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사사기 7, 사도행전 11, 예레미야 20, 마가복음 6
묵상구절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6: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6: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6: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6: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6: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6: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6: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6: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6: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6: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6: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6: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6: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6: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6: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6:23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6:24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6: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가나안 정복의 시작 (여호수아 6:1-5)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양편의 서로 다른 결심들을 보게 된다. 누구의 말이 이길 것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Ⅰ.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할 결심을 한다(1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다" (난외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은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으로나 강력한 요새가 되었으므로 저절로 "문을 걸어 잠궜다." 또한 그것은 주민들의 고집과 결의에 의해서 "닫혀졌다." 그들은 절대로 항복이나 협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도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자도 없었으며 평화를 강구하지도 않았고 화해의 제의조차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토록 그들은 스스로 열심이었고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파멸을 자초하고 있었다. "전능자에 대항해서 스스로를 강한 체하는" 모든 자들은 이와 같은 비참한 경우에 이를 뿐이다(욥 15:25).
Ⅱ.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의 주인이 "되도록" 결심하셨고, 그것도 빨리 되도록 하신다.
여리고 성이 얼마나 강한 요새이며 그것이 얼마나 무섭게 수비되고 있는가를 친히 보시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의 점령에 대해 숙고하며 염려하는 바를 아시는 하나님의 군대의 대장이 여기서는 여호와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바로 그가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승리할 수 있는 모든 확증을 주셨다(2절).
"보라, 내가 여리고를 네 손에 붙였다."
이 말은 "내가 그것을 할 것이다" 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이미 했다.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너의 소유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는 뜻이다.
가나안의 첫 열매로서 이 도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호수아나 어떤 이스라엘인도 그것으로 한 푼의 재산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그것은 이들의 손에 주어졌다고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바칠 기회를 찾아 내야한다.
1.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이 그 도시를 포위할 방법을 지시해준다.
참호를 파라는 것도 아니고 포대를 세우라는 것도 아니며 성을 공격할 망치를 갖다 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군인을 무장시키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6일 동안 하루에 한바퀴씩 성을 돌며, 7일째는 7번을 돌되 군인들은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일시에 불 때까지 조용히 따르기만 하라는 것이다(3,4절).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전부였다.
2. 그는 또한 7째날 밤이 오기 전에 틀림없이 그들이 이 성의 주인이 될 것을 확증시켜 준다. 신호가 주어지면 그들은 모두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러면 즉시 성벽이 무너지게 되고 주민들이 노출될 뿐만 아니라 너무나 기가 죽어 반항할 생각조차도 못할 것이다(5절).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정하신 이유는
(1)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도구를 사용하시는 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힘을 높이시기를" 원하셨다(시 21:13).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전능의 팔을 나타내사 이스라엘을 격려하시며 가나안 족속에게 공포와 혼돈을 주시려고 한 것이다.
(2) 자기 자신의 임재에 대한 제도적인 표지인 자기의 법궤를 영화롭게 하고, 백성들이 율법을 최대의 존경과 경외로 대하게 될 근거를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이후로 오래도록 하나님의 명령 없이 법궤를 진영에서 옮긴다는 것은 법궤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이런 일을 저지를 때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삼상 4:3 이하). 그러나 지금 법궤를 옮기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
(3) 이것은 제사장에게도 존귀를 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법궤를 메고 나팔을 불도록 임명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은 전쟁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 수여하는 존귀와 능력을 가지게 되는 이번 특전은 그들에게 불평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주로 이 일을 위해서 채용되었고 백성들은 이 제사장들이 받은 축복과 이들에게 맡겨지는 이 모든 놀라운 가치 있는 특전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었다.
(4) 이 일은 백성들의 신앙과 인내와 순종을 시험한다.
즉 인간의 수단으로 볼 때 순종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그 명령을 지키며 인간의 가능성에서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약속을 믿는지 어떤지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은 또한 그들이 참을성 있게 원수들의 멸시를 견디며 참을성 있게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는지 어떤지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힘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여리고의 성벽은 무너지고 말았다.
(5)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남아 있는 고난에 대해 이스라엘의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도시의 "성벽이 하늘에까지 닿아" (신 1:28) 있으므로 절대로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약한 정탐꾼들의 주장은 이제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아무리 강하고 높은 성벽이라도 전능자와 대항해서 이길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싸울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이 저들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이다.
