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8월 29일 목요일 묵상구절 전3:1-22 <모든 일에 때가 있다>

Jeehyun 2024. 8. 29. 07:48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상 21, 22, 고린도전서 3, 에스겔 1, 시편 37

묵상구절

3:1 <모든 일에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3: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3: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3: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3: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3: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3: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매튜헨리/옥스퍼드

(3:1-15)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한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 극복의 소망

 💡 3:1-15


인간사의 가변성 (전도서 3:1-10)

이들 성귀가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시간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인간 생활의 여러 조건은 각각 무척 판이하며 또한 무차별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날(日)과 해(年)가 윤회하듯 끊임없이 그런 일을 지나치며 산다. "생의 바퀴"에서는(약 3:6) 하나의 수레바퀴 살대가 맨 꼭대기에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장 아래쪽으로 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들고 나는 만조와 간조가 있으며 부단히 차고 기우는 만월과 신월이 있다. "이 세상의 유행"은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 해가며, 이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2. 때와 철을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최고의 권력에 의하여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으며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오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지정돼 있는 것을 변경시키는 일은 우리 권한 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형통할 때 펀안해야 하면서도 왜 안심해서는 아니 되는지의 이유로써 등장한다. 즉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으며,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제일 낮은 계곡이 최고의 산정(山頂)에 접합된다] 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편안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그가 권면한 대로(2:24),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겸손히 의존하여 "우리가 수고한 낙을 즐기되 희망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지도 말며, 두려움으로 풀 죽지도 말고, 한결같이 평정된 마음으로 모든 사태를 맞아 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한 일반적 명제가 기록되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1절).

  1. 상호간에 극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형세가 순환함에 따라 각기 제 차례를 찾아 활동하게 될 것이다. 낮은 밤에게 제 자리를 양보하며, 다시 밤은 또 낮에게 제 자리를 내어 준다. 여름인가 하면 곧 겨울이 되고 겨울인가 하면 머지않아 여름이 될 것이다. 모든 목적은 그것을 이룰 때가 있다. 아무리 청명한 하늘에도 구름은 낄 것이니, ─Post nubila phoebus─ 즉 기쁨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는 법이다. 극히 구름이 많은 하늘도 쾌정하게 될 것이니 즉 태양은 구름 뒤로부터 뛰쳐 나올 것이다.
  2. 우리에게는 극히 우연한 것처럼 보이고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로 보이는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견(豫見)에서 정확하게 결정된 일이며, 그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한 순간도 앞당겨지거나 연기될 수 없다.

 💡 3:1 <모든 일에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Ⅱ. 개개 사실의 귀납에 의한 그 명제의 증명과 해설이 있다.

그 사례들은 보름과 초하루 사이에서 항상 차고 기우는 달의 공전주기의 날수대로 그 수가 스물 여덟 개다.

이 다양한 변화들 중 일부는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이고 일부는 인간의 의지에 한층 더 의존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천하에는 모든 것이 이처럼 변전무상하나 천상에서는 모든 것이 불변하는 상태에 있으며, 이들 사물에 대한 계획도 불변하다.

  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이 일들은 신의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정한 시각에 우리가 태어났듯이 정한 때에 우리는 죽어야 한다(행 17:26). 본문에는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나 살 때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자들도 있다. 살 때는 너무나 짧아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즉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다시 살아날 때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무덤 속에 누워있는 자들이 기억함을 입는 때이다(욥 14:13).
  2.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심듯 하나님께서 민족을 "심을 때가 있고," 또 이를 위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도록 하시려고 그곳에 "심어져 있던" 일곱 민족을 "뽑아 내실 때"도 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불의가 가득차서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 대해서도 역시 "뽑아버리고 멸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때가 있었다(렘 18:7, 9).

사람들에게도 일년 중 한 때, 저희 일생 중 한 때는 "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심었던 것"이 열매가 없고 쓸모가 없을 때에는 "그것을 뽑아 버릴 때"인 것이다.


