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2월 3일 금요일 왕상1:5-10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하다

Jeehyun 2023. 2. 7. 00:14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35, 36, 마가복음 6, 욥기 2, 로마서 6

묵상구절

1: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1: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1: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도니야의 야심(2)(열왕기 상 1:5-10)

다윗은 자기의 자녀들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았다. 암논과 압살롬은 그의 슬픔의 대상이었으니, 전자는 장자요, 후자는 셋째였다(삼하 3:2, 3). 아비가일이 낳은 그의 둘째 아들에게서는 위안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넷째가 아도니야였다(삼하 3:4). 그는 헤브론에서 출생한 자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는 그에 관한 말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바로는, 그 풍체가 준수하여, 연령이나 기질에 있어서 압살롬 다음가는 인물이다(3절). 그리고 줄곧 그의 아버지의 눈에는 보배같은 존재였으나 이제 와서는 하나의 가시가 되어버렸다.

 💡 아도니야: ‘여호와는 나의 주’ 라는 이름.

아마 이는 그의 아비 다윗이 여호와 주권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더불어 이 아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그 이름과 달리 신앙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축제' 또는 ‘춤추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학깃에게서(대상 3:2) 태어난 그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첫째 암논은 이복 동생 다말을 강간한 까닭에 압살롬에 의해 죽임당하였고(삼하 13: 28), 셋째 압살롬은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켜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다(삼하 18:14.15). 그리고 둘째 길르압(혹은 다니엘, 대상 3:1)은 이름 외에 특별한 행적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려서 일찍 죽었거나 설혹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세속적 시각에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왕위 계승자가 될 가능성이 큰 자였다

Ⅰ. 그의 부친은 그를 애지중지하였다(6절).

 💡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생전에 결코그를 꾸짖지 않았다’

다윗은 아도니야의 행동을 제재하지 않았으며, 육체적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체벌을 가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아도니야가 특별하게 벌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어는 다윗이 그를 무조건적으로 감쌌다는 의미에 오히려 가깝다. 다윗이 그렇게 했던 것은 그것이 아도니야를 사랑하는 방범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의 말씀과 같이 다윗의 이같은 사랑은 아도니야를 도리어 망치고 말았다. 아도니야는 책망을 받지 않은 까닭에 스스로 교만해졌고 이것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앞선 사무엘서에서 다윗이 3년간 그슬에 도피해 있다가 예루살렘에 귀환한 압살롬을 지나치게 냉대한 것이 압살롬의 반역의 소극적 원인이었던 것과 대조되고 있다(삼하 14:24).

다윗은 전쟁에 능한 전략가이며, 신정 국가의 기틀을 세운 훌륭한 왕이기는 했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는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 다윗을 조금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그의 부친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종종 그의 부친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그의 악한 소행으로 은근히 속이 썩어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아도니야를 그의 웃음도 자제하게 하고, 그가 마음먹고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가 무엇을 했고, 어디를 갔다 왔느냐를 대답하도록 부르고, 책이나 일에 집착게 하거나 잘못된 것을 보고들을 것을 꾸짖음으로서 섭섭하게 하지는 아니하였다. 단 한 번도 "네가 어찌하여 그런 짓을 하였느냐?" 고 말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며, 화를 내지 않고 참고 들을 존재는 못되었기 때문이다.

꾸짖음을 불쾌하게 느끼고,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들의 잘못이다. 그는 꾸짖음에서 오는 유익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 꾸짖음이 아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들을 꾸짖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 아비의 잘못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아들을 버려둠으로 인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니,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시키지 아니하는 자와 매 한가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의 아들들로부터 능히 기대할 수 있는 영예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Ⅱ. 거꾸로, 아도니야는 자기 부친을 우롱하였다.

자기 부친이 노쇄하여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무시해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 스스로를 높혀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5절)***고 하였다. 버릇없이 자라난 애들은 교만하고 야심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허다한 젊은이들이 파멸로 이끌리게 된다. 젊은이들을 겸손하게 기르는 방법은 저들을 잘 통제하는 일이다.

