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8월 28일 수요일 묵상구절 전2:18-26 <수고도 헛되다>

Jeehyun 2024. 8. 28. 14:07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상 20, 고린도전서 2, 예레미야애가 5, 시편 36

묵상구절

2:18 <수고도 헛되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2: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2: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서론


불만족의 원인 (전도서 2:17-26)

사업은 지혜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가지는 일이다. 그들은 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때에는 그들의 영역에 있으나, 만약 자기들에게 일거리가 없으면 불평하게 된다. 그들은 때때로 그 사업으로 피로해질 수도 있지만 싫증을 내는 일이라곤 없으며 그만두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행할 만한 좋은 일을 발견하였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솔로몬이 이미 시험대에 올려놓았던 일이다. 그는 사색하는 생활과 육욕에 빠진 생활을 겪어 본 뒤에 활동적인 생활에 몰두해 보았지만 역시 딴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만족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것 역시 모두가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일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Ⅰ. 그가 시험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해 아래서" 하는 사업이었으니(17 - 20절) 곧 이 세상의 일이었고 지상의 일이었으며 부귀와 명예와 이 현재 시간에 갖는 즐거움이었다. 또 그것은 왕이 하는 사업이었다. "해 위에서도" 행하는 사업이 있으니, 그것은 영속적 사업이며 끝없이 복됨을 누리는 일이다. 우리가 그 사업을(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일") 따라서 행하며 그 복됨을 추구하여 행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수고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없으며 실망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여기에서 거의 만족을 얻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해 아래서 하는 수고" 즉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하는 수고에 (요 6:27; 사 55:2)대한 것이다. 그것은 더 나은 종류의 사업이어서 "삼림을 벌목하고 물을 빼는 치산치수(治山治水)사업" 이 아니었고(만약 사람들이 이런 수고를 싫어한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 하는 사업이었다(21절). 그것은 이성을 사용하는 사업이었고 자기 왕국을 통치하는 일과 국가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일에 관련된 사업이었다.

그것은 지혜의 명령으로, 그리고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의 명령으로 통제되는 수고였고, 정의의 지시에 의해 지배되는 수고였다. 그것은 나라 일을 논하는 회의실과 공의를 세우는 법정에서 하는 수고였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지혜를 과시" 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수고였는데(19절), 이것은, 우리가 천사들의 동류라고 자부케 하는 정신적 재능이, 우리가 짐승과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신체의 재능을 능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단지 자기들의 힘셈을 자랑하는 수고보다 훨씬 뛰어난 수고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업을 수행해 나가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의중에 두는 것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임을 나타내는 일"이며, 재간있는 자요, 분별력과 열심이 있는 자라는 평판을 얻는 일이다.

Ⅱ. 그러나 그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이 일에 곧 싫증을 내게 된 것이다.

1.그는 "자기의 모든 수고를 싫어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 일에서 자기가 기대하던 만족을 얻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는 훌륭한 집과 정원, 그리고 좋은 급수시설을 소유한 지 얼마되지 않아, 그것들을 싫어하고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몹시 가지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갖게 되면 처음에는 좋아하나, 잠시 놀다가는 곧 싫증을 느껴 던져버리고 또 다른 장난감을 가지려고 떼를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은혜로운 증오심, 즉 하나님과 종교보다 이 세상 사물들을 덜 사랑하도록 하라는 우리의 의무를(눅 14:26)표현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죄된 증오심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것을 무조건 혐오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장소와 그 장소에서 하는 일을 지겹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그의 모든 수고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받는 실망감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증오의 표현인 것이다.


