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5월 13일 금요일 묵상구절 신3:23-29 요단을 건너지 못할 모세

축복둥둥 2022. 5. 13. 09:44

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22, 시편 62, 63, 이사야 11, 12, 야고보서 5

묵상구절

3:23 "그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3:24 '나의 주 여호와시여, 주께서는 주님의 크심과 주님의 손의 강하심을 주님의 종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주님의 일과 주님의 능력처럼 행할 수 있는 신이 누구입니까?

3:25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셔서, 요단 건너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소서.' 하였으나

3:26 여호와께서는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셔서 듣지 않으시고,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으로 네게 족하다. 이 일로 내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3:27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격려하며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가 이 백성 앞에서 건너가, 네가 보고 있는 그 땅을 그들이 차지하게 할 것이다.' 하셨다.

3:29 그때에 우리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머물고 있었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본문은 주로 이스라엘의 40여 년 간의 광야 여정을 회고하는 모세의 고별 설교 제 1부 1:1-4:43의 연속 부분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요단 동편 땅의 분배와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두 지파 반을 향한 모세의 가나안 정복 전쟁 참전 명령 및 여호수아에 대한 격려를 회고한 지난 단락(12-22절)에 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모세의 간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에 대한 회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민수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웠던 민 27:12-23의 사건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자기 눈으로 그 땅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하였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요청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으셨던 하나님께서도 이번 만큼은 단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너무 매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언지하에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번 작정하신 일은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신적 의지, 신적 작정은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고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중시해야 합니다.

 

Ⅱ. 모세가 자신을 위해 드린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1. 그의 기도는 이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도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앞에 서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을 인정한 후 여호수아에게 싸움에 나가 싸우라고 격려한 바로 그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이 건너가고자 하는 강열한 충동을 받았는데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는 어떤 야망이나 참지 못하는 불평이나 혹은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에 반항하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하여 은혜스러운 변경이 있기를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드리는 자세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나이다" 이라고 했다.

 

 💡 23절, ‘간구하기를’

  • 매우 강한 어조의 단어로, ‘호의를 청하다’, ‘탄원하다’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본문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게서 호의를 베푸셔서 자신의 요구를 꼭 들어주실 것을 매우 간절하게 호소하는 뉘앙스를 가진다(시30:8)

모세의 기도하는 자세

  1. 24절, ‘주 여호와여’
    • 모세는 이제껏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주로 감당하였었다. 그러나 본문의 표현은 모세가 중보자로서의 객관적인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라는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간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주께서..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 하나님에 대한 호칭: ‘주께서’는 본래 ‘당신은’ 이란 뜻의 인칭 대명사로, 모세가 하나님을 매우 개인적인 관계에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자신을 부르는 호칭: ‘아브데카’ → ‘섬기다’란 뜻의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 모세는 여전히 2인칭을 써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자신을 ‘섬기는 자’로 나타냄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3. ‘무슨 신이’ —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찬양, 기도의 근거)
    • ‘어떤 신도 ... 할 수 없다’는 뉘앙스의 표현.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과거 하나님의 결정을 번복해 주기를 원하였던 것이다(민20:12).
    • 본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을 찬양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 회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가나안 정복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께 신앙의 기도를 간구할 수 없는 욕망은 어떤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욕망이 순결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이자. 우리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가 여기서 간구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다.

[1]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가 겪었던 위대한 체험 즉 주께서 주의 크심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나이다.여호와여 당신이 시작하신 일은 완성하소서. 당신은 나에게 이들 두 왕을 정복케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 주셨사오며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사함을 주었나이다. 오! 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의 나아가심에 더 많은 것을 보게 하소서. 나의 왕이시여! 이 위대한 사업은 의심없이 이행되고 완성될 것이온즉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하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에서 그의 영광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 많이 보고 싶어한다. "여호와의 역사는 위대하시온즉" 그러므로 "그 안에서 기쁨을 가지는 자들" 은 그것을 더욱 보고자 한다.

