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40, 마가복음 10, 욥기 6, 로마서 10
묵상구절
2:13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2:14 또 이르되 내가 말씀드릴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2: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2: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2: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8 밧세바가 이르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2: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2: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도니야의 종말(열왕기상 2:12-25)
Ⅰ. 이제 솔로몬은 왕좌에 올랐다(12절).
솔로몬은 다윗보다 훨씬 용이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즉위했고, 그의 정권은 훨씬 신속히 확립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 사람의 선군의 종언이 다른 한 왕의 시작이 된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행복이다.
👉 여기서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해졌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방백과 용사와 그러고 다윗 왕의 여러 아들들이 모두 솔로몬에게 복종함으로 위계 질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대상 29:23-25).
한편 이러한 나라의 안정은 솔로몬의 뛰어난 통치 능력과 앞으로 언급될 솔로몬의 숙청 작업을 통해 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삼하 7:12의 다윗 언약에서는 사역형이 생겨서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후계자에게 이 견고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수동형 사용되어 이스라엘이 견고하게 되었다고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솔로몬의 등극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 왕국의 견고함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으로의 왕권은 이양 앞으로 계속 이어질 이스라엘 왕조가 따라야 할 왕권 이양의 모범으로 주어전 것이며,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는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왜곡된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을 해답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선택을 상징하는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바르고 견고하게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안목을 상징하는 아도니야를 선택하였다면 이러한 축복된 결과는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을 본서의 일차 독자들은 본문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만이 견고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인위적 방법을 취하였던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하게 되었을 것이다.
Ⅱ. 왕권 확립을 위한 적수 아도니야를 제거했다.
그것은 정당한 일이요 필요한 일이었다. 아도니야는 대담하게도 왕권을 넘보고 있으나, 곧 그 허식은 여지없이 추락되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를 솔로몬의 처분에 맡겨야 할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를 선행을 조건으로 하여 놓아 주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가 가만히만 있었더라도 목숨은 안전했을 뻔했다.
그러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스스로 배반하여 솔로몬의 정의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방임해 두시사, 전에 그가 반역한 일 때문에 벌을 받게 하시고, 또한 솔로몬의 왕위가 확립되도록 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 자기들이 잘 지내는 때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몰락하는 수가 많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기회로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아 둔다.
👉 아도니야의 음흉함
-왕권을 찬탈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철저히 감추면서 밧세바를 이용함.
-13절 하반절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방문의 저의를 물어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도니야의 이 방문은 관례에 따른 것이거나 일상적인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도니야가 이렇게 밧세바를 찾아간 것은 아직도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버러지 못하고 또다시 왕권 찬탈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그 첫번째 계획은 아버지 다윗을 수중들었던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17절).
한편, 본문은 밧세바가 솔로몬의 어머니, 즉 태후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간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아도니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복 형제인 솔로몬 보다는 그의 이미 밧세바를 다루는 것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누구보다도 솔로몬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스라엘 왕국에서 여러 모로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태후(14:31; 15:10-13; 왕하 12:1; 14:2)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밧세바를 찾아간 것이다. 즉, 솔로몬과 직접 대화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줄이면서 영향력 있는 태후 밧세바를 조정하여 왕권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고자 한 것이다.
아도니야의 이러한 치밀한 계획은 아담을 직접 공략하는 대신 먼저 하와를 꾀어 낸 뱀의 전락을 상기케 한다(창 3:1-6).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라.
1. 다윗의 첩 아비삭과 결혼하려는 아도니야의 음모가 있다.
이 음모는 그가 아비삭을 연모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그가 대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집요한 왕권 주장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왕의 처" (삼하 12:8)를 취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또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자기 부친의 첩들과 동침하는 것이 자기의 자만심을 지탱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도니야는 특히 다윗의 첩 중에서 가장 훌륭한 여인과 다윗의 침실에 들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발판으로 다윗의 왕좌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부풀었던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고조되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왕국을 쟁취하기 위한 불장난을 시도하여 무력으로는 얻을 수 없으나 한 여인을 통해서 이룩하기를 바랬다.
💡 왜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자 했는가?
-아도니야는 다윗의 후궁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아비삭(1:1-4,15)을 아내로 삼아서 자신을 은연 중 다윗의 진정한 후계자로 부각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선왕의 첩을 취하는 일은 사실상 왕권을 이어받은 후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과거 압살롬이 모사 아히도벨의 계략에 따라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삼하 16:21, 22).