💡 2:18 <수고도 헛되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 2: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그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 대하여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다"(20절). 그는 세상사의 허무성을 깊이 인식하려고 애썼다. 즉 그것은 자기가 이전에 세상 일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한 유리한 것과 만족이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피조 세계에서 굉장한 일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단념하기 싫어한다.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그들에게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는 우리가 기대하기 쉽고 소망을 걸기 쉬운 그런 일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우리는 만족이란 풍부한 광맥을 찾아 이 땅을 파고 들어가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런 표적이나 징후조차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탐사에서 언제나 실패만 하였으니 이제 우리도 우리 마음을 평안히 해주고 그 발견작업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 2: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3.그는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싫어하게" 까지(17절) 되었으니, 이는 삶이란 것이 그토록 많은 수고와 고난 그리고 끊임없는 실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심히 넓은 마음과 아주 광활한 마음의 능력을 주셨기에, 그는 이 삶 속의 모든 사물이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과, 세상만사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체험을 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토록 귀중하고 선량한 자에게는 그처럼 축복이 되는 생명 그 자체가 사업에 얽매인 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Ⅲ. 그가 생명과 수고에 대하여 반론을 벌이게 된 이유를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이 그에게 싫증을 느끼게 하였다.

1.그의 사업은 자신에게 너무나 큰 수고가 되었다.

"그가 해 아래서 행한 일이 그에게는 괴로움이 되었다"(17절). 그 사업에 대한 생각과 염려, 그리고 빈틈없고 끊임없이 집중해야 하는 마음은 일에 꼭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부담과 피로를 안겨다 주었고, 그가 노령에 접어들면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저주의 결과이다. 우리 사업은 "우리 손이 하는 일과 수고"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창 5:29)이며, 우리 작업의 수단이 되는 여러 기능의 약화(弱化)때문이고 "우리는 우리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결선언 때문이다. 우리 수고는 "우리 마음에 애쓰는 것"이라고(22절) 불리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애쓰는 것은 압력이 되므로,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업가는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다 불안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23절).


💡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 그는 주간에도 자기 즐거움을 박탈당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낡은 근심"이기 때문이다. 그의 날들은 근심될 뿐만 아니라, 근심 그 자체이기도 하며, 많은 근심들과 다양한 근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노고나 수고는 온종일 비탄 투성이다. 사업가들은 자기들을 괴롭게 하며 그들에게 분노와 슬픔의 원인이 되는 일들을 자주 만난다. 초조해하기 쉬운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거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빈번히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세상은 많은 것을 가진 자들에게까지도 "눈물의 골짜기" 이다. "수고하는" 자들은 "무거운 짐을 졌다"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와서 쉼을 얻으라는 부름을 받는다(마 11:23).

(2) 그는 "밤에도" 그 휴식의 방해를 받는다. 낮의 분주한 일들에 녹초가 된 그는 휴식를 찾자는 희망에서 자리에 드나, 거기에서도 그의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 근심 걱정이 "그의 눈을 깨어 있도록 만들며" 설사 그가 잠이 든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깨어 있으니 "밤에도 아무런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악착같이 세상의 고역을 다 행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안식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아라. 그들은 밤낮으로 편안할 수 없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17절). 개별적으로 "이것은 헛된 것이며"(19, 23절) "헛된 일" 일 뿐만 아니라 "큰 해"이다(21절).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모독이요 그들 자신에게는 큰 손해이기 때문에 "큰 해악"(害惡)이다. 이러한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여 "아침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이니, 그것은 세상의 재물(goods)은 결코 우리의 최고선(good)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그가 벌인 사업의 이득은 모두 타인에게 남겨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익에 대한 기대는 행동의 원천이며 산업에 박차를 가하는 촉진제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은 그 수고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희망이 좌절된다면 수고하려는 기력도 맥이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자기가 이룩했던 모든 업적과 위대한 일들에 대하여 반론을 펴는데, 이는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어떤 영구적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그는 그 일들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죽을 때 그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으며, 그것들에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욥 7:10),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었다(눅 16:25). 그러나 그는 "내뒤에 올 자에게 모든 것을 남겨 주지않으면 안 되며, 사라져 버리는 자의 자리에 오는 다음 세대에게 모든 것을 물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앞에도 많은 자들이 있었으며, 우리가 사는 집들도 그들이 지었던 집들이고 그들이 사다놓은 것, 그들이 수고해 놓은 것 안에 우리는 들어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우리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고 우리가 구입해 놓은 것이나 수고한 것의 열매를 즐기게 될 것이다. 상속자가 없어서 땅이 망실(亡失)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이 일이 하등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의 즐거움을 향유한 차례가 타인에게 돌아간다고 해서 불평해야 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가고난 뒤 우리 뒤에 오는 자들이 우리의 지혜와 부지런함 때문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피조물 속에서 그 행복을 찾는 세상적인 마음은 자기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재물을 이런 불확실 속에 남겨 둔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여간 애가 타는 것이 아니다.

