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3월 20일 목요일 묵상구절 렘21:1-10 <여호와께서 두신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Jeehyun 2025. 3. 20. 08:48

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1, 요한복음 10, 잠언 7, 갈라디아서 6

묵상구절

21:1 <여호와께서 두신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2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21:3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2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21:5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21:6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2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2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21:9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21: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예레미야에게 보내는 시드기야 왕의 전갈(예레미야 21:1-7)

Ⅰ. 시드기야왕은 곤경에 처하지 예레미야 선지에게 매우 겸손하고도 예절바른 전갈을 보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않았다는 비평을 받은 자는 바로 이 시드기야였다(대하 36:12). 그는 때때로 자신을 낮추기도 했지만 늘 겸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필요가 겸손을 강요할 때까지는 결코 겸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낮추었다고 해도 그것은 선지자의 조력을 원해서였다. 그는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이거나 그의 권고를 받을 정도로 겸비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시드기야왕이 당면한 재난.

느부갓네살이 그를 쳤으니 그 땅을 침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성을 공략하고 사실상 포위하고 있었다. 악한 날을 멀리하고 있던 자들은 그 날이 엄습하면 한층 더 두려움에 질리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사역자를 업신 여기던 자들도 그 때에는 아마 그들과의 친분을 구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2. 시드기야가 보낸 사자는 바스훌과 스바냐였다.

바스훌은 제사장 중 다섯째 반열에 속했고 스바냐는 스물 네번째 반열에 속했다(대상 24:9, 18). 그가 이렇게 신분 높은 자들을 보낸 것은 잘한 짓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직접 회담하였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 그가 만약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었더라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선지자는 쉽사리 그 제의에 응했을 것이다. 아마 이들 두 제사장은 나머지 제사장보다 더 나흘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에게서 명령을 받자 그들은 선지자에게 정중한 전갈을 가지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위신이 손상되는 일이었고 예레미야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예레미야는 "내가 어찌하여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20:18) 하면서 경솔히 말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위에 언급한 불평을 말할 때보다 나은날을 보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는 명망을 가진 자로 등장한다. 형편이 좋지 않을 때 "언제나 요모양 요꼴일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멸시받는 자들이 존경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실 것이라고 약속되었고(삼상 2:30)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던 자들은 그들에게 몸을 굽혀 나오리라고 약속되었다(사 60:14).

3. 그 전언 자체

.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2절). 갈데아 군대가 그들의 국경을 넘어 침입하고 그들의 심장부로 진격하자 그들은 결국 예레미야가 진정한 선지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점을 시인하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하여튼 그를 참 선지자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확신이 서자 그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소원하였다. 이는 예레미야가 다른 어느 선지자들도 갖지 못한 세력을 하늘에서 행사할 수 있다고 믿은 때문이다. 다른 선지자들은 평강에 대한 희망을 미끼로 그들을 안심시키기만 했었다. 이제 그들이 예레미야를 이용하려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이사를 진단해 주도록 요청함.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문의하라(이렇게 읽을 수도 있음). 지금까지 우리가 취한 모든 대책은 전부 소포로 돌아갔으므로 현재의 긍지에서 우리가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하는지 그에게 물어보라." 은혜의 지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지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섭리의 지시를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 주도록 요청함.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하나님께 우리를 위한 중재자가 되라." 형통 중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사역자들의 기도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과 사역자들의 도움을 감지덕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희 기름을 우리에게 나눠 달라" (마 25:8). 그들이 즐겨 기다리는 혜택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를 위해 베푸신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행하시면 원수가 포위를 풀고 우리에게서 떠나리라" 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전 관심사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화해가 아니라 환난의 모면이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 원수가 우리를 떠나리라" 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바로도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네게서 떠나게 하라" (출 10:17) 고 했다.

[2] 그들이 모든 희망은 하나님께 과거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때 기사를 베푸셨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역대하에서 읽듯이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성을 구원하셨던 것이다(대하 32:20, 21). 그들은 그가(전에 행하셨듯이)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면 분명히 이들 포위자들을 설멸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드기야와 히스기야의 차이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히스기야 당시에는 왕이나 백성이 전체적으로 개선하고 경건히 지내었지만 이 시드기야 시절에는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했던 것이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때의 정반대인 것이다. 우리가 불의를 고수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순전을 고후하는 자들을 위해 행하신 것같이 우리에게 행해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Ⅱ. 이 전갈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아주 놀랍고도 신랄한 응답을 보내신다.

