과 위로와 오랜 "생명"을 얻고 적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는 영적 "부유"와 "영광"이며 은혜의 언약에 의한 약속과 특권을 얻을 수 있으며, 마지막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패역한 자의 길(잠언 22:5)

💡 22: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1. 죄악의 길은 괴롭고 우대한 길이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느니라." 그것은 구부러진 길이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상반하는 길이며 그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의 가시가 있으며 장차 죄에 빠뜨리려는 올무가 있다. 자기의 말과 행동을 양심에 비추어서 행하지 않는 자는 바로 그 허구적 자유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자기의 쾌락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쉬 성내는 패역한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매사가 그를 초조하고 성가시게 하여 그는 모든 일에서 초조감과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2. 의무의 길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영혼을 지키는 자"는 자신의 마음과 길을 주의깊게 경계하여 이들 "가시와 울무를 멀리하므로" 그 길은 평탄하고 즐거운 것이다.


어린 아이의 교육(잠언 22:6)

💡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 지혜를 전파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의 부모와 교사들에게 특히 큰 의무를 부하하고 있는데, 이는 그 지혜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사장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죄와 그 올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저 헛된 시기에 처한 "아이들을 가르치라." 저들에게 의도된 바에 준비시키기 위해 학습기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라.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라." 초보를 가르치라. 그리고 규율 아래서 훈련시키라. 그들을 군사와 같이 "훈련시키라." 군인은 무기를 사용하고 대오를 지으며 명령을 따르는 법이다.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길로 가르치지 말고(저희의 타락한 마음에는 편견이 있어 그들을 곁길로 이끌어낸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 너희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 길로 가게 하라.
    "아이의 능력대로 그를 가르치라"(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유모가 아이들을 먹이듯이, 온화한 손길로 조금씩 그리고 자주 가르치라(신 6:7).
  1. 아이들을 돌보고 수고한 결과는 매우 큰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장성하고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바라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받은 좋은 인상을 평생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릇된 보통 맨 처음에 담았던 양념의 냄새를 계속 풍긴다고 한다. 실제로 자기들이 훈육 받았던 선한 길에서 떠나가는 자들은 참으로 허다하다. 솔로몬 자신도 그러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가 그러했다고 상상할 수 있듯이 이른 교육은 자기 회복의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적어도 부모로서는 자기들의 소임과 수단을 다 해보았다는 안도감은 얻을 것이다.

● 빈부의 종적인 관계(잠언 22:7)

💡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그는 2절에서 "빈부가 서로 섞여 사느니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서 보여 주고 있다.

  1. 거의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많이 가진 자들에게 종속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빈자가 부자에게 의존하고 있고 보조를 받았으며, 또 받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흔히는 정도 이상으로 지배하며, 비록 크신 분이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업신여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는 달리 교만과 가혹을 자행한다. 착취당할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곧 가난한 자들이 고난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한편 자기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고 최선을 다해 은혜롭게 대해 주는 부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의 일부분인 것이다.
  1. 뒤떨어져서 가고 있는 자들은 앞서 가 있는 자들의 수중에 자신이 멋대로 좌지우지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빚진 자는 채주의종이 되느니라." 꾸는 자는 꾸어 주는 자에게 신세를 진다. 그러므로 때로는 "내게 참으소서"하고 애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의 일부였다(신 28:12). 우리는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만 지니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자신의 사치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유를 팔아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악을 뿌리는 자의 운명(잠언 22:8)

 💡 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1. 부당한 이득은 결과가 좋지 못할 것이다.
    "악을 뿌리는 자," 즉 이득을 얻으려는 바램에서 부정직한 일을 행하는 자는 "헛된 것(우리 성서:재앙)을 거두리라." 그가 얻는 것은 결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며 아무 만족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직 실망만 맛보게 될 뿐이다. 남에게 고통을 입히는 자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비할 따름이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1. 남용하는 권력은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권세의 지팡이가 "분노의 지팡이" (혹은 "기세")로 변하고, 사람이 분별심 대신에 혈기로 다스리며, 공공의 복리 대신 자신의 적개심을 충족시키는 것 밖에 목적하지 않는다면 그 권세는 "쇠하리라." 그 지팡이는 꺾어 질 것이고 저희의 권세는 과용으로 인하여 부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사 10:24, 25).