💡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1.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널리 퍼져 모든 것을 황폐시키는 때는 "죽이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자비의 길로 돌아오시는 때는 "그가 찢으신 것을 치료하는 때요"(호 6:1, 2) 그가 "백성을 환란"케 하신 후에 그들을 위로하시는 때이다(시 90:15).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게 지배자의 지혜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층 온건한 방침을 취하고 부식제가 아닌 완화제를 적용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2. "헐 때와 세울 때"가 있다. 가정이나 재산이나 나라를"헐 때"는 그것이 너무 성숙하여 멸망하는 때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아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무너뜨린 것을 재건할 "때"를 찾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울 정한 시기"가 있었다(시 102:13, 16). 사람들이 가옥을 "헐 때"가 있고 장사를 그만 둘때가 있으며, 따라서 "세우는 일"에 분주한 자들은 "헐 때"가 있는 것을 예기(豫期)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1. 하나님의 섭리가 "울고 슬퍼하도록" 요구하는 "때"가 있다. 인간의 지혜와 온손한 마음씨는 이 요구에 순응하여 일반적인 재난과 위험의 시기에 "울고 슬퍼"한다. 그러한 때에 "웃고 춤추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사 22:12, 13; 겔 21:10).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명랑함을 명하시는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웃고 춤추는 때"이며 우리가 "마음의 기쁨과 마음으로 그를 섬기도록" 기대하시는 때이다.

애도와 통곡의 시기가 웃음과 춤의 시기보다 먼저 나와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가 처음에는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다음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1.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가 있다. 요새를 철거하고 헐어버림으로써 생긴 "돌을 던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를 주셔서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없는 때이다. 그러나 성채(城砦)를 쌓기 위하여"돌을 거둘 때"가 있다(5절). 실로암에 있던 망대처럼 오래된 탑이 무너지고(눅 13:4) 성전까지도 "돌 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당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국세를 떨치게 되어 탑들과 전승기념비가 세워질 때도 있는 것이다.

 


 💡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1. "안을 때가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 우리 친구가 진실함을 발견하는 때는 우리가 그 친구를 "안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거나 진실하지 못할 때는 그를 꺼리게 되어 포옹을 삼가는 때이다. 그럴 때에는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이 사려깊은 행동이다.

 

이러한 포옹은 고린도 전서 7장 3 - 5절과 요엘서 2장 16절에 설명된 대로 흔히 부부간의 포옹에 적용된다.

  1. "찾을 때와 잃을 때"가 있다. 기회가 미소짓는 때는 돈을 벌고 승진하고 값싼 흥정을 얻고 많은 이익을 보는 때이며 지혜있는 자가 "찾는 때"이다. 그가 세상에 나가 일하고 자기 가족이 불어갈 때나 그가 한창 때를 맞아 번영하며 사업을 영위하는 때는, 그가 분주할 때이며 햇볕이 비취는 동안 건초를 만들 때이고 기회를 활용해야 할 때이다. 자기 손에 재물이 있는 때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를 "얻을 때"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 소모할 때가 올 줄 예견해야 할 것이니, 그 때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때이다. 아니, 쉽사리 획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 쉽사리 흩어져 버리고 꽉 붙잡아 둘 수가 없는 때, 즉 "잃을 때"가 올 것이다.

💡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1. "지킬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이미 획득해 놓았던 것을 사용하는 때이며, 양심을 걸고 모험하는 일이 없어도 지킬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때 곧 "버려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한다면(마 10:37, 38)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리 양심을 그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의 파선을 당하느니보다 가진 모든 것의 파선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나으므로 그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또는 요나가 탄 배의 선원들이 바다로 짐을 내던진 때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대한 사랑이, "우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것을 던져 버리도록 요구할 때가 올 것이다."
  2. 큰 슬픔을 당하는 경우에 하듯이 의복을 "찢을 때"가 있으며, 그 슬픔이 끝났다는 표시로 다시 그것을 "기울 때"가 있다. 우리가 행하였던 것을 철회할 때가 있으며 우리가 취소하였던 것을 다시 행할 때도 있다. 성 제롬은 이것을 유대 교회의 파멸과 복음 교회의 형성으로 해석한다.
  3. "침묵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때"가 있고, 우리 지혜가 되고 우리 의무가 되는 때가 있다. 곧 그것은 악한 때요(암 5:13), 우리가 말하는 것이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이 되는 때요, 우리가 잘못 얘기할 위험 속에 있는 때(시 39:2)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교화를 위해 말해야 할 때도 있으니, 그 때는 침묵이 의로운 주장을 배신하게 되는 때이며, 입으로써 하는 고백이 구원을 이루게 되는 때이다. 말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분별 중 큰 몫을 차지한다.