💡 앞선 1-4절에서 드러나듯어 다윗이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왕세자에 대한 결정, 즉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은 까닭에 본문 이하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윗의 실수인가?
다윗이 후계자를 확정하여 공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서열상 왕세자의 가능성이 가장 큰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권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윗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도니야의 야망이 불러일으킨 그릇된 결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아도니야의 야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내정해 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소명이나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본주의적 생각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아도니야가 인간적 욕심으로 왕이 되려 하였다는 사실은 ‘스스로 높여서'로 번역된 ‘미토낫세’ 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스스로 높여서’ → 아도니야의 야심의 근거와 그가 했어야 할 올바른 생각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는 ‘교만(잠30:32)’, ‘오만(왕하14:10)’을 나타내는 표현.
-아도니야의 교만과 오만은 장자로서의 권리와 남보다 뛰어난 외모로 인한 인간적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정 왕국에서 왕을 세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평가하신다는 사실이었다(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가증히 여기시며, 교만한 자를 반드시 폐하신다(잠 16:5). 그러므로 교만한 자의 종말은 오직 파멸 뿐이다(잠 16:18). 교만한 자는 객관적으로 아무리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해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도니야의 준수한 외모와 그의 내면 상태
-본절에서는 아도니야의 탁월한 외적 아름다움만을 언급할 뿐 그의 내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없옴을 암시한다.
-사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에게 있어 준수한 외모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신정 왕국을 통치할 지도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중심이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함께하시는가, 하나님이 그룰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다.
다윗 역시 준수한 외모와 호기와 무용 그러고 구변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외모나 인간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삼상 16:7).

아도니야의 무례성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그는 솔로몬이 하나님과 다윗이 지정해 준 왕위 계승자임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 부친의 장례가 눈앞에 가까웠다고 생각하여, 그를 계승하려고 채비를 차렸다. 그러나 실상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대로,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다윗 자신이 이미 선포하였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확정된 것이었다. 즉 국무회의로 가결되고 난 문제였다(대상 22:9; 23:1). 아도니야는 하나님과 그의 부친을 무시하고서 이 왕위 계승을 억압적으로 끊어 버리려고 획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왕국도 반대를 받는다. "결코 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2. 그는 자기 부친이 노쇠하여 폐물이 되었으므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즉시 왕좌로 나아갔다. 그는 자기 부친이 죽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 (18절)고 하며,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다(25절). 그의 부친은 나이 들어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하기에 부족하고,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통치할 능력이 없어 부적합하였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드디어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 자녀가 그 부모의 노쇠함을 기회로 그 부모를 모욕하는 것은 야비하고도 악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이러한 야심에 가득찬 계획을 추구하기 위하여,

(1) 아도니야는 자기를 수종들고 싸워 줄 힘세고 위용있는 병거의 기병 등 많은 시종을 취했다(5절).

 💡 아도니야의 ‘내가 왕이 되리라’고 다짐은 즉각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와우법)

이때 아도니야가 준비한 것들은 앞서 암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 준비하였던 것과 동일하다(삼하 15:1)는 사실 역시 아도니야가 압살롬처럼 불법적으로 왕권을 차지하려 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아도니야가 병거들 뿐만 아니라 기병들까지 갖추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첨단 부대를 소유한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아도니야는 병거와 기병으로 표현된 첨단 부대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며 위용을 과시할 수 있는 전배 등을 통하여 왕위 찬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는 직접 장군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에게 큰 호의를 받았다(7절).

그가 교회와 군부내에서 큰 영향력을 구사하여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책략 때문에 그들이 아도니야를 추종하고 조력하게 되었는지,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때 다윗이 당면하였던 난국을 가장 충성스럽게 이겨나갔던 지각과 경륜이 많은 노련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쉽게 감언이설에 미혹 당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확고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왕관이 솔로몬에게 상속되어 씌워질 것을 모르고 있을 수 없는 자들이다. 또 그 권한을 저지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그들의 이득이었다.

 💡본절은 아도니야가 왕위 찬탈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유력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아도니야는 군부 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요압과 종교 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아비아달을 포섭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다윗과 오랜 기간을 동고동락하여 왔던 자들이었으며 당시 이스라엘의 보수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자들은 다윗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었던 헤브론에서부터 군사 및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보수 세력답게 장자 왕위 계승의 원리를 존중하였으며, 당시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아도니야가 연장자였으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을 것이다.