● 자비로운 자의 복(잠언 22:9)

💡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1. 자비로운 자에 대한 묘사.
    그는 "선한 눈"(원 뜻은 "후한 눈":단수형)을 가지고 있다. 이 눈은 악한 눈(23:6)과 반대가 되는 눈이며 "순전한 눈"(마 6:22), 즉 자신을 내어 주는 자들 외에 자선의 대상을 찾는 눈과 동일한 눈이다. 궁핍과 불행 속에 있는 자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하는 눈이요, 구제하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눈이다. 이런 눈은 구제 금품을 배나 기쁘게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비로운 자는 또한 후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 "양식"을 궁핍한 자에게 "준다." "그의 양식"은 자신이 먹기 위해 준비한 떡이다. 그는 가난한 자가 식량이 없어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기 허리띠를 졸라 매려는 자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양식"을 전부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양식 중에서"준다(give "of" his bread).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그 자신의 가족과 함께 저희 몫을 얻게 되는 것이다.
  1. 인자한 자의 복됨.
    가난한 자들의 허리가 그를 축복할 것이며 그 주위의 사람들이 다 그를 칭찬할 것이고, 그를 위해 드리는 많은 선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을 받으리라."

거만한 자의 다툼(잠언 22:10)

 💡 22: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1. 거만한 자는 어떻게 행하는가?

본문에는 그가 가는 곳마다 불화를 심고 악을 저지른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평화를 교란시키는 "다툼과 싸움"은 대부분이(혹자가 해독하는 대로)만사를 극히 나쁘게 해석하는 "악한 해석자"나, 만나나는 사람마다 깔보고 조소하며 온 인류를 욕하고 헐뜯는 데서 자만심을 가지는 자들에게서 기인한다.

  1. 버릇을 고치려 들지 않는 조롱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마엘처럼 그를 네 사회에서 "쫓아 내라."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다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추방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화평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거만한 자를 물리쳐서 제외시켜야 한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잠언 22:11)

 💡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1. 공공 업무에 취임하기 알맞고, 세련되며 완숙한 신자가 되는 조건.
    그는 정직해야 된다. 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고" 불결한 모든 것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하다. 온갖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순결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기만과 위선, 이기심과 흉계로부터 결백해야 한다. 이런 자는 자신이 성실한 자라고 입증되도록 노력하며, 원칙적으로 봐도 공명정대한 자여서 자기 양심을 깨끗이 결점 없이 지키는 일밖에는 기쁨을 모르는 자이다.
    또 하나의 요건은 아름답고 우아한 말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되는 대로 마구 지껄이거나 번지레한 아첨을 해서는 안 되고, 자기의 생각을 점잖고도 재치있게 표현해야 하며 그 언어는 그의 마음만큼이나 깨끗하고 유연하게 한다.
  1. 그런 자는 출세한 가망성이 매우 크다. "임금"이 만약 지혜롭고 선하며 자기 자신과 백성의 이익을 깨닫고 있는 자라면 "그의 친구가 될 것"이고 그를 자기 조정의 대신으로 삼을 것이다. 이런 대신은 다윗조에도 하나가 있었고 솔로몬조에도 있었는데 이들은 "와의 친구"라 불리웠다. 그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왕은 그가 학업 사업으로 그를 도와 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임금"을 왕 중 왕에 대한 말로 해석한다. 즉 "마음에 간사함이 없으며," 말이 항상 은혜로운 자에게는 하나님이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며 영원하신 군왕 메시야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다. "모든 성도는 다 이런 존귀를 얻게 되리라."