 


💡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1. "사랑할 때"가 있으며 우호를 나타내고 자유스럽고 명랑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즐거운 때이다. 그러나 "미워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좋아하던 자들과 모든 친밀감을 끊어버릴 명분을 보게 되는 때요, 사랑의 감정이 용납하기 싫어하는 혐의를 둘 만한 이유를 발견함으로써 사랑을 보류해야 하는 때이다.
  2.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칼을 빼어 들고 삼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사람들이 정의와 자기 권리의 유지를 위해 칼을 빼어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열방들이 전쟁을 즐겨 전쟁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의 때"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가 "전쟁을 휴전"시키는 때이며(시 46:9), 종전이 되고 사방 팔방에서 평화를 원하는 추세가 보이는 때이다. 전쟁은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으며, 이런 측면에서 어떤 평화도 영원한 평화라고 불리우지도 않는다.

 

이처럼 이 모든 변화에 있어서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다른 한 가지와 대조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마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고,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도록 하게 하려함이다."


 💡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Ⅲ. 이러한 관찰에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1.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런 영고 성쇠의 변천에 복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우리의 몫을 기대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좋다는 것들도 아무런 확실성이 없고 계속성이 없기 때문이다(9절).

"일하는 자가 무슨 이익을 가지느냐?" 완성되리라고 생각하고 심으며 세웠던 것이 그토록 빨리 또 확실하게 뽑히고 헐린다면 그가 심고 세우는 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수고와 염려는 사물 그 자체의 가변성이나 그 사물에 대한 신의 계획의 불가변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


💡 3: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험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우리가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

 

물건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때에라도 우리에게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한 섭리의 처분을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그 일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은 그 일을통해 우리는 행복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단련을 받고" 다양한 사건의 단련을 통해 여러 가지 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에 의한 시험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심을 소유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로 훈련을 받고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빌 4:12)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하라.

(1) 인간의 자손들 사이에서는 아주 많은 수고와 고생을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신고(辛苦)와 슬픔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2) 이 수고와 고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활당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세계가 우리의 안식처가 되도록 의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편안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3) 많은 자들에게는 이 수고와 고난이 선물이 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주듯,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이런 것을 주신다. 이 노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영원한 안식을 소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가 계속 활동하고 언제나 해야할 일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빈둥거리며 놀라고 보내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변동은 우리를 어떤 새로운 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우리는 변화 그 자체보다도 이 새로운 일에 더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신의 계획의 불변성 (전도서 3:11-15)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세계를 발견하겠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여기서 솔로몬은 그 모든 변화들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우리에게 나타난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만드신 분은 그분 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눈길을 항상 그분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최고도로 선용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그것을 잘 믿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그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11절).

그러므로 시간의 지속하는 한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즐거워해야만 한다.

  1.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대로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신 대로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2. 우리에게 가장 기분 나쁘게 보이는 것도 제때가 되면 아주 어울리는 것이 된다. 더위가 여름에 어울리는 것처럼 추위는 겨울에 어울린다. 제 차례가 되어 돌아오는 밤은 캄캄한 아름다움이고, 제 차례가 돌아온 낮은 밝은 아름다움이다.
  3. 신의 섭리와 그 모든 경륜에는 놀라운 조화가 있어서, 섭리 안에서 되어지는 사건들은 그 시기와 함께 관련성이나 경향성을 고려해 보면 매우 아름답게 나타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섭리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금은 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비가 완성되는 때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가장 적당한 때에 행하여진 것으로 보일 것이요. 그것은 영원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신 32:4; 겔 1:18).

💡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Ⅱ.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로부터 종말까지 만드시는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지금 얽히고 설켜서 뒤죽박죽된 것 같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완전한 발견을 할 수 있기 위하여는 인내로써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 전까지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창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섭리에 있어서도 만사는 잘 행해진다. 그래서 종말이 올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집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그의 마지막 손질을 가하고 완성시키는 화필을 대고 난 뒤에라야 그 전체가 매우 훌륭하게 나타나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서 보는 것은 단지 그 중간 부분이어서 그 처음부터 보지도 못했으려니와(만약 보았다면 그 계획이 신의 의향 속에 얼마나 훌륭히 담기어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었다) 그 행동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또한 보지 못할 것이다(만약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이 얼마나 영화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휘장이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진행과정을 나무라거나 판결을 내리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저희 마음 속에 두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다.