● 인내와 복종 (여호수아 6:6-16)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돈 행렬과 여호수아가 이 일에 관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바를 전달한 명령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을 엄격하게 지킨데 관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그들의 손에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명확한 보증을 백성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백성들이 결국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신념을 가지고 명령에 순종하는지 어떤지 시도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여호수아에게 아주 잘 순종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Ⅰ. 궤가 어디로 가든 백성들은 그것을 따랐다(9절).
무장한 남자들이 궤 앞에 서서 갔는데 그것은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이들이 무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궤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절대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장애물이 성으로 가는 길 가운데 놓여져 있으면(때로는 길을 돌아가야 할 경우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그것을 치워야 했고, 원수가 어떤 방해 공작을 할 경우면 이들이 그것과 부닥쳐 물리침으로써 궤를 멘 제사장들의 행렬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에게라도, 법궤를 위해서 뭔가 좋은 일을 하거나 자기 나라의 종교에 유익을 끼치는 봉사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후방에는" 또 다른 무장 군대나 혹은 광야를 거쳐올 동안 맨 뒤에서 행군해 온 단 지파의 부대가 따라 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혹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장도 않고 전쟁의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 백성이 언약궤의 뒤를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약궤에 대한 존경심을 증거하며 이 행렬의 엄숙성을 더해주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 뒤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충성스럽고 열심있는 이스라엘인들은 기꺼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겪는 바로 그 노고를 겪기를 원하며 바로 그 위험을 당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Ⅱ. 일곱 제사장들이 손에 나팔을 쥐고 언약궤 바로 앞서서 행진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 나팔을 불어댔다(4,5,9,13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의 이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 이들은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정신적으로 공포를 느낀 이 가나안 족들은 이미 정복당해 있었고 패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들은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엄숙한 진노를 선포하는 나팔을 시온에서 불어야 하고 그리고 시온에 사는 죄인들이 두려워하도록 거룩한 산에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서도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2. 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선포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는 제사장들이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으로 용기를 불러일으키도록 되어 있다(신 20:2-4). 특별히 제사장들의 나팔은 전쟁의 날에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는 바가 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민 10:9). 그것은 아비야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대하 13: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들은 자유와 승리를 선포하는 영원한 복음의 희년의 나팔을 울림으로써 영적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Ⅲ. 제사장들이 사용한 나팔은 일반 예식때 사용되어지는 은으로 만든 나팔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서 속을 뚫어서 만든 양각 나팔이었다.
이 나팔은 가장 천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며 소리가 둔탁하고 모양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양각의 소리와 같은 전도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마귀의 나라는 뒤집혀지는 것이다. "우리의 전쟁의 무리들" 은 육적으로나 혹은 육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마귀의 강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고후 10:4, 5). 이러한 나팔을 "요벨의 나팔" 이라고 하는데 제사장들이 희년에 바로 그런 나팔을 가지고 불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은 이것을 지금 이스라엘이 쟁취하는 완전한 자유와 가나안 땅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주인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Ⅳ. 모든 백성은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말며 여하한 소란도 피우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10절).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되는 이 거룩한 나팔 소리를 보다 더 주의 깊게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 사건에 대한 백성들의 경건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육체들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 (슥 2:13).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4).
Ⅴ. 이들은 하루에 한 번씩 6일간 똑같이 이렇게 행할 것과 제 칠일에는 일곱 번 이렇게 할 것을 명령받고 또 그렇게 했다(14,15절).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처음 성벽을 싸고 돌때도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벽이 무너지기까지 열 세 번이나 성벽을 돌아야 했으며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렸어야 했다. 비록 이들이 최근에 가나안으로 진입했었고 따라서 이 기간이 너무나 귀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이들은 자기들 앞에 쌓인 일들이 태산 같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무 것도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일에 아무런 진척도 없이 여리고 주위를 여러 날이나 빙글빙글 돌아야 했었다. 약속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믿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를 하게 하시는 이상으로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희망적인 것이 나타날 때까지 "일곱번을 가라" (왕상 18:43).
Ⅵ. 이날들 중에 하루가 틀림없이 안식일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여타 안식일에 쉬라고 명하신 그분이 이 안식일에는 행하라고 하셨다면 백성들의 이 행위는 마땅히 의롭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율법에 구속시키시지 않으시며 자기가 기뻐하실 때 하나님은 이것들을 간과하실 수 있다. 병자였던 사람이 이러한 원칙으로 행동할 때 그는 주장하기를 "나를 낫게 한 그 분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더라" 고 주장했다(요 5:11).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도리어 안식일의 영예가 된다. 우리의 시간이 주간으로 나누는 이 칠일 모두가 이와 같은 일로 보내져야 한다.
