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7, 요한복음 16, 잠언 13, 에베소서 6
묵상 구절
20: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친 광야에 도착하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렀는데, 미리암이 죽으므로 거기에 묻혔다.
20:2 회중에게 물이 없으므로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려고 모였다.
20:3 백성이 모세와 다투면서 말하였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20:4 너희가 왜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가축들이 여기서 죽게 하느냐?
20:5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여기는 씨 뿌릴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20: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20: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0:8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네 형 아론이 회중을 소집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위에게 명령하면 그것이 물을 낼 것이다. 이와 같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
20:9 모세가 그 명령하신 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았다.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바위 앞으로 소집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들어라, 너희 반역한 자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하겠느냐?" 하고,
20:11 모세가 자기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솟아나와 회중과 그들의 가축이 마셨다.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20: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것을 므리바 물이라 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매튜 헨리/옥스퍼드
- 스페셜포인트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교두보였던 동시에 38년여의 광야 방랑과 그 기간을 통한 출애굽 제 1세대의 사멸이 선언된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였던 가데스 바네아에 재집결하여 다시금 가나안 정복 행군을 재개하면서 실로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이스라엘은 B.C. 1406년 6.7월경 모압 평지에 도착한 이후에는 더 이상 민족 전체의 대이동 없이 이를 최후의 주둔지로 삼아 명령대로 전투 부대만 파견하여 일단 요단 서편 지역의 가나안 땅을 단계벌로 정복하게 된다.
- 가데스 바네아 재집결 및 미리암의 죽음과 므리바 물 사건(20:1-13)
- 에돔 땅 통과 요청에 대한 에돔왕의 거절과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우회 행군(20:14-21)
- 초대 대제사장 아론의 죽음(20:22-29)
- 가나안 족속에 대한 최초의 승리, 아랏 전투(21:1-3)
- 불뱀과 놋뱀 사건 발생(21:4-9)
- 호르산에서 비스가산 근경의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 요약(21:10-20)
- 아모리 왕 시혼의 처형과 아모리 족속의 일파가 세운 바산 왕국의 정복(21:21-35)
- 거기에는 가슴 설레는 행군이 있으며 빛나는 승리들이 있었다.
- 반면에 선민 이스라엘의 전혀 선민답지 못한 불평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들,
- 주변 국가들과의 마찰로 인한 행군 여정의 고통,
- 그리고 출애굽 시대의 새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 및 모세의 사망 예고 등도 있었다.
- 이중 미리암과 아론은 각각 B.C. 1406년 1월과 5월 1일에 차례로 임종을 맞이하였다.
-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일면 그저 가데스에서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의 사전적 나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이 본문 말씀 앞에서 실로 인생 전체에 대한 새삼스러운 조명과 인식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이같은 하나님의 거듭된 사죄와 자비에 의해 구속사의 대상이자 통로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듭 주어지는 은혜의 기회들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한 구속사의 연속성은 결국 우리 구원의 견인, 즉 우리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과 우리 앞에 열려 있는 풍부한 은혜의 기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얼깨워 준다.
- 그러나 어제 다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한 새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마당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재기하였거나 심기 일전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일거에 진멸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마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기회(New Opportunity)를 주셨기 때문이었다.
-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의 각종 사건을 기록한 제 20, 21장의 그 행군 기간 동안 일어났던 독립된 각 사건 중 주요 사건을 파노라마 식으로 제시하는 취하고 있다. 일단 이의 일람을 위하여 그 기본 내용 전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본단락에서부터 시작되는 제 20,21장 사이의 총 일곱 문단은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 재집결한 후 요단강을 도하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을 개시하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서 출애굽 광야 시대의 최후의 기착지였던 모압 평지(Plain of Moab)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약술하고 있다.
- 때로 재출발이 첫 출발보다 더 감격스러운 경우가 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 대반역 사건으로 야기된 38년여의 광야 방랑 생활을 마처고 B.C. 1406년 1월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재집결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의 개시를 위한 행군을 재개한 경우에도 해당되는 사실이었다.