지식있는 자와 궤사한 자(잠언 22:12)

 💡 22:12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1. "지식있는 자를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배려.
    "지식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에서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일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맹목화시켜서 계속 무지 속에 붙잡아 두려는 사탄의 궤계나 인류의 타락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 자신과 선악에 대한 지식을 인간들 가운데에서 계속 존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 "여호와의 눈," 즉 섭리의 감시와 선하시며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예증이다. 그는 "지식있는 자"와 지혜롭고 선한 자(대하 16:9),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는 신실한 증인을 보존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계획을 형통하게 하신다. 은혜로써 그런 자들 안에 있는 "지식을 보존하시고" 자기 자신의 일과 저들에게 있는 이익을 확보하신다(잠 2:7, 8 참조)
  1. 지식에 반대되게 말하고 행동하며, 그들 자신의 지식과 지식의 이익과 경건한 신앙에 대적하는 자들에게 대해 하나님이 취하시는 공의로운 복수, "여호와께서는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나," 그러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지키시느니라." 그는 거짓되고 패역한 인간의 의도와 계획을 모두 파기시키시고 저들 스스로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드신다.

게으른 자의 특성(잠언 22:13)

 💡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 자기 사업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항상 구실을 마련한다. 게으름 때문에 그 영혼이나 육체가 다 파멸을 당하는 자들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데에 비상한 재간을 가지고 있다. 그 구실이 모두 부질없는 헛된 것이라하여 용납되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이득을 볼 자가 누구인가?
  2.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가상하여 겁을 먹고는 실제의 의무를 포기한다. "게으른 자는" 들 "밖에" 할 일이 있으나 그는 거기에 "사자가 있다"고 상상한다. 아니,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보면 죽일까봐 두려워 거리에도 나가지 않겠노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자기를 부르는 자에게만 그렇게 얘기할 뿐이다. 그는 "밖에 있는 사자"에 대해서 말하지만 저 우는 사자, 곧 악마로부터 받을 진짜 위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악마는 바로 그와 함께 침대 속에 들어 있는데도 말이다. 또 그는 자기 자신의 게으름에서 연유하는 실제적 위험도 살피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를 죽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 음란에 대한 경고(잠언 22:14)

 💡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이 말씀의 의도는 모든 청년들에게 음란한 욕정을 경고해 주는 데 있다. 자기 영혼의 복리를 중시하려거든 "음녀"(원래의 뜻:이방 계집 낯선 여인)를 조심해야 한다. 음녀는 마땅히 외면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음녀의 입과 그 입맞춤(7:13), 그 입술에서 흘리는 말, 그 매력과 유혹도 삼가야 한다.

이들을 두려워하고 함께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이 죄에 내던지는 자들은 하나님으로 부터도 포기당하게 된다. 그것은 "깊은 함정"이다.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에 빠지리라." 하나님은 그들을 그 유혹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시며 자제케 하는 은혜의 굴레도 벗어 버리시어서 딴 죄악으로서도 그들을 벌하실 수 있도록 하신다. 네가 그런 여인들과 가까운 사이에 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라.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때인 것이다.

  1. 이렇게 된 자들이 스스로 정신차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그것이 "깊은 함정"인 까닭이다. 거기서 탈출하기란 매우 힘들 것이니 그것은 육체를 즐겁게 해 줌으로써 마음을 취하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아이를 징계하는 채찍(잠언 22:15)

 💡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매우 슬픈 고찰을 하게 된다.

  1. 우리의 본성에는 부패가 얽혀 들어가 있다. 죄악은 "미련한 것"이며, 우리의 올바른 이성과 진정한 이익에 상반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있다. 즉 우리 마음에는 범죄하고 어리석게 말하거나 행동하려는 내적 경향성이 있다. 그것은 또한 어린 "아이의 마음에" 있다. 아이들은 미련한 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것은 아이들이 형성되고 수태될 때부터 생긴 것이다. 거기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얽혀"있다. 그것은 마음에 첨부돼 있다(어떤 이는 그렇게 해독한다). 악한 기질이 영혼에 바싹 달라붙어 있으며, 대목에 접붙인 어린 가지처럼 영혼에 꽁꽁 묶여 있다. 영혼과 죄 사이에는 그것을 묶어 주는 매듭, 즉 진정한 여인의 매듭이 있다. 따라서 그 둘은 한 몸이 된다.