일곱 나팔을 울리기 위해서 일곱 제사장이 고용되었다. 이 경우에 이러한 숫자도 다른 여러 가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눈에 아주 두드러지게 띄게 되는데 그것은 육일간의 창조의 사역과 칠일째의 안식을 기억나게 해 준다. 더욱이 안식일의 율법은 노예적이고 세속적인 우리 자신들의 일을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이 일은 종교적인 행위인 것이다. 안식일에 할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의 휴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안식일에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안식일의 쉼이 제정된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법궤와 함께 하는 이 일보다 더 안식일에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Ⅶ. 이들은 자기들의 하는 일에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 환상이 이루어져 거짓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 는 사실을 믿고(합 2:3), 지시된 기간동안 계속해서 이 일을 했고 칠일째는 일곱 번을 돌았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나간다 하더라도, 그 오랜 행실에서 아무 것도 잃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들이 성벽을 싸고 돈 먼 거리 가운데는 적의 화살이 날아올 수 있는 거리도 있었을 것이며 적들의 조롱이 들리는 거리를 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괴상한 일을 보고 처음에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재미있게 여겼을는지도 모르며 칠일째쯤에는 그들이 재미있게 보던 이 일에 대해 위험을 느끼지 않게 되고 예사로 보아 넘기게끔 되었을 거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을 포위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느헤미야 4장 2절에 언급된 것처럼 "이 연약한 유대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따위가 우리가 그토록 겁을 집어먹었던 백성인가? 이것이 저들의 공격법인가?" 와 같은 등등의 조롱들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이렇게 평화와 안정을 외쳐대었기 때문에 파멸은 더욱 더 무서운 것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준비하고 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한다" 고 홀(Hall) 감독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실수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늦은 뒤였다.
Ⅷ. 마침내 이들은 함성을 지르도록 명령을 받았고 또 그렇게 했었으며 그 순간 성벽은 무너졌다(16절).
이것은 승리의 함성이었고 개선의 함성이었고 "왕의 함성이 그들 중에 있었다" (민 23:21). 이것은 신앙의 함성이었다. 이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질 줄로 믿었고 또 믿은 대로 그 성벽은 무너졌다. 그것은 기도의 함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억해 주시리라고 한 그 약속을 선포하는 나팔 소리에 대한 화답이었다. 이들은 마음을 합하여 한 사람같이 하늘을 향해 도움을 부르짖었고 그리고 도움이 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우리가 우리 인생의 최후의 바로 그날 황혼의 순간까지도 우리 자신의 타락을 이기는 완전한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홀(Hall) 감독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완성을 위한 숫자와 양이 차게 될 그 때에" 우리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즉 "선한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신음하며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날 제 칠일의 종말이 올 때까지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후에는 심판과 승리가 오게 될 것이라고 한다. 시간의 종말에 우리 주님이 나팔 소리와 함성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올 때에 사탄의 나라는 완전히 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되기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억압의 권세와 정사와 능력이 그때에 가서 철저하게 그리고 영원히 진압되어질 것이다.
● 여리고 성의 함락 (여호수아 6:17-27)
백성들은 여리고 포위에 관해서 내려진 명령들을 경건하게 지켰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명령했다(16절).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들어가서 취하라."
Ⅰ. 여리고 성을 탈취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규율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용도와 뜻을 지시하실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단서나 제한들을 설정하실 수도 있다. 이 성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 성은 가나안 여러 도시들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며 가장 악한 도시였을지도 모른다.
1. 그 도시는 불태워져야 했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물은 가차없이 하나님의 정의에 제물로 바쳐졌다.
백성들이 알아야 할 전부는 17절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이 도시는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에게 체렘(cherem) 즉 아주 "바쳐진 것" 이 될 것이다. 이 안에 살고 있던 생명은 어떤 조건으로든지 간에 속량될 수 없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모두 "죽여야 한다" (레 27:29).
이것을 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박탈하는 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복수를 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을 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여러 다른 도시들 중에서도 더욱 여리고를 취하셨으며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이 자기에게 바쳐지도록 하셨다. 이 도시를 이토록 혹독하게 사용하신 것은 다른 여타 도시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더욱 더 마음이 녹아 내리도록 하심일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혹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라합과 그의 가족만은 제외되었다.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그녀는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친절로 자신을 그녀의 이웃에서 구분시켰었다. 그러므로 그 친절의 신속한 보답으로 그녀는 또한 이웃들과 구분되어진 것이다.