● 므리바의 물 사건(민수기 20:1-13)
그들은 38년 동안 사막에서 긴 행군보다는 지루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뒤에는 홍해가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 군병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아 다시 방랑의 길을 계속해야 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 와 있다. 지금까지 그들은 미로와 미궁 속을 헤메었다. 그러는 동안 형을 받은 폭도들에 대한 선고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이 다시금 정도에 들어섰다. 그들은 가데스에 머물었다(1절). 그러나 가나안 국경에 접해 있는 가데스 광야가 아니라 에돔의 경내에 있는 다른 가데스였으며, 약속의 땅은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홍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이었고, 그들은 급히 가나안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를 40여 년 간이나 방황한 끝에 원출발점인 ‘가데스’ 로 돌아와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오늘날 죄악된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Ⅰ. 거기서 미리암, 곧 모세와 아론의 누나가 죽었다. 아마 모세와 아론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인다.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강에 던져질 때 그것을 목격한 그 누나가 바로 미리암이라고 본다면 분명 그렇다(출2:4). "미리암이 거기서 죽었다" (1절).
그녀는 여자 예언자였다. 이스라엘에게 많은 자비를 베푼 도구 노릇을 했었다(미 6:4).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앞에서 가며, 그들을 위해서 기사를 행할 때, 미리암은 나팔을 들고 그러한 기사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앞에서 갔다(출 15:20). 그러나 그녀도 한 때는 원망을 했다(12:1). 고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 한때는 교만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전권대사 모세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정계를 받아 문둥병에 걸렸으나 모세의 기도로 나음을 얻기도 했다(12:1-15; 신24:9). 또한 그녀는 광야에서 죽어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데스의 반역 사건으로 측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출애굽 1세대였다(14:23).
본절에서는 이러한 미리암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데스에서 죽었고 가데스에 묻혔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렇듯 미리암은 당시 여인으로서는 많은 일을 담당했었으나 그녀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닌 가데스에서 죽어 묻혔다고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본절에서는 미리암이 죽어 장사된 곳의 지명이 ‘신광야', ‘가데스’, ‘거기서', ‘거기’로 4번에 걸쳐 거듭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불순종의 결과가 광야에서의 죽음으로 나타났음을 은연 중에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이는 교만은 오히려 자신을 낮고 낮은 자리에 앉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러를 높어 들어주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잠4:8).
Ⅱ. 여기에 또 다른 므리바라는 곳이 나와 있다. 므리바란 곳은 이미 나온 적이 있다. 그들이 광야 여행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으므로" (출 17:7)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또 므리바란 곳이 있다. 이것은 그 행군의 끝 무렵이다. 이유는 같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으므로 므리바의 물이라" (13절)고 했다. 처음에 있었던 일이 여기서 재연된 셈이다.
1. "회중에게 물이 없었다" (2절).
르비딤의 바위에서 나온 물은 그때 필요한 양만큼만 흘러 나왔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보통의 수단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때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일반 섭리가 물을 공급하고 있는 곳에서는 기적이 중단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저들은 물이 없는, 적어도 온 회중이 먹기에는 부족한 곳에 당도했다. 우리도 부족함이 많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언제든 여러 가지 불편에 처하게 될 것을 오히려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물이 풍족한 것은 큰 자비이다. 우리가 필요한 자비를 발견했을 경우에는, 그 자비의 진가를 고백해야 한다.
👀 가데스에는 가측들에게 필요한 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이 필요로 하는 마실 물조차도 없었다. ‘가데스'는 단순히 물이 부족했던게 아니라 어떠한 수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물 고갈로 황폐해지 상태였다. 물은 곧바로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한편 본절은 출애굽 1세대가 처옴 출애굽한 후 둘어선 광야에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하였던(출 15:22-24; 17:1-3) 그때를 회상하게 한다.
- 이리하여 그들은 원망과 소동을 일으켰다(2절). "모였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치려고" 팔을 들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다투었다(3절). 그들의 부모들이 하던 똑같은 말투였다.
👀 출애굽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2세대가 주류를 이룬(1 절 설명 참조) 이스라엘 희중 역시 변함없이 타인을 원망하는 볼신앙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그 백성을 사랑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출 17:2에서와 같이 ‘모세와 다퉜다’. 우리는 이러한 원 망 사건을 통하여 단순히 1세대와 마찬가지로 2세대 역시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는 사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끊임없는 원망과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2세대를 향하여 특별한 역사와 은혜를 계속 베푸시고 었음을 발견해 내어야만 한다.