(2) 그가 남겨야 할 모든 것들은 그다지 수고하려 하지도 않았던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고생도 하지 않게 될 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는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혹은 공평) 수고"하여 재산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며 소비하는 자는 "그 일에서 수고하지도(21절) 않았으며"(21절), 더욱이 앞으로도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벌은 날개에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을 정도로 수고하여 꿀을 만든다. 그러나 이같은 부조리는 그를 시험해 보는 올무이다. 그것은 그가 신뢰하고 감수하여야 할 몫으로 "업으로" 그에게 남기어진 것이다. 그것을 업으로 잡지 못하고 놓치는 자는 불행하다. 반면에, 만일 재산이 이처럼 쉽사리 그에게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가 근면함과 동시에 경건하였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어리둥절해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 사실이 다른 식으로 판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잘벌어 들인 것은 재물을 잘 사용하고 그것으로 선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그는 누구에게 그것을 남겨 주어야 하는지를 모른다(상속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기 때문에). 아니면 그는 최소한 자기가 남겨 주는 자가 어떤 사람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받은 것을 더 많은 것으로 불어나게 할 현명한 자인지 아니면 받은 것도 모두 없애 버릴 우매한 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모든 수고의 결과를 다 관리할 것이며 그 아비가 지혜롭게 행하였던 것을 어리석게도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아마 솔로몬은 르호보암이 꼭 그럴 것만 같아 이 글을 쓸 때 매우 감명깊게 썼을 것이다. 성 제롬(St. Jerome)은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해에서 이것을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로움을 나타낸 책들이 누구의 수중으로 들어갈지 알지 못하였으며, 아마 우매한 자의 손에 들어가서 잘 기록된 것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따라 그릇되게 사용되리라고 생각했었다고 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2절). "인간이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얻는 소득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혼자만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저 다른 세상에 가지고 갈 어떤 것을 그는 가지고 있는가?

Ⅳ. 그러므로 이 세상 재산에 대한 최선의 활용법은 그것을 즐겁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으로 그는 이 장을 끝맺는다(24 - 26절). 이런 세상의 물건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발견할 수 없다.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만약 그것에서 행복을 기대한다면 실망으로 인해 "심령의 애"만 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점에서 세상의 사물을 가장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고 자기가 관찰한 불편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위안조차 빼앗아가면서까지 과중한 수고를 해서는 안 되며, 우리 뒤에 올 자에게 부를 남겨 주기 위해 우리가 가진 즐거움의 향유를 상실해서도 안 된다. 그 즐거운 위안물을 우선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여기에서 우리에게 권장하는 선이란 것은 무엇인가? 또 우리가 이 세상의 사업과 이익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고 추출해낼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과 이익은 어떤 것인가? 또 이 세상의 일에 잠재해 있는 "허무성과 성가심" 을 면하기 위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인가?

(1) 우리는 그 재물로써 우리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며 재산을 늘리거나 증가시키는 방법에 골몰하기 보다 우리에게 위탁된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그 재산을 잘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26절에 암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시기" 에 선한 "자들"만 이 생의 위안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데 그들은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있는 의인으로 여기셨던" 노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참으로 선량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모든 일에 있어 그를 시인하도록 열성과 근면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데아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자기 앞에 있는 의로운 길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으로 하여금 선을 누리도록" 해야 하며 또(25절) "율법의 말씀을 연구하며 장차 올 큰 심판 날에 대해 염려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2) 우리는 세상 것이 주는 안락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영혼에게 행복이 되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세상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신체를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몸을 편안하게 지탱시키기 위해 이것들을 이용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영혼에 좋은 봉사를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하는데에 영혼과 더불어 좋은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는 세상 것들이 주는 안락도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지위와 신분에 따라 온건하고도 명랑하게 이 세상 것들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없다." 자기와 그 가족과 친구들이 먹고 마실 것을 이들에게서 취하고 그래서 자기의 감각을 즐겁게 하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낙을 누리게," 즉 이 세상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즐기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다. 세상 것에서는 도저히 얻지 못할 낙을 추구하여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조차 상실 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만드신 분이, 인생에게 사업을 포기하거나 손을 묶어 둔 채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수고한 낙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이들을 사양하지 말고 이용해야 하며 우리의 세속적 사업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용해야 한다.