[2] 그가 본 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생긴 선한 기억들 "천지 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지계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봄으로써 감동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가 된다. 그들은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에 대하여 오래 전에(출 15:11) 스스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같은 심정으로 계속하여 주의 행사와 같음은 없나이다(시 86:8)라고 말하고 있다.

(2) 그의 간구는 이것이다. 즉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소서" (25절).

 💡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나로 제발 건너가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을 보겠나이다’

모세의 간구의 우선적인 초점은 무엇인가?

  • 우선적 초점은 약속의 땅을 보는 것보다도 요단을 건널수 있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그는 지금 거리는 멀지만 약속의 땅을 쳐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모세가 간구를 드리고 있는 것은 그 땅을 직접 밟아 보고 싶은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 보건대 본문의 ‘보다’ 는 의미에는 ‘체험하다' 란 뉘앙스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 모세는 그토록 바라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자신이 직접 밟아 보는 것으로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가나안 땅의 축복과 풍요를 직접 체험해보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는 건너가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그 백성에게 관한 것과 같이, 즉 그들은 들어가서는 안 되었던 것과 같은 맹세로 인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위협이 조건적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들어가고 싶다고 간구한다.

히스기야와 다윗은 분명히 경고를 받은 후에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간구했고 다윗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했다. 그래서 전자는 허락을 받았으나 후자는 그렇지 못했다.

모세는 간구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시겠다는 선포를 돌이키게 한 때(출 32:14)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위해 뜻을 돌이켜 볼 희망을 왜 가지지 않았겠는가? "나로 건너가게 하사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하소서. 나로 건너가게 하사 거기서 왕과 지배자가 되게 하소서" 가 아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구하지 아니하고 여호수아에게 통치권을 넘겨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 가게 하사 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당신의 친절하심에 대한 관람자가 되게 하시고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내가 믿는 바를 보게 하소서" 였다.

그는 얼마나 애처롭게 가나안에 대하여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 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얻어 향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가 "아름다운 산" 이라는 말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뜻은 시편 78편 54절에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는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 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그것은 분명히 가나안의 전 땅에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러나 성소와 그것의 영광을 목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 안에 자비와 심판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는 이 양자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수 있었다.

(1) 그의 요구에 대한 거부에는 심판이 있고 역시 어떤 노여움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26절)”

 

 💡 26절의 ‘진노하사’와 25절의 ‘나로 건너가게 하사’ 에 사용된 동사의 원형은 동일하다(’아바르’)

  • 원형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을 각각 보여 준 것은 비록 하나님의 반응이 모세의 바람과는 다르게 매우 강경했지만 여전히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는 끊지 못할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 그리고 더불어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이 비록 기도라는 하나의 대화 통로 속에서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전달되는 내용은 서로 상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아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죄에 대해서 불쾌히 여기신다. 그래서 그의 진노에 구원받은 자들까지도 아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표 아래 있게 될지도 모르며 그들의 심정들이 향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은혜가 거부될지 모른다. 하나님은 은혜스러우시고 부드러우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녀들이 잘못할 때 노하시고 그들이 바라고 청하는 바 많은 것들을 거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때문" 에 모세에게 노하셨는가?

[1] 그들이 그를 분노케 한 죄 때문이든지(시 106:32-33).

[2] 그가 절대 삼가할 수 없었던 그 때에 모세의 퇴거는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이 되었고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되었든지

[3] 혹은 그의 범죄와 유사한 행위 후에 어느 때든지 격정적이고 불경한 말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주의하도록 그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들 때문이었다. 즉 "이것이 푸른 나무에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마른 나무에 대해서야 어떠하리요?"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그의 말에 종종 귀를 기울였으나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언제나 그 음성이 들려질 수 있는 것이 위대하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은 그에게 "그는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하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남을 위해서는 응답을 받고 자신을 위해서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씨름한 야곱의 후손 중의 하나인 모세가 비록 헛되이 구하지 않았다 해도 그는 그가 구한 그 자체는 얻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간구하는 바로 그것이 그대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2) 여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서 이 진노와 함께 하는 자비가 나타나 있다.