이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우리 자녀들에게도 타당한 진실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낳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이 "미련한 것을 아시나이다."

  1. 이 미련한 것을 치료하는 데는 징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정상적인 수단과 온화한 방법으로는 밀려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 방법은 엄하고 혹독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고통을 감수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징계받고 규율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천부께 징계받을 필요가 있으며(히 12:6, 7), 그 징계 아래서 어리석음을 책하고 채찍을 달게 받지 않으면 안된다.

부자들의 횡포(잠언 22:16)

💡 22: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이 말씀은 부자가 어떤 악한 경로를 택하여 때때로 자기들의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난하게 되며, 하나님께 노여움을 입게 되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부자에게 준다."

  1. 그들은 자비롭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고 오히려 주기를 아까와한다. 그들은 자선을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극히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는 것은 "재물을 불리기 위해서"(우리 성서:이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자만심이나 허영심에서 자기들의 위대함을 보일 양으로 선물을 보내는가 하면 큰 향응을 베풀어 준다. 아니면 자기들도 이자를 부쳐 다시 그런 대접을 바다보겠다고 하는 정략으로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어리석게도 통이 크고 헤푸기 때문에 거지가 된 자는 허다하나 분별있는 자선으로 가난해진 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를 초대하라고 명하신다(눅 14:12, 13).
  2. 그들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대"하기까지 하며 빈민 구호소를 털고 가난한 이웃과 소작인에게서 착취를 한다. 또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자산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기까지 하고서는 "부자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들의 비행을 묵인하고 보호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헛된 일이다. 그들은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하나님을 늑탈하여 그를 원수로 삼는 자들은 "부자에게 주어" 그들을 친구로 삼는다 해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스페셜포인트


(2) 22:17-21


지혜로운 말씀의 권고(잠언 22:17-21)

솔로몬은 여기서 담화의 형식과 양식을 변경하고 있다. 지금까지 10장 이후의 대부분에서는 교리적 진리를 기술하였고 가끔 가다 권고의 말씀을 가미하여 우리가 그것을 따라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24장 끝까지는 담화의 방향을 자기 아들, 문하생, 독자, 청중에게 돌려 개인에게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가 표현하려는 관념은 하나의 절에 함축되었으나 여기에서는 보통 그 의미가 길게 연장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형식에 싫증나게 될까하여, 다양한 방법을 시행하고 있는 지혜로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주의를 환기시키고 우리의 열심을 일깨우기 위해 직접적인 연설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목사들은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청중에게 설교해야 하며, 전체적인 모든 청중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도 안 되고 본문에서와 같이 각 개인들에게 직접 말해야 한다. "너는 이러이러한 일을 할지니라"라고 말이다.


Ⅰ. 지혜와 은혜를 얻으라는 간절한 권고.

이것은 문서로든 설교에 의한 것이든 "지혜있는 자의 말씀"에 주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말씀이란 예언자의 말씀과 제사장의 말씀이다. 그리고 특히 선과 악, 죄와 의무, 상과 벌에 대해 솔로몬이 본서에서 주는 "지식"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들 "말씀"과 "지식"에 겸손하게 진지한 주의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과 사랑과 깊은 생각에 의해 "마음을 두어야"한다. 마음이 없다면 귀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 22: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Ⅱ. 이 훈계를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논증.

1. 솔로몬이 본서에서 그 "지식"을 제공하는 일들의 가치와 비중.