  1. 혹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왜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보다 많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삼는다. 이에 대한 펨블(Pemble)씨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롭고 공평하고 아름다운 사물의 배열에 대한 증언을 하시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신게 아니라, "세계"라는 책 속에서 관찰되도록 그것을 나타내셨고 이것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셨다. 즉 인간사의 진행과 함께 자연의 역사를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염원과 능력을 인간에게 주셔서, 만일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 열중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대상 가운데에서 놀랄 만한 질서와 편리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처럼 모르는 것일까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 이에 대해 레이놀즈(Reynolds) 주교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너무나 많이 마음을 두며, 세속된 생각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세상 일들에 대한 우리 수고에 너무 매여 있어서 그 세상 일속에 뻗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없다."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소유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편견까지도 형성하였다.

Ⅲ.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는 우리 분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묵묵히 따라야 하며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

이 일들 가운데는 확실하고도 지속적인 "선이 없다." 그러나 그 일들에는 어떤 좋은 것이 있는지 여기에 나타나 있다(12, 13). 우리는 그들을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타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가난한 자와 대중에게 그리고 대중과 종교의 이익을 위해 선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몇 가지 유용한 봉사를 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무엇때문에 우리는 우리 존재와 기능과 지위를 가지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다. 가장 참된 즐거움은 선을 행하는 데에 있으며, 그렇게 행한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저축이며 또한 가장 훌륭히 인정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 시간"은 바로 짧고도 불확실한 "이 생"에서이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시간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을 행하는 장소는 바로 "이 생에서"이다. "이 생에서" 우리는 저 다른 생을 위한 시험과 견습의 상태로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생은 자기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어 줄 것을 행하는 기회인 것이다.


💡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편안히 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우리 수고의 낙을 즐기자." 그래서 우리가 수고한 낙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며, 그의 사랑을 맛보고 그에게 감사를 돌리며, 그를 우리 기쁨의 중심으로 삼자. "먹고 마시는 것"도 그의 영광이 되도록 하며 "모든 것이 풍부한 가운데 마음의 기쁨으로 그를 섬기자." 만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토록 불확실한 것이라면, 자기 뒤에 올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저축하려고 현재에 있어서 그것을 아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즐겁게 살고 유용하게 살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좋은 선물로서 그의 섭리의 무한한 은혜가 주시는 선물 중 으뜸가는 좋은 선물인 것이다.


💡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Ⅳ. 우리는 신의 섭리가 개인적 관심사나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 내리시는 모든 처분을 전적으로 흡족히 여겨야 하며 그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틀어 우리에게 지정된 일을 수행하시며, 그의 뜻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시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1. 그 계획은 변경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복종하여 행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하나님께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하는 자는 누구나가 이것을 안다)(14절). "그는 단 한 가지 마음이신데 누가 그를 돌일킬 수 있는가?" 그의 방침은 꺾이는 법이 없고 새 계획을 더하게 되지도 아니하며, 그가 의도하신 일은 시행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을 좌절시키거나 취소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되어지게 하소서"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우리 계획과 이해(利害)에 어긋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1. 그 계획은 변경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 안에 잘못이 없으며 수정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그 광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완전한 것일 것이다. "그것에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며, 또 "그것으로부터 털어낼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이는 그 안에 불필요하거나 남아 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일도 그 어느것 하나라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우리가 더하거나 뺀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시 4:2). 따라서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게로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의 이득인 동시 의무가 된다.


💡 3: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Ⅴ. 우리는 신의 모든 섭리에 나타난 그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를 경건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할 모든 일을 행하시는데," 이것은 인간들 위에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과 그들의 모든 길은 그의 처분 아래 있고, 시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사건도 그의 수중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께로 그 눈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저희 모든 길에서 그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인간들이 만사에서 그를 기쁘게 하기에 세심한 배려를 하게 되고 어떤 일로든 그를 화나시게 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처분을 변경시키시지만, 그의 의향에는 변화가 없으셔서 우리를 혼란시키지 않으신다. 더구나 그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실 리는 없으며, 오히려 자기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이 세상의 통치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종교를 고무시키고 진전시키는 일이다.