1. 성안에 있는 모든 보물들 즉 돈과 그릇과 가치 있는 물건들은 회막용으로 성별되어 헌납된 품목으로 드려져야 했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유대인들은 이 성이 안식일에 탈취되어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장막을 아름답고 풍요하게 하심으로 존귀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며, 자기를 섬기는 일에 소비되는 엄청난 경비를 이렇게 마련하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일을 통해서 세상 재물에 마음을 쏟지 말 것과 자신들을 위해서 많은 재물을 쌓아두는 일에 집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신 것이지 은과 금이 풍부한 땅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며 자기를 기쁘게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셨지 먼 나라들과 장사를 하고 그리고 먼 날을 위한 재물을 쌓는 따위의 탐욕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장막을 풍부하게 함으로 자신들이 풍부하게 되며 하나님의 집에 쌓아두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들의 집에 쌓아두는 것과 같은 명예와 부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3. 금지된 노략물을 다루는 일에 각별히 조심하도록 주의를 받았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자기 자신의 사용으로 소유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18절) "여하한 경우에도 이 바쳐질 물건에 대해서 자신을 삼가라. 그 물건들을 향해 너희들의 마음이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하며 이 일에 관계된 어떤 것이라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신을 멀리하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읽게 될 아간의 죄를 미리 내다보신 것 같다. "이스라엘 진영으로 저주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라" 는 각별한 주의가 주어졌는데도 아간은 지키지 않았다.
Ⅱ. 이들이 함성을 질렀을 때 별안간 성벽 전체가 무너졌거나 적어도 이들이 마주하고 있던 성벽의 한 부분이 무너지며 성안으로 들어갈 길이 열리게 되었다(20절).
"성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마도 굉장히 많은 일반 백성들과 성벽 위에서 지키던 보조들과 또 이스라엘이 성벽을 도는 것을 구경하려고 성벽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벽이 무너져 수 천명이 죽은 이야기를 열왕기상 20장 3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자기의 은신처로 믿었던 것이 바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틀림없이 이 갑작스런 성벽의 매몰로 주민들은 너무나 경악에 차서 아무런 저항을 할 힘도 기력도 못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칼에 손쉬운 희생물들이 되었고 "여호와께서 선두" 가 되시는 백성들을 막기 위해서 성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가를 눈으로 보았었다(미 2:13).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자기 교회의 원수들을 쉽사리 분쇄하실 수도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임을 명심하자. 청동 대문도 강철의 문빗장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푸라기나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할 뿐이다(사 45:1, 2).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어가게 할꼬? 오 하나님이여, 주가 아니시나이까?" (시 60:9, 10) 이와 같이 사탄의 나라는 무너지며,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신을 강퍅하게 하는 사람은 절대로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Ⅲ. (하나님께) 이 바쳐진 도시에 대해서 내려진 명령의 집행.
1. 호흡하는 모든 것을 칼로 죽였다.
거기에는 무장한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도 포함되었다. 비록 그들이 목숨을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아무리 간절하게 빌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동정의 여지가 없었고 자비 같은 것은 잊혀져야 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멸절시켰다" (21절).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집행과정이 기적의 보장 아래서 주어진 신적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그것은 절대로 정당화되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의로운 심판자가 되시는 분이 이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충성된 종으로써 기쁘게 이 일을 해 나가야 한다.그분은 절대로 불의하게 복수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 때에 하나님을 위한 일은 곧 피의 일이었다. "자기 칼을 속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당할 것이다" (렘 48:10). 그러나 복음의 정신은 아주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눅 9:56). 그리스도의 승리는 또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짐승들은 신적 정의의 부가적 희생으로써 그 주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들이 제단에서 죽어갈 때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 열납되어졌다. 그러나 이들 가나안 인들의 가축은 가나안 인들과 함께 희생으로 살육 당하게 하시었는데 가나안 인들의 죄악은 희생이나 제물로 씻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1.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불태워졌다" (24절).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자기들의 본부로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들을 장막에 거하게 하시기를 원하사 이들이 여기에 살지 못하도록 이 보금자리를 불태우도록 하시었다.
2. 금과 은으로 된 모든 것들과 불로 정결케 될 수 있는 모든 기물들은 하나님의 집 곳간으로 들여졌다.
그가 이것들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로서 특별히 이들의 만군의 주로서 이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으로서 이 일을 통해서 존귀를 받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노략물들을 여기서는 전체로 또 때로는 십일조로(히 7:4) 요구하신 것이다.
