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29, 요한복음 8, 잠언 5, 갈라디아서 4
묵상구절
20:1 <예레미야와 바스훌>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20: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20: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20: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20: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바스훌의 죄와 운명(예레미야 20:1-6)
Ⅰ. 예레미야에게 대한 바스훌의 부당한 반감과 그 노여움의 결과(1,2절).
바스훌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그 자신의 반열에 속했고 그와 똑같이 제사장이었던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여호와의 집 제사장이었다. 즉 바스훌은 여호와의 사역자들인 제사장들의 이익을 도모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직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자기가 응당 애호해야 할 사람의 박해자가 되었다. 그는 임멜(Inner)의 아들이었다. 즉 그는 제사장들 중에서 열 여섯번째 반차에 속했다(대상 24:14). 즉 임멜은 열 여섯번째 반열의 아비(조상)인 셈이다. 스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했다고 하는데(눅 1:5) 아비야는 여덟째 반열에 시조다(대상 24:10). 그렇게 하여 이 바스훌은 21장 1절에 나오는 바스홀과 구별된다. 즉 후자는 다섯째 반차에 속한 인물이었다. 바스훌은 "성전의 유사장" 이었다.
아마 그는 "짧은 기간" (pro tempore) 동안만 유사장이었을 것이다. 즉 자기가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 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 노릇을 했을 것이다. 즉 자기가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 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 노릇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대제사장 바로 밑의 부대 제사장이었든지 성전 책임자(행 4:1)나 성전 경비병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이런 그가 예레미야의 큰 원수였다는 것은 놀랍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신성한 의무와 관심을 표명하는 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대한 최대의 악의가 발견되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칠 기회를 얻으려는 악한 목적으로 도벳 골짜기에 가서 그의 예언을 들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자가 예레미야와 함께 도벳 골짜기로 간 제사장의 어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도벳에서 여호와의 집 뜰로 돌아왔을 때 바스훌이 그의 말을 직접 보고 들었을 법도 하다. 그래서 1절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예레미야가 이 일을 예언하고 있을 때 그가 그 예언을 들은지라."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읽는 대로 다른 사람이 그 정보를 바스훌에게 가져 왔고 그는 그 사람에게 이것저것 깨물었던 것이다.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했다는 것을 들은지라." 그는 예레미야가 이런 일들을 예언했다고 듣지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자기가 유사장으로 있는 여호와의 집뜰에서 예레미야가 감히 자기 허락도 없이 설교를 했다는 것은 바스훌로서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교회의 권력이 남용될 때 그것은 교회를 해치는 가장 위험한 권력이 된다.
1. 바스훌은 격분하여 예레미야를 때렸다.
그는 손바닥이나 권세의 지팡이로 예레미야를 쳤다. 이렇게 친 것은 아마 대제사장이 바울을 치라고 명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예레미야를 망신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레미야를 해칠 심산으로 많이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는 불한당처럼 예레미야를 혹독하게 구타하였을 것이다. 농부들은 종들을 때렸다고 책망을 듣는다(마 21:35). 여기서 일을 처리한 방법은 불법적이다. 대제사장과 나머지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의 신임을 묻고 심사해야 마땅하였다. 그들은 회의를 열어 그가 그렇게 말할 권세를 지니고 있는 지의 여부를 조사했어야 올바른 처리를 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정한 규칙은 한갖 허울뿐인 형색으로 외면되고 무시되고 있다. 옳든 그르든 예레미야는 도태되어야만 했다. 경건의 원수들은 결코 공평의 법칙에 구애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2. 바스훌은 그를 착고에 채웠다.
흑자는 이 착고를 유폐 장소로만 파악한다. 즉 그는 예레미야를 투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바싹 조이는 기구로서 그에게 고통과 망신을 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흑자는 이것을 목과 팔에 씌우는 칼로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우리처럼) 이것을 그의 다리에 채우는 한 벌의 착고로 생각한다. 그게 어떤 기구였든지 간에 예레미야는 그 착고를 차고 밤새도록 베냐민의 윗문에 머물렀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 안이나 곁에 있었다. 아마 이 문은 예루살렘성과 성전 사이를 드나드는 통용문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러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착고를 차고 밤새도록 있는 셈이다. 바스훌은 이런 식으로 그를 징계하여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바스훌이 이와 같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경멸받고 얄밉게 보이도록 한 것은 그가 예언을 하더라도 존중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극히 선한 자라도 이 각박하고 은혜를 모르는 세상에서는 최악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시대의 최대 축복이 만물의 찌끼로 간주되었다(고전 4:13). 바스훌 같은 자가 재판석에 앉아 있고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 착고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 어찌 경건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랴! 사람과 사정이 다른 국면을 띠고 나타날 다른 생이 이 생 뒤에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Ⅱ. 바스훌에 대한 하나님의 지당하신 노여움과 그 증거. 다음 날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주었다(3절).
아마 바스훌은 상례를 따라 그를 거기에 머무르게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바스훌에게 말해 준다. 우리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 채웠을 때 그가 바스훌의 행위를 꾸짖었다는 증거를 찾아보지 못한다. 그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 학대를 감수했던 것 같다. 그는 고난을 받되 위협하지 않았다(벧전 2:23). 그러나 바스훌이 그를 착고에서 풀어 주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에 한 말씀을 두셨다.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가책을 받을 터였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매일 때에도 그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딤후 2:9). 우리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치고 학대함으로써 무엇을 노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가 노린 게 무엇이든지 그것은 상관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그가 실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바스훌은 그의 잘못을 꼬집어 주고 백성에게 대한 그의 명성을 감소시킬 것 같은 자를 침묵시킴으로써 자기 자리를 든든히 하며 자기를 편안히 하겠다고 생각했던가?