(1) 그들은 잠시 하나님의 자비가 없어 보이는 곳에 처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악인들과 함께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기들을 살려 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들은 집행유예를 내린 자비를 멸시하고, 하나님께서 더 큰 악을 베푸시려고 잠시 불 속에서 꺼내어 놓았다는 듯이 하나님의 자비에 도전했다. 그러나 실상 저들이 자기들 형제들과 함께 죽었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저들은 이미 잠시후면 그들의 형제들처럼 죽을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암 5:18).
👀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의 고갈로 인해 극심한 불편과 고통을 당했고 걸국 그들은 모세와 아론 앞에서 차라리 지금의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항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광야에서 죽은 형제들이란 하나님의 진노의 심관에 따라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었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죽기를 바랐던 1세대의 원망과(출 16:1-3)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죄악 가운데서 죽어 간 그들의 형제들까지 부러워하면서 자신들의 생명과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행은, 그들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었다.
(2)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로 몰아 넣었다고 분노했다(4. 5단).
👀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틀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출16:3)' 것과 시내산을 향해 ‘인도하여 올라가게 한(출17:3)' 것을 원망했던 1세대와 마찬가지로 왜 이토록 힘든 곳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여 들였느냐'라고 원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인도한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것인 동시에 출애굽의 궁극적 인도자인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려는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6:12; 딤후4:7)을 외면하는 불신앙의 행위였으며 과거 죄의 노예로 살던 때의 죄악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패역한 행위였다(출6:6; 골3:9).
그들은 모세와 싸웠다. 그러나 모세가 한 것은 여호와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어느 민족에게 보다도 큰 은혜를 받고도, 그것이 자기들의 권리 침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유보다 노예를 원했다. 약속의 땅보다 속박의 집을 좋아했다. 저들이 당면한 어려움은 물뿐이었지만, 저들에겐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자기들에게 포도나무나 무화가가 없다는 것 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생이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들의 불평의 표현
- 5절, ‘이 악한 곳으로’
- 본문은 가데스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쓸모없는 곳이요, 도리어 해를 제공하는 장소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한 말이다.
- 5절, ‘없고 .. .없도다’
-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가데스는 약 2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야영하기에는 모든 것이 절대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가데스는 출애굽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을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이들은 가나안 진입을 앞둔 상황에서 잠시 머무는 곳이었던 가데스에서 잠시 동안 당하는 고통을 참지 못했고 부정적인 말로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였다.
이런 언행을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 이와 같은 언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하늘에 있는 본향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곳에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본향을 바라며 최선을 다해 그 사명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aside>
다음 사실은 저들의 범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
[1] 그들은 지금까지 부모들의 불평과 불신으로 인해서 고생해 왔다. "그들은 그 부모들의 패덕을 지고 40년간 광야에서" (14:33) 유랑하게 되었고, 이제 그 40년이 거의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의 전철을 답습했으니, 벨사살이 받은 책망과 같다. "이것을 다 알고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였나니다" (단 5:22).
[2]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고, 모세와 아론의 관대함과 신실함을 경험했다.
[3] 미리암이 최근에 죽었다. 그들의 지도자 하나를 잃었으므로. 남은 자들을 더욱 존경했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점점 무례히 행했다. 누이를 잃은 그들에게 조위를 표하기는커녕, 더 괴롭혔다.
3. 모세와 아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회막으로 물러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알고자 했다(6절).
전과 같이 그는 "엎드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탄원함이요. 하나님의 지시를 바람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불복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드렸다. 거기서 그들은 명령을 기다렸다. "여호와여, 말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구약 성경에서 이렇게 **‘엎드리는 행위'**는 존경을 표할 때나 두려움을 나타낼 때 주로 취하는 행위였다(14:5; 16:4, 22).