이 말씀들은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위한 시시한 것이 아니며, 장난으로 되풀이하거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뇌어보는 익살맞은 속담도 아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우리 영혼의 거룩함과 행복, 인류 및 모든 공동체의 복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왕의 것"으로서(말의 의미는 그렇다) 왕이 말하거나 중신들이 듣기에 알맞은 것이다. 이 말씀은 "모략과 지식"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즉 지혜로운 계획에 관계되는 것으로 극히 중대한 이해가 걸려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조언을 해 줄 수도 있도록 되는 것이다.

2.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알려지며, 우리 개개인에게 지시해 주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달리는 자들도 읽을 수 있을 만큼 명백히 알게 하였다. 이 낮(오늘)에 알게 하였노라. 광명과 지식의 이 날에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상세히 알려 주었으며 바로 너의 날에 알게 하였노라. 그러나 이 빛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은 잠시 동안뿐이다. 만일 네가 너를 찾아온 이 날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오늘 네게 알린 이것들은 아마 내일이 오기 전에 네 눈에서 감춰질지도 모른다. 이들은 확실성을 보다 크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물려지고 보다 안전하게 순전하고 완전히 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장 강조를 강하게 하는 점은 이것을 네게 알게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네게(원문에는 이 말이 첨가되어 있다:역주) 알게 하였고, 마치 너의 이름을 써서 보내지는 편지처럼 네게 기록되었다. 그것은 너와 네 경우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너는 이 거울로 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네 규칙이 되게 할 목적으로 너를 위해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에 준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좋은 것이기니 하나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이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이다.

3. 이 말씀은 위로나 신망이란 점에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 22: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 우리가 이들을 마음 속에 감추면 매우 즐겁고 풍성한 만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18절).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면 그것은 즐거운 것(아름다움:우리 성서)이 되고 너의 항구적 위안물이 될 것이다. 속에 보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소화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고 그 규제를 받으며, 주물을 형에 붓듯이 우리 자신을 그것안에 맞춰 넣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적인 일은 경건함이 없을 때는 인간에게 하나의 강제적인 힘일 뿐이며, 따라서 흰 옷을 걸치고 단지 참회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오직 경건한 힘에 복종하고 그것을 마음의 일로 삼는 자들은 그 즐거움을 찾게 된다(잠 2:10).

(2) 우리가 이들을 대화 속에서 구사하면 매우 어울릴 것이며 우리에게 좋은 명성을 가져다 줄 것이다.

"네 입술레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원의:"알맞다"). "이것에 대해 얘기하라. 그리하면 너는 너다운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네가 너의 성품에 어울리게 말하는 것같이 되리라. 너는 또한 이것을 생각할 때나 마찬가지로 말할 때에도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4. 이 말씀이 주려고 의도한 유익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아름다운 것들"은 주인이 자기 종에게 내리는 명령과는 다르다. 그런 명령은 모두가 주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록은 선생이 자기 제자에게 주는 것과 같다. 선생의 가르침은 전부가 제자의 혜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이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까닭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기록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하나님과 그와의 교제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하여.

"네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느니라"(19절).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길은 의무의 길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의무의 길일 배워야만 한다.

아니, 이 사실 자체만 해도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의 큰 의무이다. 즉 이것부터가 하나님께 기쁨을 두고 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모든 실천적 신앙 생활의 기반이 되는 의무이다.


 💡 22: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 우리가 자신의 판단에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려 하느니라. 즉 너로 무엇이 진리이며 진리와 허위를 명백히 구별짓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하고 믿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것을 기록하였다."

[1] 우리의 신앙이 지적이거나 합리적으로 되고 완전한 확신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확실성"까지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2]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는" 방법은 우리의 의무를 본분으로 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확실히 "알리라"(요 7:17).


 💡 22: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3) 우리가 타인을 가르치는 데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신탁을 묻고자 네게 보낸 자들한테나(어떤 사본은 그렇게 해득함), 너를 어떤 일의대리자나 사자로 체용한 너를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하려함이라."