Ⅵ.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변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범접(犯接)할 수 없는 일관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가 뜨고 지며 달은 차고 기울지만 다 그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그 운행은 "하늘의 법도"를 따라서 태초로부터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이다(15절). "이미 있어 왔던 것이 지금도 있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최근에 와서 사용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니다. 사물들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항상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장차 있을 것도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세상은 지금만치 나쁘진 않았을 거야" 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우리가 겪는 실망만큼 허무한 것을 경험한 자는 여태껏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거나, "시대는 결코 고쳐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지각없는 말이 된다. 시간은 우리를 개선시켜 줄 수 있으며, 슬퍼하는 시간이 지나면 기뻐할 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공통된 성격과 공통된 운명에 빠지기 쉽다. 세계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기 쉽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이전에 행하신 것을 반복하시며, 그가 지금까지 선량한 사람들을 다루어 오던 것과 꼭같이 우리를 대하신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땅을 버리며 바위를 제 자리에서 옮겨갈 것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며, 그로 인하여 어떤 특별한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은 "단지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형통한 중에 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지나간 고통을 다시 부르실 수 있으시며, 옛 고생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우리의 환락을 빼앗고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시 30:7). 그러나 역경 속에 있다고 하여 낙담하지도 말 것이니 하나님은 욥에게 행하신 것 같이 과거의 위안도 다시 대령시킬 수가 있으신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행동과 환경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의 태도에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하여서도 우리를 문책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환경 속으로 들어갈 때는, 번영하였든지 고생을 당하였든지간에 우리의 이전 상황 속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3:15-22) 짐승과 동일한 인생의 죽음과 심판의 때를 전제한 자기 일의 희락 추구


 💡 3:16-22


인간성의 한계 (전도서 3:16-22)

솔로몬은 여전히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경외를 갖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종교가 없어진다면 인간사이에서 귀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지혜로운 자가 이 세상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귀절에서 그는 권력과 (인간이 야심을 품고 얻으려는 것 중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생명 그 자체도 (인간이 좋아하고 시기하는 것 중 이보다 더 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Ⅰ.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허무가 있다.

최고 신분과 최대의 토지를 가진 자와 권위에 대하여 뭇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왕좌에 앉은자의 허무가 여기에 있으며, 지혜와 정의에게 호소하는 자리 곧 재판석 위에 앉은 자의 허무가 있다. 만약 그가 종교적 율법의 다스림을 받는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신들은 신들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자들 중에 속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그것도 "헛된"것이다.

  1. 경외심을 상실한 재판관은 올바로 재판하지 못할 것이며, 자기 권력을 잘 사용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게 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선을 행하기는커녕 해를 끼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거짓이기도 하며, 자기 자신에게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16절).

솔로몬은 이전 시대에 대한 기록을 읽고 딴 나라에 대한 풍문을 들음으로써, 또 이스라엘 땅에서도 있었던 몇몇 부패한 재판관들의 사례를 통하여 선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재판하는 곳에는 악"이 있음을 알았다. 해위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자행하고 정의를 왜곡시키신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러나 "해 아래서"는 억압당하는 무죄인에게 피난처가 되어야 마땅한 곳이 감옥으로 되는 수가 종종 있다. "존귀한 데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극히 게걸스레 먹는 맹수과 같이 "멸망하는 짐승처럼 된다"(시 49:20). 재판정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악이 나왔지만" 재판이 겉치례로 행해지고 의로움이 기대되던 곳에도 "불의는 있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정의를 위해 피신해 들어갔던 법정에서 최대의 악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헛된 일"이며 "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1) 백성들에게는 그런 자들을 재판관으로 삼느니 차라리 재판관이 없는 게 나을 뻔 했기 때문이다.

(2) 재판관들로서는 권력을 가지고 그런 나쁜 목적으로 사용하느니 보다 차라리 권력을 갖지 않는게 나을 뻔하였다.