(3) 우리는 이들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 임을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1] 우리가 즐기는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하는 능력이 만든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풍성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그것들을 받고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주시는 그의 지혜를 보며 그것을 따를 때, 그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맛보고 좋아하며 감사할 "때에라야"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기분좋은 것이 된다.

[2] 그것들을 즐기는 마음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자기 섭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을 우리가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고, 우리가 이 세상 웃음 속에 담긴 하나님 은총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심의 평안도 주셨다. 만약 이 지혜와 양심의 평화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 것에서 어떤 낙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처세에 있어 이 점을 명심해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쳐다 보아야만 할까?

(1)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던 솔로몬 자신은 더 이상 목표삼을 게 없었고 더 나은 것을 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25절).

"누가 이 일에 있어 나보다 승하랴? 이것은 내가 야망을 품었던 바로 그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가진 것과 비교하면 거의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들도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고 자기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그 낙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없이는 그의 뛰어난 지혜로도 이 심령의 낙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기도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 2: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 큰 부(富)도 그것을 소유하는 자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선량한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어" 그의 상으로 삼는 동시에, 이것을 즐겁게 누리게 하며, 또 자선심을 통해 남들에게도 전달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량한" 자들, 곧 그 마음이 착하고 정직하며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모든 인류에게 자애로운 관심을 표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지혜와 지식을 주실 것이며 장차 올 세상에는 의로움과 함께 희락을 주실 것"이다. 갈데아 주석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혹은, 그는 자연적이고 도덕적, 정치적, 신적인 것 등에 관련된 일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주실 것이니 그것은 그들에게 항구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그 재물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재물을 오히려 그 악인에게 대한 형벌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재물은 단지 그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노고를 주시사" 그를 그 자신이 우둔한 분별 속에서만 내버려 두셔서 그것을 "모으고 쌓게" 놔두신다. 그렇게 모아서 쌓아놓아 봐야 그 자신에게는 "두터운 진흙덩이"처럼 무거운 짐이 될 뿐만 아니라(합 2:6) "자기를 치는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자기 살을 먹는 것"이 될 것이다(약 5:3). 한편 하나님은 자신의 강력한 섭리로 그것을 "자기 앞에서 선량한" 자에게 주시도록 계획하신다. "죄인의 재산은 공정한 자를 위해 저축되어 있는 것"이며,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길 자를 위해 끌어모여진 것"이다.

  • 첫째, "경건은 만족스러운 큰 소득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들만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또 하나님 안에서 그 기쁨을 얻는다.
  • 둘째, 불경건은 흔한 불만족과 충족을 모르는 탐욕으로 벌을 받으며, 이 같은 불평과 탐욕은 그 자체가 징벌이 되는 죄악이다.
  • 셋째,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풍성한 것을 주시는 것은 그가 총애하시는 자녀들이 적령기에 다달아서 그것을 인수할 준비가 되면 그 악인들에게서 강제로 되돌려 받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가나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침입하도록 정해진 시기까지만 그 좋은 복지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과 부합된다.

[3] 그럼에도 고통의 노래소리는 여전하다. "이 또한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선량한 사람에게 조차 그것은 헛된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죄인이 긁어모은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는 때에도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것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죄인으로서는 자기가 저축해 온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자들"이 향유하게 되는 것을 볼 때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쪽 길을 택하든 그 결론은 확고부동하다. "모든 것은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