지식은 선행의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남들도 저희 촛불을 우리의 등잔에서 붙붙일 수 있도록 하고 우리도 우리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세대에서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자들은 그 계명 안에 있는 "소망"을 가장 훌륭하게 "설명할"수 있을 것이다.


 💡 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3) 22:22-29

 📖 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라는 권고(잠언 22:22,23)

앞서 나온 엄숙한 서론 다음에는 새롭고 깜짝 놀랄 만한 어떤 말씀이 선포될 것으로 기대할 만하나 그렇지 않고, 여기에는 평범하고 흔히 있는 말씀이 나온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일은 야만적이며 비인도적인 처사로 이를 금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평범한 듯하나 꼭 필요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Ⅰ. "약한 자(혹은 "가난한 자")를 탈취"하는 죄.

이는 잃어버릴 것조차 거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자를 수탈하여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도록 하는 죄를 말한다. 상대가 누구든지 강탈한다는 것은 나쁜 짓이지만, 우리가 마땅히 구제해야 할 자들을 약탈하고 박애심으로 목을 축여 주어야 마땅할 자들에게서 고혈을 착취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곤고한 자를 압제하여" 그 고생을 가중시키는 일이라든지, 약자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 그들을 수탈한 자들에게 편의를 봐 주는 일은 마치 우리들 자신이 강도짓을 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돈있는 자들이야 부당한 대우를 받을 만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지만 가난한 자들은 자력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른 약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한층 더 유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 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Ⅱ. 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사례들.

  1. 약자가 빈곤 때문에 정당한 권익의 보호에 무력하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을 마구 착취한다면 그것은 바로 죄를 가중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는" 것이다. 도와줄 이 없는 자라고 하여 이를 기화로 이득을 편취한다는 것은 야비하고 비열한 짓일 뿐만 아니라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며, 사람이 짐승만도 못한 일이 된다.
  2. 이 일이 법과 정의를 핑계삼아 자행되는 경우에는 곧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는" 일이 된다. 성문은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하며 이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정의의 제재를 가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Ⅲ. 이 죄에 수반되는 위험.

약자를 강탈하고 억압하는 자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다.

  1. 압제당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강력한 후원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실"것이며 저희가 넘어져서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을 편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를 행해 주실 것이다.

  1. 압제자들은 하나님이 공정한 복수자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며 "그를 노력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그는 영적 심판에서 저희의 영혼에 대한


💡 22: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노를 품는 자를 피하려는 권고(잠언 22:24,25)

  1. 격정적인 사람과의 친교를 금하는 훌륭한 경고.

친구에게 순응하고 기꺼이 봉사하는 것은 우정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권 게 어리석었다고 후회할 자와 신성한 교분을 맺는 일이 없도록 친구의 선택에 지혜롭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야 하겠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우정을 쌓을 대상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 중에는 격하기를 잘하며 성질이 가랑잎 같고 모욕을 받으면 분개하기 쉬우며, 흥분할 때는 말과 행동을 가리지 않고 난폭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는 친구나 벗으로 삼기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인 우리에게도 때때로 성을 낼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우리도 자기처럼 남들에게 화를 내리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22: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1. 이 경고를 위해 제시된 좋은 이유.

"그 행위를 본받을까 두려움이니라." 우리는 함께 동행하는 자의 영향을 받기 쉽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는 불붙기 쉬운 인화물질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격정의 불꽃을 흩날리는 자들과 사귀면 위험한 것이다. 노하는 성질은 누구에게나 큰 올가미가 되고 많은 범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자 때문에 우리 영혼을 "올무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그는 "네가 욕을 얻어먹거나 머리를 다칠까봐 두려워하노라"고 말하지 않고 한층 더 무서운 말, 즉 "네가 그를 가까이하고 맞장구 치다가 나쁜 습관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 22:25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보증의 위험성(잠언 22:26,27)

여기에는 사려깊지 못하고 불의한 보증에 대해서 또 경고가 나오고 있다.