그러나 지금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회막문에 가서 땅에 그들의 얼굴을 파묻듯이 엎드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에 대한 존경이나 두려움보다는 백성들의 고조된 불만 상태를 가라앉힐 수 없고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물이 부족한 문제의 해결책이 없는 난감한 상태에서 그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인들을 그들의 죄대로 심판하시기 위해 법정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는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않으실 것이다" (호 11:9). 또 "항상 다투시지 않으신다" (창 8:21 참조).
(1) 하나님은 영광의 보좌에 나타나셨다. 그들의 부당한 원망 소리를 제압하시기 위해서이다(6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사람들의 요동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의 욕정을 제어하는 힘이 되고, 우리의 입에 자갈을 먹이는 것이 됨을 명심하자.
(2)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사, 그들의 정당한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물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필연적이다. 비록 그들의 탄원 방식이 원망조며 불법적인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물을 주지 않고 그들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즉각 요구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절).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번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전과 같이 그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며, 아무리 그들이 역경에 처하고 자연적 조건이 극한에 처해 있더라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을 내실 수 있으며, 또 이미 그렇게 했고, 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니, 그의 팔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은 지난번 경우의 그 바위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못 가지게 하기 위해서-즉 그 바위 주위에 어떤 숨은 샘이 있었다든가- 하나님은 다른 한 바위를 지시하셨다. 저번처럼 바위를 정해 준 것 이 아니라 모세가 원하는 바위를 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에게는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1]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라고 했다. 그가 애굽에 재앙을 불러들이고 바다를 갈랐던 그 유명한 지팡이다.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그 지팡이는 모세와 그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건들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도 하나님을 믿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지팡이는 회막에다 두었던 것 같다 (9절). 복음서에서 처럼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 곧 "그의 능력의 지팡이" 라고 불리웠다(시 110:2). 아마 그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킬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장로뿐 아니라 온 회중을 모아서 이 일의 증인이 되게 하라고 했다.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보면 저들의 불신앙 이 부끄럽게 될 것이며, 또 확신도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기사에는 속임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빛을 피하지 않으며 많은 증인들의 목격을 피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이처럼 지금까지 많은 이적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모으라고 하신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실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의한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날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출4:17; 17:5, 9).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그 말씀에 견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만을 앞세워(10, 11절)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만다(12절).
[3]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향해 명하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이 많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던 자들을 부끄럽게 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 바위보다 더 굳어 있었다. 굽힐 줄 모르고 복종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위' 가 아니라 ‘바위 틈'에 명령하여 그 틈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바위에는 이미 틈이 있어 지팡이로 칠 필요조차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르비딤 사건과의 차이점은?
- 이는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 곧 광야 2세대들에게 모세의 행위틀 배제시킨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심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고(출17:7),
- 다른 한편으로는 지팡이로 쳤던 이전의 경험보다는 더 큰 믿음과 순종을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하나님께서는 르비딤에서는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오직 ‘말'로써만 물을 내는 이적을 행하라고 강조하신다.
[4] 하나님은 그 바위가 물을 내리라는 약속을 했다(8절).
👀 직역하면 ‘그러면 그것(반석)이 그의 물을 줄 것이다’
- 본문은 무생물인 반석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하나님의 뜻과 모세의 말에 순응하여 자신이 가진 물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세와 아론은 반석에게 말한다. 그러면 친한 친구의 갈증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인양 생명력을 갖지 않은 바위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놀라운 사건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그의 거룩하심이 한껏 드러나게 될 것이고, 또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그들은 깨닫게 될 것이었다(출 17:7).
‘그리고 너는 그들을 위하여 (물을) 나오게 하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그 반석으로부터 물을 내게 하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담겨진 말이다. 출애굽 1세대의 원망과 범죄가 거듭될 때 하 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과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즉각적인 심판을 내리셨음을 보게 된다.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40여 년 간의 광야 방황기가 끝날 무렵인데도 출애굽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원망을 반복하는 완악한 2세대에게 오히려 그 아버지 세대의 죄악에 대한 연대 책임을 물어 가중 처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시는 자비를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대로 되었다(11절). "물이 솟아 나왔다."