만일 예레미야가 이 전갈에 직접 대답했다고 한다면 그는 이 전갈이 선한 의도를 다소 표시하는 것으로 낙관하여 위로의 답변을 했을 법하다. 그는 재앙의 날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전갈을 극히 선의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보다 그들의 심정을 더 잘아시기에 위로의 말이라곤 한 마디도 없는 대답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시는데 이것은 다음 사실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셨고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크나 큰 일들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맺은 언약에 순응하사 아직도 그들을 위해 큰 일을 예비하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은 헌재 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리 태도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서 예고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신변보장을 위한 그들의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실 것이며 무익하게 만드실 것이다(4절).

"나는 너희 손을 가르쳐 전쟁에 익숙하게 하거나 너희 칼날을 날카롭게 하기는커녕 도리에 너희가 공격군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할 때 내가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돌이킬 것이다. 그 병기는 너희가 의도하는 일격을 가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 병기는 너희 면전으로 되퉁겨 와서 너희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하나님을 원수로 삼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제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2. 포위자들은 순식간에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이며 모든 재물과 병력을 다 지배하게 될 것이다.

" 내가 이제 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성중에 모아들이리라." 예배의 중심지였던 곳이 악의 소굴이 될 때 하나님이 그곳을 파괴자들의 집합처로 만든다고 해서 이상 할 것은 없다.

3.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원수가 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친절히 해 줄 수 있는 자가 누구랴? 예레미야 자신도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지 않은가!(5절)

"나는 과거 이와 비슷한 경우에는 너희를 보호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보호하긴 커녕 내가 친히 너희를 칠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선전포고하실 것을 각오해야 마땅하다.

(1) 하나님은 당적할 수 없는 승리자의 권능으로 치실 것이다. "내가 든 손(펼친 손)과 강한 팔로 너희를 치리라." 하나님의 든 손을 멀리까지 닿을 것이며 그 강한 팔은 철저한 가격을 하고 심한 상처를 입힐 것이다.

(2) 하나님은 흠잡을 데 없이 의로우신 분의 분노로써 치실 것이다. 그것은 사랑 중에 하시는 경계가 아니라 노와 분과 대노로 하시는 처형이다. 그것은 분노한 가운데 맹세하신 판결이어서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4.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공성자들을 향해 출격하기를 거절하고 그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칼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6절).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라." 식육(食肉)을 위한 짐승이나 보병과 기병의 전쟁용 짐승이나 다 치실 것이다.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적병이 그들을 둘러싸고 진영을 설치해 있는 동안 성안에서는 역병이 창궐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이 일시적으로는 갈데아 인들을 저지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심판을 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병은 하나님의 화살이다. 이 역병의 화살은 어떤 화살이 날아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까지 맞힐 수 있다.

5. 칼과 기근과 역병에서 살아남은 왕과 백성들은 갈데아 인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 갈데아 인들은 냉혹하게 그들을 멸절시킬 것이다(7절).

"갈데아 인들은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동정을 잃어버리고 그의 자비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키는 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자비를 얻을 줄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법은 이미 발효되었으니 예레미야가 그들을 위해 여호와께 간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왕과 백성에게 대한 충고(예레미야 21:8-14)

예레미야에게 보낸 정중한 전언으로 보건데 왕이나 백성이 모두 선지자에게 대한 존경심을 품기 시작한 것 같다. 예레미야로서는 자신을 위해 이를 호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신 대답은 이제 갓피어오르는 그들의 존경심을 산산조각이 나도록 하기에 충분했고 선지자에게 대한 적개심을 이전보다 더욱 타오르게 하기에 족했다. 전항에 나온 예언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훈령도 그들을 격분시킨다.

Ⅰ. 그는 백성들에게 살아 남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갈데아 인에게 항복하는 것 뿐이라고 권고한다(8-10절).