  1. 우리는 재산을 탕진하거나 명예를 먹칠한 자와 연합하지 말며 친분을 쌓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는 보증이 필요하므로 친분있는 사람들에게 담보를 서달라고 욱박지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이웃을 속여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고 시간을 잠간 더 끌어봄으로써 자기를 신용해 주는 자들에게 끝내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보증을 원한다. 그런 자들과는 조금도 관계를 맺지 말고 그런 축에도 끼이지 말아라.

💡 22: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1. 우리는 "갚을 것이 없으면서도" 남과 "손을 잡거나," "남의 보증이 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사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기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게 되었다면 그는 마땅히 동정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갚을 자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자기의 소유는 청산되었기 때문에 채권자들이 손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금품을 직접 받거나 딴 사람의 보증을 떠맡는 자는 사실상 자기 이웃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자이다. 무슨 경우에서나 동정은 필요하지만 설령 법데로 처리되어 그의 "침상을 빼앗기게 된다" 해도 그것은 자기 탓이다. 침상과 같은 것은 채권을 확보하기 위한 담보로서 강점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출 22:26, 27). 사람이 너무 가난하여 담보로 제공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판명되는 경우에는 마땅히 면제를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 점을 인정하는 것도 정적히 행해졌었다. 그러나 부채의 회수를 위해서는 summun jus-즉 법의 엄격한 운용을 따라서 그러한 것 마져도 탈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22:27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1. 우리는 자신의 재산과 가정을 파괴시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공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맞지 않은 생활을 하며, 자신의 사업을 부실하게 경영하거나 남의 부채를 짐으로써 재산을 잃고 가난하게 되는 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그것이 양심의 증거에 비추어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면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경솔과 어리석음 때문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 지계석에 대한 준수(잠언 22:28)

💡 22:28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1. 우리는 이 말씀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설령 우리가 이런 일을 아주 은밀하고 그럴 듯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떤 공공연한 폭력에 의하지 않고 속임수에 의해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전체적으로 남의 자유나 특권, 혹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정당한 수단까지 강탈함으로써 소유권을 침법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개개인의 재산권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계표나 경계석은 모든 사람의 권리에 대한 영구적 증거물이다. 이것들을 치워버리지 말라. 그렇게 하면 전쟁과 다툼과 끝없는 분쟁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지계석을 네 이웃의 땅에서 네 자신의 땅으로 옮기지 말라. 왜냐하면 이는 이웃에 대한 노골적 강도 행위이며 후손에게 사깃군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는 일인 까닭이다.
  2. 여기에서 우리가 추론해 낼 수 있는 사실은 장구한 세월을 헤쳐나온 민사상의 모든 관계와 확립된 통치규례를 존중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개선시키겠다는 구실로 변경을 시도했다가 위험한 결과만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들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온당하다.

사업에 근실한 자(잠언 22:29)

 💡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1. 여기에는 참으로 재간 있고 부지런한 자를 찾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이 명백하게 암시되어 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너는 그런 자를 많이 보지는 못할 것이다. 어디를 가나 우둔함과 게으름이 만연할 뿐이다." 여기서 칭찬하는 자는 비록 매우 낮고 좁은 활동 무대에 있을망정 일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일에서 해방되는 때에도 편히 쉬고 있지 않는 자이다. 그는 일을 사랑한다. 일에는 민첩하고 활동적이며 끝장을 보고 마는 그의 특징은 꾸준하고 결단성 있을 뿐만 아니라 능란하고 기민하다는 점이다. 그는 신속한 사람이며 많은 업무를 간결하게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1. 그런 자의 출세에 대한 타당한 예측.

지금은 비록 "천한 자 앞에 서 있고" 그들에게 고용당하여 시중을 들고 있을망정 그는 출세하게 될 것이다. 외국에 대사로 나가거나 자국의 수상이 되어 "왕 앞에 설" 가능성이 충분하다.

네가 신앙의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러한 자는 아마 덕이 빼어날 것이어서 왕 중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