요압
-한편 보수 세력의 중심 인물인 요압은 다윗의 조카로서 그 특유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시온 산성에 먼저 올라가 여부스 사람을 쳤으며(대상 11:6), 에돔 남자를 모두 죽이고(11:15.16), 암몬 수리아 연합군을 맞이하여 전군을 지휘했고(삼하 10:1-14), 암몬 자손의 랍바성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하였던 찬란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삼하 11:1; 12:26-29). 또한 압살롬의 반역과(삼하 18:1-16) 세바의 반란을(삼하 20:1-22) 효과적으로 진압하였다.
-이러한 혁혁한 수훈을 세우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잔인한 성품으로 다윗의 뜻을 거스르고 아브넬과 아마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삼하 3:27; 20:10).
-이러한 ‘요압' 은 나단 선지자의 영향 아래 자란 온유하고 경건한 솔로몬보다는 야심 있고 준수한 용모를 지닌 아도니야의 편에 가담하여 다윗 사후에도 계속 권세를 확보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다윗의 바람이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정치적 실리를 쫓아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인본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아비아달
-제사장 ‘아비아달’은 사울이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을 살해했을 때 그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에봇을 가지고 당시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도망해 온 인물이다(삼상 22:20-22 ; 23:6,9). 그 후 아비아달은 다윗어 왕위에 올랐을 때 사독과 더불어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으며(삼하 15:24; 대상 15:11.12),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할 때에 도 사독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를 정도로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왕위 계승에서 아도니야를 지지함으로 말미암아 후에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 의하여 제사장직을 파면 당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된다(2:26).
-이러한 결과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판단으로 아도니야를 지지한 아비아달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하지만, 동시에 삼상 2:31-35에 기록된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요압과 아비아달이 아비아달을 쫒아 도움
-본문의 이 표헌은 요압과 아비아달이 모반의 주도 세력이 되어 아도니야가 왕권을 찬탈할 수 있도록 군사적 지원까지도 아끼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멋대로 버려두셨다. 아마 그들 자신이 만든 채찍으로 이전의 어떤 그들의 비행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독과 브나야 및 나단같은 사람들은 다윗에 대한 충성심에는 지극히 정평이 나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로서는 자신의 궤계를 이들에게 제시할 만한 자신조차 없었다(8절). 선한 일에 철저한 신념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하게 유혹 당하지 않는 법이다.

💡 8절,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던 주요 인물들의 명단.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자들이 헤브론에서부터 다윗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보수 세력이었던 반면 이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온 이후부터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던 신진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근동의 보편적인 장자 중심의 왕위 세습의 세속적 전통보다는 신적 선택으로 신정 왕국의 정통성을 확립할 인물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다.

‘사독'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듭의 아들(삼하 8:17). 대상 12:26-28에서는 그를 레위 집의 용사로서,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러 간 사람들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에서 도망치게 되었을 때에 아비아달과 함께 여호와의 궤를 맡았었다(삼하 15:24.25). 아비아달과 사독 모두 제사장이라고 기록되고 있으나(삼하20:25), 아비아달이 선임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 치하였을 때에도 사독은 중앙 성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성막이 있었던 기브온에서 봉사하였 으며(대상 16:39), 또한 본서 2:35의 ‘사득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는 표현 역시 사독을 배제한 아비아달의 특별한 역할이 있었음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브나야
유다 남쪽 갑스엘 출신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다윗의 30명의 맹장들 가운데 한 사람(삼하 23:20-23; 대상 11:22-25), 그렛과 볼렛 사람을 관할하는 시위대 장관(삼하 8:18; 20:23 ; 23:23). 압살롬의 반역 때에도 충실하게 다윗을 좋았던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브나야는 솔로몬에게도 층성하여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도왔으며(38절), 왕위 찬탈을 시도한 아도니야(2:25), 요압(2:29-34), 시므이(2:46)를 숙청하고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이 되었다(2:35).

’나단'
다윗의 통치 기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선지자.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다윗 언약을 전하였으며(삼하 7:4-17),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였을 때에는 신랄한 책망을 하기도 하였다(삼하 12:1-14).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삼하 12:24-25)을 전하기도 한 나단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위헤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의 계승자로 택하셨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아도니야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느로겔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9절).

손객으로는 왕자들과 왕의 신복들이었는데, 그것은 저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자기 일당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무마하기 위함이었으나, 솔로몬은 여기에 청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를 멸시해서든가 체념해서였을 것이다(10절).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배를 섬기는 자들과 같아서, 어느 편에 속하든지 간에 자기들에게 향응을 베풀어 주는 자를 위하게 된다. 이러한 자들이야 말로 용이하게 유혹자들의 희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롬 16:18).

💡 결국 아도니야는 즉위를 알리는 제사를 통하여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였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려 함. 그렇기 때문에 아도니야의 초청을 받고 이 즉위식 성격의 제사와 이에 뒤이어지는 잔치에 참여한 일군의 사람들은 ‘아도니야 왕 만세'를 외쳤던 것(25절).