💡 3: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1. 재판관은 올바로 판결하지 못한 데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솔로몬이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나 비뚤어진 재판이 자행되는지 보았을 때 그는 대심판관되신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의 심판 날을 기대하였다(17절). "나는 내 심중에 이르기를 이 불의한 재판은 양편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처럼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재판에 대한 검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의인의 주장이 묵살당하지만 그가 의인을 위해 재판하고 변호해 주실 것이며, 악인에게는 심판을 내려 그들이 규정한 모든 불의한 법령과 괴롭힘을 의도하실 것이다(사 10:1)."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교만하고 잔인한 압제자의 종말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형벌도 볼 수 있다(시 92:7). 압제받는 자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이와 같이 재고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내로 기다려야 할 것이니 "또 다른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고난의 날이 오래 지속되긴 하나 해 아래서 행해진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을 "심사할 때" 즉 정해진 때가 가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날을 누리고 있으나 하나님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시 37:13). 비록 우리가 아직까지는 여기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소를 다시 듣고 불평을 시정하며 불공평한 법령을 번복시킬 "때가 있다"(욥 24:1).


💡 3: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Ⅱ. 죽어야 할 숙명을 지닌 인간의 허무함이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땅 위에서 존재하는 "인생들의 신분에 대하여"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게 되며, 종교와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갖지 못한다면 인간의 이성도 인간을 짐승보다 낮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1. 그가 인간의 지위에 대한 이 설명에서 노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명예스럽게 되시고 정당하고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다. 즉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명백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난외주는 그렇게 해독한다)이다.

또한 만약 인간들이 허무와 괴로움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저들로 하여금 자기 탓으로 돌리며 하나님께 비난을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들은 그의 결백을 믿어야 하며, 그가 이 세상을 인간의 감옥으로 지으셨고 인간의 삶을 자기의 고행으로 삼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명예와 위안이라는 양면에서 인간을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창조하셨다. 만약 인간이 천하고 비참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과실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께서(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밝혀내시도록 하기 위하여 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스스로 발견케 하셔서, 자신이 인간의 성질에 대한 "신속하고도 강력한" 심판관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지식과 심판에 맡겨져 있는지는 깨달을 수 있다.

(2) 인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되고 비천하게 되며 굴욕을 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짐승에 불과함을 보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설명을 하고 있다.

교만한 자들에게 그들이 인간에 불과함을(시 9:20)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악인들에게 "그들이 짐승"이며, 종교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총명을 갖지 못한 말이나 노새"처럼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일은 한층 더 어렵다. 교만한 압제자들은 "우는 사자와 어슬렁거리는 곰"과 같은 짐승들이다. 자기 몸만 생각하고 자기 영혼은 유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금수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존재로 만들고, 따라서 짐승과 같은 죽음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이다.


💡 3: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 그가 이 설명을 검증하는 태도를 살펴보자.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속물 근성이 있고, 육욕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인간이 마음을 두고 신뢰하며 행복을 기대하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19절).

혹자는 이것을 무신론자의 말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의 불법을 정당화시키고(16절), 장차 올 심판에 대한 논란을 회피하여(17절), 이 삶 뒤에 또 다른 삶은 없으므로 한 번 죽으면 그로서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솔로몬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어서 시편 49편 14절에 "저희가 양같이 음부에 두어진다"고 한 그 아버지의 말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그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사람과 짐승이 단지 외적인 관점으로는 (레이놀즈 감독이 설명하듯)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세상의 부귀와 공명도 헛된다는 것이다.

(1) 인간과 짐승에 대한 일은 무척 흡사한 것같이 보여진다(19절). "인간의 자손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짐승들에게 임하는"일과 다를 바 없다.

인체에 관한 그 많은 지식은 동물의 몸을 해부함으로써 얻어지고 있다.

홍수가 옛 세계를 휩쓸었을 때, 짐승들은 인류와 더불어 멸망당하였다. 전장에서는 군마와 사람이 같은 무기로 살륙을 당한다.


💡 3: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 지각있는 안목으로 보면 이 양자의 종말도 역시 흡사하게 보인다. "그들은 다 동일한 호흡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공기를 마신다. 그래서 "코로 생물의 지식을 호흡하는 것"이라는 말은(창 7:22) 이 양자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는다." 그들의 호흡에는 눈이 보이는 차이가 없으며, 죽음은 짐승과 사람에게 극히 동일한 변화를 일으킨다.