[1] 하나님은 ***"그만해도 족하다" (26절)***란 말씀으로 발해진 명령으로 모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말씀으로서 어떤 신적 능력은 의심할 바 없이 모세를 하나님의 뜻과 화해시켰고 그를 그 뜻 안에서 잠잠하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러나,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만족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대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대의 몫으로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으로 만족하라. 비록 그대가 이 세상에서 받을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만족하나니 곧 하나님은 모든 요구에 넉넉하시다(전능자이다).

 

 💡 본문을 직역하면 ‘너에게 많다' 이다.

  • 이는 고후 12:9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이다.
  •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이미 넘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층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약속에 대한 비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그 약속의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리고 약속 자체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실상 모든 것을 소유한 자와 마찬가지란 사실이다

[2] 그는 그의 요구를 강요하지 말라고 즉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지시하시면서도 그의 기도를 존중했다. 그것을 부인하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는 요구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구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역시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 ‘말라’

→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 본문의 명령은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지 않은 기도를 즉각적으로 멈출 것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임을 알 수 있다 

[3] 하나님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의 광경을 보여주시기로(27절) 약속하셨다. 비록 그가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을 망정 그 광경은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애닳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광경을 봄으로써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고 그로하여금 그 언약의 땅에 대한 아주 명백하고도 즐거운 생각을 그에게 주고자 함이었다.

아마도 모세는 그의 관찰을 다른 목적을 위해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이 목적을 위해 확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그가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없었다면 그것이 모세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언약의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신앙인들까지도 현재의 상태에서는 오직 멀리서 하늘 나라를 볼 뿐이다.

 

 💡 본절은

  1. 기도의 긍정적인 응답이 좌절된 모세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주며, 동시에
  2.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암시한다.

즉 시내산을 을라가서 율법을 받은 것도 모세 혼자였으며, 비스가산을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도 모세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 갈 율법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땅을 보여 주셨다. 모세의 편에서 본다면 그는 하나님 백성을 통치할 말씀을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았고 또한 그 통치가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볼 수 있었던 자였다.

이처럼 그는 두 개의 산을 오름으로써 하나님의 율법과 그 율법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잇는 상징이 되었다.

  • 그 비전은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진 후 돌아보았던 동서남북의 비전을 이어받은 것이며(창13:14),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비전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비전의 예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마 28:19; 행1:8).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비전을 실현해 가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가 그 버전 가운데 목격하였던 가나안 땅이 예표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를 확장하는 데 앞장서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그는 그에게 한 후계자를 마련해 주셨으니 그는 모세의 영예를 보존하고 모세의 가슴에 가득차 있는 그 영광스러운 역사, 즉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가 그들을 거기에 안착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완성할 사람이었다(28절).

너는 이 일을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라."

 💡 ‘담대하게 하다’ → ‘용기를 불어넣다’란 뜻.

‘강경하게 하다’ → ‘확신을 심어 주다’

  • 본문은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가 강한 의지를 가지도록 옆에서 용기를 주며 강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즉 **모세가 하나님 앞에 드린 자신의 간구가 좌절되었음에도 그것을 믿고 일어서서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다시 갖추고 여호수아에게 참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라는 명령**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이 명령 안에는 모세 자신이 먼저 용기를 내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 이 말씀은 단지 정복 전쟁만을 내다본 말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이후에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 일하게 될 모습까지 미리 모세에게 보여 주신 말씀이다. 
  • 하나님이 책임을 맡기시는 자들에게 분명히 용기도 아울러 주실 것이다. 교회의 일꾼들은 자기들은 비록 죽게 되어 무덤 속에서 침묵을 지키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