그러나 아도니야의 이러한 제사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닌, 정치적 계산에 근거해 자기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드린 제사였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신성한 예배 행위인 제사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한 것으로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이다.
💡 즉위식의 장소
-아도니야가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인 ‘에느로겔’ 은 힌놈 골짜기와 기드론 골짜기가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약 200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 근방의 샘터이다. 이 샘터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에(삼하 5:6 이하) 유다의 북쪽 경계점(수 15:7)이었으며, 압살롬의 반역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여기에 있으면서 다윗에게 비밀 정보를 전했었다(삼하 17:17). 그리고 ‘소헬렛 둘' 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에느로겔 근처의 돌로 느 2:13에 나오는 ‘용정’과 동일시 되는 곳이다. 이곳의 돌은 넓고 평평하여 나그네들이 앉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으로도 이용되었던 것 같다. 고대인들에게 샘터는 생활과 정보 교환의 중심지였으므로 아도니야는 자신의 왕위 즉위 사실이 잘 알려질 수 있도록 이곳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압살롬의 반역 때와 달리(삼하 15:1-12) 아도니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밀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즉위식도 왕도인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서 거행하였다. 이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아도니야가 노쇠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자기 스스로 왕이 되는 것에 큰 장애 요인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으로 태어난 자로 당시 왕자들 가운데는 연장자였을 뿐만 아니라 용모도 출중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군부의 실권자인 요압과 종교의 실세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거를 마련하고 기병과 호위병을 50명이나 데리고 다니며 왕의 후계자로 행세하였어도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일 등으로 인하여 아도니야는 자신이 광으로 즉위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드디어 다윗 왕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동조자를 모아 스스로 왕위 즉위식까지 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의 이러한 생각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내정하여 둔 사실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하고 불법적인 생각이었다.
-이는 아비 다윗 왕의 뜻을 거역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을 친히 세우시며(삼상 12:13), 실질적 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다(삿 8:23).
-그리고 이러한 그릇된 생각이 ⇒ 왕위 찬탈 시도라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로 나타난 것이다.

왕자, 왕의 신본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함.
유다 지파 출신의 고급 관료들'은 누구인가?
-삼하19장과 20장의 기록에 따르던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한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에 유다 지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때에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의 환궁 문제에 있어 유다 지파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태도에 대해 다윗에게 항의하였으나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다윗이 유다 지파의 세력을 자신의 뜻대로 제어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에게 상당히 의존적어었음을 암시한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 이후 왕권을 회복하는 데 있어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지지 기반으로 유다 지파를 선택했고 이는 분명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정치적 운신의 폭을 좁게 한 것 역시 사실이다.
-본문의 ‘유다 출신의 고급 관료들'은 바로 다윗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결과로서 환궁 후 등용했던 유다 지파 호족 출신의 관료들이었을 것이다.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요압에게 아마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하고 그를 다시 군대 장관에 임명하였던 것처럼(삼하 20:23) 자신의 환궁에 결정적 도움을 준 유다 지파에 대한 논공행상에 따른 등용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도니야가 초청한 ‘왕자들과 유다 출신의 고급 관료들’ 은 모두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로서 이스라엘 왕국의 중앙 집권화를 막는 한 요인으로 작용할 만한 정처 세력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하였다는 사설은,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 국가라는 인식이 극히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왕권 계승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대로 왕자 중 서열어 높고 인물이 출중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도층들이 정권을 잡고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면 이스라엘 내에 신본주의가 무너지고 인본주의가 횡행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층 사이에 솔로몬을 선택하느냐, 아도니야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그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솔로몬은 인본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아도니야의 왕위 즉위를 지지한 자들로서 신본주의적 정처 체제의 기틀을 잡는 데 방해가 되는 불신앙적인 일군의 ‘왕자들'과 유다 출신의 고급 관료들을 이스라엘 지도층에서 자연스럽게 축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도니야의 반역 사건은 결과적으로 솔로몬에게 구시대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며,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제도 정비를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일어 있지 않았다면 솔로몬이 강한 중앙 집권적 통치를 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많았을 것이다.

다윗 이후 왕위를 계승할 자가 솔로몬이냐, 아도니야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정처적 선택이 아닌, 신앙적 선택의 문제였다.

아도니야가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희생 제사를 위함이요, 나아가 그는 하나의 종교적 축제를 연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흡사 압살롬이 맹세를 구실 삼았듯이(삼하 15:7), 제사장을 자기 편에 가담시키면, 일이 더 잘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In nomine Domini in cipit omne malum-즉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악이 시작된다고 하거나, 모든 종교 의식이란 온갖 종교적인 관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노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