[1] 인간과 짐승의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표하는 경의(敬意)의 차이를 제외하면 똑 같다. 사람이 나귀와 함께 매장된다고 한다면(렘 22:19) "짐승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인가? 모세 율법에 의하면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불결한 짐승이나 새의 사체를 만지는 것보다 의식적(儀式的) 오염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한 곳으로 간다"고 관찰하고 있다. 인간과 짐승의 시체는 다 같이 부패한다. "모든 것은" 원래 "티끌에서 나왔"으니 이는 우리가 보건데 썩으면 "모든 것이 다시 티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이 죽어서 극히 짧은 시간 내에 흙으로 환원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짐승과 한 곳에 묻혀야 하고, 그 짐승들의 티끌과 섞어야 한다면, 우리 몸이나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뻐길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 그들이 영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차이다(21절). 인간이 죽으면 그 "영"이 올라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영은 그 영을 지으신 영들의 하나님께로 "올라가" 서 그 영들의 세계에 연합한다. 즉 그 영은 신체와 함께 죽지 않고,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속(救贖)된다"(시 49:15). 그것은 "위로 올라가서" 심판을 받으며 하나의 불변의 상태로 결정된다.

"짐승의 영이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 같다. 짐승의 영은 몸과 함께 죽는다. 즉 몸이 죽으면 그 영도 멸망하고 없어진다. 짐승의 영혼은 훅 불어서 끈 촛불처럼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초롱에서 꺼낸 촛불과 같아서 촛불이 없는 초롱은 실로 쓸모없는 빈 껍질로 남게 되고 촛불 그 자체는 더욱 밝게 타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인간과 짐승 사이에는 있다. 또 이것은 왜 인간들이 "자기 애착을 위에 있는 일들에 두어서" 그곳으로 영혼을 끌어 올려야 하고, 자기들의 영혼이 짐승의 영혼과 같이 이 땅에 집착하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차이를 "누가 아는가?" 우리의 신체적 눈으로써는 우리의 영혼이 올라가는 것과 짐승의 영혼이 내려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육욕적 감각주의자들처럼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저희 눈에 보이는 대로 걸어가고," 자기 자신의 판단 법칙에 의해 다른 어떤 발견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짐승보다 뛰어난 게 없다."

"누가 알랴?" 즉 누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는가?(사 53:1)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더 잘 살핀다면 이 세상은 모든 점에 있어서 한층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혹은 마치 자기들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짐승들과 같이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짐승처럼 살아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으며 그런 자에게 있어서는 이성의 존귀한 여러 기능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없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1. 이상의 것으로부터 이끌어 낸 추론은(22절)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일들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며 부귀와 공명에서도 이보다 나은 것을 얻어 낼 수는 없다. 즉 자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지켜야 한다. 즉

 

(1) 맑은 양심을 지니고 결코 "불의를 의로움의 자리"에 들여놓지 말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일을 분명히 밝히고" 그 일 가운데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입증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는 자기 혼자만의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갈 6:4).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 것외에는 어떤 것이든 얻지도 지니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고후 1장 12절을 참조하라.

(2) 명랑한 삶을 누려라.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가 노동한 일들을 번창하도록 해 주셨다면, 우리는 그 사업을 기쁘게 여기고 그 일이 주는 안락을 누려야 하며 그것을 무거운 짐처럼 여기거나 그 기쁨을 타인에게 넘겨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분복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우리 영혼의 몫이 아니고(이 생에서 자기 몫을 갖는 자들은 비참하다. 시 17:14 . 그리고 이 삶속에서 그 몫을 선택하고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는 바보이다. 눅 12:19), 우리 몸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기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얻는 우리의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얻어질 만한 것을 취하는 것이고 그 취한 것을 가장 잘 선용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이유는 "무엇이 우리 뒤에 올 것인지," 어떤 자가 우리의 소유물을 차지하며, 또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것인지를 아무도 우리에게 보여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고 나면 아마 우리는 우리 뒤에 일어나는 일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저 세상과 이 세상 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통신수단도 없다(욥 14:21). 저 다른 세계에 있는 자들은 전적으로 그 세계에 몰두하여 이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 가족이나 일반 대중이 "우리 뒤에 어찌될 지" 예견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올 시대와 계절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염려를 억제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된다. 죽음은 이 생에 대한 최후의 작별이므로 우리의 앞에 있는 또 다른 삶에도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