이것은 "반석에서 꿀" 들 내며 "단단한 바위에서 기름" 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한 예증이요, 동시에 그렇게 죄많은 백성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한 예증이기도 하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들이다(옛 세대는 이때쯤 되어서는 거의가 죽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앞서간 조상들처럼 악하다. 저들의 피 속에는 원망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에 대한 자격은 상실되지 아니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덕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이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을 아끼고 용서하신다. 나아가 그는 그들이 먹은 물을 그들의 짐승들에게까지 풍족히 먹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8, 11절), 영적 축복을 상징하는 영적 물도 먹여 주셨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 11절, 모세의 잘못된 순종
- 모세는 반석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쳤다.’
-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히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노여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방법으로 모세는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많이 솟아나왔다.
-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처자마자 곧바로 반석에서 많은 양의 물어 나왔음을 보여 준다. 비록 믿음없는 자처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전에 르비딤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침으로 물을 내게 했던 자신의 경험(출 17:6)만을 의지하여 반석을 내리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석에서 갈증에 목말라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가축들이 마시기에 층분한 앙의 많은 물이 나게 하셨던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믿음없는 연약한 당신의 자녀들일지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사랑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 모세와 아론은 이 문제의 처리를 온당치 못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히 노하여, 그들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했다(10-12절).
👀 9절,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지팡이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명대로 지팡이를 취했을 뿐 그 명과는 달리 자신의 방법으로 이 지팡이를 사용함으로(11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된다(12절).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명령을 우리에게 하시지만 우리가 과거의 경험만 가지고 있다면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고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늘 경외하며(신6:5)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우리의 삶이 될 줄 믿는다.
10절, ‘패역한 너희여...’
- ‘패역한 너희'란 말은 인간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고 대적했음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역하고 반역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스라엘 백성둘을 책망하는 말처럼 들러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단순히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마시울지니라' (8절)고만 말씀하셨을 뿐 백성들을 질책하라는 말씀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 개인의 감정적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모세가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그 말씀만을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여야 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며 반석을 2번이나 친 연고로 가나안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여 들이는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 모세는 아마도 물이 없음으로 인해 원망하는 이 백성들을 보면서 지난 40년 간 수없이 원망하며 자신과 하나님을 대적했던 광야 1세대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러고 그들의 불신앙과 죄악으로 결국 가나안 땅 목전에서 돌이켜야만 했던(14장) 쓰라린 과거가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때문에 모세의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아무리 출애굽 2세대라 할지라도 그들의 아버지 때에 있었던 지난 광야 40년의 역사를 결코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 이것은 이 이야기 중에서 특이한 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교훈이 들어 있다.
[1] 이 일로 하나님은 대단히 노하셨다. 그것은 당연했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노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신의 종이요, 자비를 받아 신실했고, 총애 받는 자들이요, 지극히 영광을 받았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이 이스라엘이 당하던 것처럼 죽게 함으로써 수치와 곤욕을 당하게 하셨다. 즉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분명코 그 범죄는 그러한 처벌을 받을 만했다.
[2] 그러나 왜 그렇게 하나님이 분노하셔야 했는지 그 사연은 불확실하다. 그들의 잘못은 복잡하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들에게 "반석에게 명하라" 고 했는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명하고, "반석을 쳤다." 이번에는 치라는 명령이 없었다. 그들은 말만으로는 안 될 줄로 알았다. 말씀의 권능을 불신하여 순수한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도 세속적 권능에 의지한다면, 여기서의 모세처럼 말로만 해야 할 때도 반석을 치는 격이다.
둘째, 그들은 이 기사의 영광을 지나치게 자기들이 차지하려 했다.
"우리가 물을 내야 하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권능이나 자격 때문에 된 일처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 (12절). 즉 그들은 이 기적을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에 돌려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셋째, 불신앙은 중대한 죄악이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았다" (12절).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배신" 한 것이다(27:14).명령은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으로 그 명령을 범했고, 그 명령의 실효성을 의심했다. 그들은 회의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물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이처럼 패역한 세대들을 위해서 물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불확신이 마음에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반석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비딤에서는 그러했었다(출 17:6). 가시적 표적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용하려 하지 않았다.
👀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낸다’는 것이 무엇인가??