그러나 그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가 입을 다물더라도 바스훌 자신의 양심이 정면으로 대들고 항상 자기를 못살게 굴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증하느라고 그는 마골밋사빔(Magor-missabib) 즉 "주의의 공포, 사방으로 두려움" 이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부르신다면 그는 꼭 그대로 될 것이다. 이것은 잠언적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난과 절망 가운데 있다고 한다. 사면 팔방에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다윗처럼 사람운 위험에 둘러 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 시 3:6; 27:3) 어디를 둘러 봐도 두려움이 있게 될 것라고 본문은 말한다. 전혀 위험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라도 사람은 이렇게 될 수 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며" (잠 28:1)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 (시 53:5).
바스훌의 경우가 바로 그렇게 될 것이다(4절). "보라 내가 너로 네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라. 즉 너를 끊임없이 놀램을 당하게 될 것이며 네 자신의 공상과 상상으로 끊임없이 불안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담이 큰 죄인이라도 제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놀라게 하여 의무 이행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아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자기 잘못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양심한테서 그 잘못을 지적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이지만 양심은 가슴속에서 책망한다.
양심은 기를 죽일 수도 없고 침묵시킬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 두려움이 되는 자는 불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자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두려움이 되면서도 이를 숨기고 남들에게 명랑한 척한다. 그러나 "내가 너로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라 너는 언제나 굉장한 공포와 전율을 표시하기 때문에 네 모든 친구들은 너와 사귀지를 두려워하고 네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할 것이다." 깊은 우울증과 정신 착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도 두려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늘 우리 이성을 활용하게 해 주시며 양심의 평화를 얻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2) 바스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그들은 바스훌이 신뢰하던 자들이었다. 아마 그는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일에 이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려고 궁리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대적한 일로 그에게 당장 죽음의 일격을 가하시지 않으시고 그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던" 가인(창 4:12)처럼 끊임없는 놀램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신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신적 공의의 기념물이 될 것이다. "무엇이 이 사람을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두는고?" 하는 물음이 나오면 "그것은 예레미야를 착고에 채운 데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 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바스훌을 격려해야 할 그의 친구들은 모조리 멸절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의 눈은 그것을 보게될 것이다." 그 두려운 광경을 그의 두려움을 한층 더 크게 할 것이다.
(3) 그는 결국 자기의 두려움이 무근한 것이 아니라 신의 복수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6절).
그와 그의 가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옮기울 것이다. 그는 요시아처럼 재앙이 이르기 전에 죽지 않고 딴 사람들처럼 살아서 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포로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며 사실상 쇠사슬에 묶은채 매장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스훌의 운명은 이처럼 암담하다. 핍박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읽고 전율을 느껴야할 것이다. 파멸의 전율을 당하기 전에 회개의 전율을 해야 할 것이다.
2. 바스훌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멸망을 방지할 심산이었던가? 그는 예레미야의 신망을 실추시킴으로써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이 땅에 떨어지게 할 목적이었던가?
그랬을 법도 하다. 6절에 보면 그가 예언자로 자처하며 백성들에게 평강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 것같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거짓 예언을 하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기 예언과 상충하였고 자기가 좌중에서 편안히 잠재우려고 노력하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에 각성할 듯했으므로 예레미야를 대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없었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쳐서 예언한 자기의 말을 고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입을 통해서 그 말씀을 되풀이하신다. 자기를 책망하고 경고해 주는 자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이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말을 못하게 한다 해도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1)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4절).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라." 이 나라는 오래도록 하나님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이 땅에 대한 권리를 느부갓네살에게 넘겨 주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이 땅의 주민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것이다. 그가 더러는 칼에 붙이고 더러는 포로로 데려 가되 아무도 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2) 그 성도 멸망할 것이다(5절).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 성을 약탈할 것이며 그 안에 있는 귀중품은 전부 다 바벨론으로 가져 갈 것이다.
[1] 느부갓네살은 그들의 무기고와 군수 창고(본문에서는 이 성의 힘이라고 일컫고 있다:한글 개역 성서와 다름)를 점령하여 거꾸로 그들을 대적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들의 힘으로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뛰쳐나가자 이들이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힘이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다.
[2] 그는 그들의 모든 상품 즉 잡화와 교역품을 다 가져 갈 것이다. 본문은 이 상품을 "그들의 소득" (원래의 뜻은 수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 상품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인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의 아름다운 주택과 값비싼 가구들을 약탈할 것이다. 본문에서 이들을 귀물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굉장한 애착심을 가졌던 때문이다. 병정들의 손이 닿지 않는 하나님의 귀하신 약속 가운데서 귀물을 확보하는 자는 복이 있다.
[4] 그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서 왕관의 보석들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가져갈 것이다. 이 사례는 누구보다 먼저 히스기야에게 경고된 재난이었다. 히스기야는 오래 전에 바벨론왕의 사신들에게 자기 보물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에 대한 발로 이 재난을 경고 받았던 것이다(사 39:6). 그들은 보물이 자기들을 방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도도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보물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적의 손쉬운 먹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 2절: 예레미야의 핍박
- "예레미야를 때리고" (wayyak et Yirmeyahu)
- "때리다"(nakah)는 가혹한 매질을 가하다는 뜻.
- 예레미야는 채찍질을 당하고, 감금되어 조롱받았다(렘 37:15).
- "성전 윗문 베냐민 문에 두었다" (wayyiten oto el-hamapeket asher be-sha’ar Binyamin)
- "베냐민 문"은 성전 북쪽 출입문으로, 공개적인 수치와 조롱의 장소였다.
-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는 현실을 보여줌(마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