이 계책은 그들을 아주 노엽게 하였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하는 말만 듣고 최후의 일각까지 사수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적군을 막고 있는 성벽의 견고함과 병사들의 용맹을 신뢰했거나 아니면 포위를 풀기 위한 외국의 원조를 믿고 기다렸을 것이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장담을 하고 있다.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불로 사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인 때문이다. 하나님은 화를 위해 이 성을 보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황폐하게 만들려고 하신다. 이 화는 그 안에 복이 전혀 섞여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이 악화된 상황을 그나마 최대한으로 선용하려면 갈데아 인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구걸하며 항복하여 포로가 되어라." 랍사게가 유대인들을 설득하여 이렇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 편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사 36:16).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고 계시기 때문에 갈대인에게 항복해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을 것이다.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율법이나 선지자가 그들 앞에 생명과 사망을 제시한 적은 비일비재였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살고 불순종을 고집하면 죽으리라는 것이다(신 30:19).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명을 경시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표현을 여기에서 사용하고 잇다(8절).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그러나 이것은 신명기의 말씀처럼 근사한 제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한 딜렘마를 뜻한다. 즉 두 가지 화 가운데서 보다 작은 화(禍)를 선택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보다 덜한 그 재앙은 치욕적이고 비참한 포로 생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이 구명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 길밖에 없었다.

이 성에 거주하면서 이 성이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으로 신뢰하는 자는 기필코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성 밖에서 칼로 죽거나 성안에서 기근이나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기를 푹 죽이며 헛된 희망을 포기하고 성 밖으로 나가 갈데아 인에게 투항할 수 있는 자는 그 생명을 노략한 것같이 얻을 것이다. 그는 자기 생명을 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한 용사한테서 노략물을 탈취하듯 아주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겪고서 구명도 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5)라는 표현과 흡사하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는 전부가 다 멸망당하는 판국에 목숨을 부지하여 탈출하게 됨으로써 노략물을 나누는 자와 필적할 만한 놀라운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선조들이 앗수르인들에 대해 행한 것같이(사 33:23) 갈데아 진영을 약탈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신중히 생각해서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노략물의 전부이다. 이제 누구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이 권면을 그들에게 다소 인정을 받아 모두가 이 충고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바로는 거의 아무도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마음은 멸망이 이를 정도로 강퍅하고 완악했던 것이다.

Ⅱ. 그는 왕과 방백들에게 잘못을 고치고 선을 따르며 자기 직분에 충실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그에게 전갈을 보낸 자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 답변에는 왕의 집에 대한 특별한 말이 들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을 칭찬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아니라(그들이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 경의를 표했으니만치 아첨이나 찬사는 선지지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건전한 교훈을 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라." 주의깊게 그리고 부지런히 판결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자기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행정관들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다.

너는 판결을 빨리 행하라. 너는 네게 들어온 호소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공정한 판결을 하며 너희가 행했듯 불쌍한 청원자들을 지치게 만들지 말라. 전날 숙취를 늦잠으로 해결하려고 아침나절에도 잠자리에 누워 있지 말며(방백들처럼, 전 10:16) 신체를 편안히 하는 데 아침을 소비하지 말고 신속한 일 처리에 아침 시간을 소비하라. 너는 너를 압제하는 자의 손에서 구출받기를 원하였고 하나님이 이 일로 네게 공의를 행해 주신 것을 기대하였다. 그렇다면 너도 네게 의뢰하는 자를 공정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너는 그들을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대하여 내 노가 특정한 방법으로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극히 잘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너희는 너희 악행으로 인하여 최악의 낭패를 당하게 되리라."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이 말씀은 그들이 의무 이행에 태만했으므로 이 모든 파멸이 초래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을 점화시킨 것은 그들의 악행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백히 그는 왕의 집부터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기도에 의한 혜택을 입고자 하는 자는 선지자의 책망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는 때문이다.

2. 이 말씀은 그들에게 국가적 개혁을 위한 올바른 방법을 제시해 준다.

위정자들이 먼저 본을 보이고 나면 민중도 개혁할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방백들이 잘못된 것을 벌하는 데 권력을 사용해야만 백성도 어쩔 수 없이 잘못된 것을 고치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그들이 다윗의 집 사람이기에 다윗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다. 다윗은 자기 백성에게 공평히 판결한 왕이었던 것이다.

3. 이 말씀은 평안이 연장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준다(단 4:27).

그들이 만약 어떤 일로 파멸 직전에 회복이 된다면 바로 이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