- ‘나를 믿지 아니한다’그렇다면 ‘나의 말'이 아니라 ‘나를'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특히 출애굽 2세대를 향한 구원 계획,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확인시키시고 또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통하여 거룩하다 함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시려는(요 4:10, 14; 고전 10:4) 놀라운 구원 계획을 모세와 아론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이적을 생각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믿지 않았던 광야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14:11) 마찬가지로 모세와 아론은 그 모든 이적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뜻과 계획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이 광야 1세대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믿지 않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음을 가러켜 질책하시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볼 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러난 사건의 결말로만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매우 지엽적인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지 않았다고.
-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한 것르비딤에서의 물 사건(출 17:1-7)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어 물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갈증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는지,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 안에 거하시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숨어 었었던 것이다(출 17:7).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총회'(4절)라 지칭하였고 하나님께서도 그 ‘총회’를 인정해주신다(12절).그런데 모세와 아론의 인간적 분노의 감정이 그 길을 막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원망하고 반항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구원 계획에 따라 언약 그 ‘여호와의 총회'에 자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 ⇒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거룩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1차적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걸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지만 그 거룩함은 그를 믿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에(레10:3)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로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신 것이다.
-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써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넷째, 그들은 감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그 죄악의 사건이다(시 106:33). 즉 "그들은 그(모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모세가 자기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는 것이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들을 "패역한 너희들" 이라고 했다. 그들이 패역한 자들 인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모세는 나중에 정당한 견책으로(신 9:24) 그들을 그렇게 부르나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격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망령되이 터져 나온 발언이었다. 그것은 "라가" 또는 "바보" 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처음에 한번 치고서는 물이 나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은 그가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말 해 준다. 온유한 마음으로 말하면 정당한 말도, 화가 나서 하면 심한 죄악이 될 수가 있다(약 1:20 참조).
다섯째, 가장 죄악을 크게 가중시킨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가운데서" -그들은 이들에게 희망과 신앙과 온유의 본을 보였어야 했다- 불신앙을 보였다는 그 점이다.
모세는 다른 때에도 불신의 죄를 범한 것을 알 수 있다(11:22, 23).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모세의 사이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견책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 내려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으려는 백성들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있다는 듯이,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께 치욕을 돌린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벌은 엄중했다. 지위와 영예가 높은 자의 범죄는 그만큼 더 무서운 벌을 받는 법이다.
(2) 이 사건 전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1] 가장 선량한 인간,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모세는 대단히 온유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나타내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가 넘어질까 조심하자."
[2] 하나님의 재판이 사람의 재판과 다르다. 우리는 모세의 언동에는 별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것이 당신께 중대한 모욕이 된다는 것을 아셨다. 그는 인간의 마음 바탕을 아시고, 그 기질을 아시며, 그들이 무엇을 꾀하는지를 아시며,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의 심판은 신실에 따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때에라도 그렇단 말이다.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까지도 살피시고 분노하시며, 당신께 가까운 자일수록 더욱 노하신다(암 3:2). 시편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이 죄를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시 99:8). "주여, 주는 저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나이다." 많은 사람이 이 생애 속에서는 남김을 받으나 저 생에 가서는 심판을 받듯이, 이 생 속에서 벌받은 많은 사람도 또한 저 생에 가서는 구원을 받기도 한다.
[4] 우리의 마음에 화가 났을 때에는, 혀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때이다.
[5]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정직성과 기록에 있어서의 불편 부당성을 보여 준다. 즉 그는 자기의 잘못을 기록했다. 결코 은폐하지 아니했다. 그는 자기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다고 알았으므로 자기의 언행을 그대로 기록했다.
[6] 끝으로, 이리하여 그곳이 므리바로 불리운다(13절). 다른 므리바와 구별하기 위하여 므리바-가데스로 불리우기도 한다(신 32:51). 그 뜻은 "다툼의 물" 이다. 이 백성들의 죄와 모세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념하는 이름이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고 모세를 영예롭게 인정해 주신 자비의 기념비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그의 자비가 심판을 물리칠 때 이렇게 불리운다(호 11:9).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당연히 그랬어야 했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했다(12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당신의 영광에 침해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화롭게 됨을 받고야 마신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