Ⅳ. 기생 혹은 여관 주인 라합은 보호되었다.
그녀는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히 11:31). 두 사람의 정탐들은 그녀의 안전을 위한 공적 성실을 약속했었다. 이들은 거기서 공적 인간으로 행동했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이 그 성을 탈취하는 일에 크게 분주했었지만 여호수아는 그녀의 보호를 위한 효과적인 배려를 했다. 그녀가 지켜준 바로 그 정탐꾼들이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채용되었다(22,23절). 이들은 그녀와 그녀의 집을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었고 또한 이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그녀가 이들에게 베푼 친절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친절 때문에 그녀는 구별되었고 자기 생명을 보호 볼 수 있었으며 그녀의 친척들도 모두 그녀와 같이 구원을 받았다. 그녀는 노아와 같이 "자기 집을 구원할 줄로 믿었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이 "그 집에 구원을 가져다준다" (행 16:31). 어떤 이들은, 그녀의 집이 성위에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2:15) 그렇다면 어떻게 성벽이 무너지는 데서 피할 수 있었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와 그녀의 친척들이 그 집안에 안전하게 있었다는 사실로 봐서 그 집은 무사했었다고 확신한다.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다고 할 정도로 성벽에 가까이 붙어 있었거나 아니면 성벽과 같이 무너지거나 혹은 성벽 아래로 무너져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을 수도 있으며 혹은 그녀의 집에 있었던 그 부분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 그녀는 이방인의 잡신앙으로부터 청결케 되기 위해서 얼마동안 이스라엘 진밖에 머물면서 그것과 인연을 끊고 개종자로서 받아들여질 준비를 했어야 했다.
- 그녀는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그녀와 그녀의 후손은 이스라엘 안에 거하였으며 그녀의 가계는 오랜 후에 명문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유다의 왕자 보아스의 어머니 살몬의 아내가 되었고 우리 구주의 선조들 가운데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마 1:5).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으로 영접했었던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을 받았다. 피어슨(Pierson) 감독은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을 구원하고 그녀를 이스라엘 가운데로 받아들인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창녀들을 자기의 나라로 영접하고 환대하는 것의 그림자라고 설명한다(마 21:31). 혹은 이 일을 이방인의 개종에다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Ⅴ. 여리고가 영원한 황폐의 저주를 받고 이후로 어느 때거나 간에 이 성을 재건하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되었다(26절). "여호수아가 백성들" 즉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후손들이 절대로 이 성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동의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무서운 형벌을 덧붙여서 금지시키셨다.
-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신적 저주의 무서움을 보이시려고 하시었다. 이 저주가 머무는 곳에는 이론도 필요 없고 파할 수도 없다. 그것은 구제도 보수도 할 수 없는 파멸만을 가져온다.
- 하나님께서는 이 파멸을 남겨두심으로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찼고 자기 백성을 가나안 땅에 정주시킬 은혜의 때가 되었을 때에 가나안에 대해서 쏟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기념비로 삼으시려고 하시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원수의 파멸은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가 되며 자기들에게 이토록 큰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하게 될 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도시의 상황은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었고 그것이 요단 강가의 좋은 자리에 위치하였으므로 이 곳은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자리에 재건하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이런 일을 시도하게 되면 당하게 될 재앙이 여기서 이야기되어진다. 인간은 후손을 위해서 건설을 한다. 그러나 여리고를 건설하는 자는 자기가 건설하는 바를 즐기게 될 후손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가 일을 시작할 때 그의 장자가 죽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재앙의 경고를 받고도 아랑곳없이 거만스럽게 일을 계속한다면 그의 일이 끝마칠 무렵에는 그의 계자(季子)의 장례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이 장자와 계자 그 중간의 모든 후손이 끊쳐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저주는 "근거없는 저주" 가 아니므로 오랜 후에 이 성을 재건한 사람에게 실제의 주거지가 된다든가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재앙이 내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여리고가 그 후에 위대한 두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앞에서도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을 찾아보게 된다(눅 18:35; 19:1; 마 20:29). 하나님께서 파멸시키려고 하신 것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다(말 1:14 참조).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은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만들고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27절). 이 일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높이 받들여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가공할 존재가 되게 했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즉 모세와 함께 하셨던 바로 그분 즉 그리스도 자신이 그와 함께 하심이 나타났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명성을 높여 줄 수 있거나 참으로 위대한 인간으로 나타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