-물론 다윗은 수넬 여자 아비삭과는 동침하지 않았다(1:4). 따라서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아내로 취한다 해도 실상 선왕의 첩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눈에는 아비삭이 다윗의 첩으로 인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 일 하나로 말미암아 갑자기 솔로몬의 왕권이 전복될리도 없었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해서 아도니야는 왕권 찬탈을 위한 수순을 지속적으로 밟아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과거 압살롬의 반역 때처럼(삼하 18-20장) 이스라엘은 많은 혼란과 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2. 이 음모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을 보자.
아도니야는 직접 아비삭에게 구혼하려 들지 않았다. 이스보셋이 이와 같은 경우에 그랬듯이(삼하 3:7), 그녀는 솔로몬의 의사에 달려있기 때문에 솔로몬의 동의를 먼저 얻지 않으면 솔로몬이 정당히 분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솔로몬이 자기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처지라 자기 자신이 솔로몬에게 직접 청원해 보지도 않았다. 그는 밧세바를 이 사건에 중재자로 써 보았다. 그것은 밧세바가 이 사건을 애정 문제로 생각하고, 쉽사리 정책 문제로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그녀의 방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기에게 해를 끼칠 마음을 먹고 오지나 않았나 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도니야의 최근의 음모를 분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니올시다. 나는 화평한 목적으로 와서(13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4절) 이는 그녀가 그녀의 아들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을 이용하여 아비삭에게 장가들기 위한 그의 동의를 얻으려 함이었다.
그래서 이 동의를 얻기만 하면 그것을
(1) 왕국을 잃은 손해 배상으로 여기고 감사히 여기려 한 것이다.
"그는, 당신도 아시는 바와 같이, 왕위는 나의 부친의 생존시 그의 장자인 나의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였습니다" 라고 넌지시 말했다(15절).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편에 선 자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왕위가 빼앗기게 된 데 대한 자기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이기 위하여, 한 여인으로 만족하려고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가 비록 그의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중 값이 나가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한 것인데 이것이 곧 아비삭이었다.
💡 동정심을 유발함 → 아도니야의 착각에서 비롯된.
15절,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본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아도니야를 사랑하여 그가 왕이 되기를 원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잘못된 상황 관단에서 나온 착각이다(1:20,40). 비록 그를 추종한 세력들이 있기는 하였으나(1:7,9) 지극히 일부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의 지지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주장은 과장인 동시에 아도니야의 교만한 성품과 왕위에 대한 집착에서 연유된 착각일 뿐인 것이다(1:5).
-아도니야는 온 이스라엘이 자신을 지지했으므로 왕위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로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밧세바에게 말하여 그녀의 마음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5절, ‘그 왕위가 돌이켜’
-또한 자신만이 마땅히 보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으며, 또한 온 이스라엘 역시 이를 알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으로 왕위가 솔로몬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아도니야는 의도적으로 본문의 주어를 ‘그 왕위' 로 표현한다. 아도니야는 이처럼 의인법을 사용하여 ‘그 왕위'가 스스로 돌이킨 것으로 표현한 것은 솔로몬이나 밧세바가 왕위를 찬탈한 것도 아니며, 아도니야가 잘못해서 왕위를 빼앗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아도니야는 이런 식으로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 희고케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선택 받은 왕을 아들로 둔 밧세바를 추켜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그녀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묘한 말에 넘어간 밧세바는 결국 아도니야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솔로몬을 찾아가게 된다.
👉 아도니야의 치밀한 모습
-아도니야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이 말은 즉시 효과를 가져와서 밧세바는 기분 좋게 ‘말하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본문은 태후의 지위에 있었던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악한 계교에 휘말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도니야는 상대방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면서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밧세바의 심리를 잘 이해하여 이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사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생존한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왕위 계승 서열상 가장 앞서 있었다. 아도니야가 신정 왕국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이러한 인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기준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역모를 시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5절,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직역하면 ‘여호와로 인하여, 그것은(왕위는) 그의(솔로몬의) 것이 되었습니다’.
⇒ 이 말은 아도니야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여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상 아도니야는 하나님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여전히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밧세바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하여 자신이 존중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 아도니야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였다면 애초에 스스로 왕이 되려하지 말았이야 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말을 하는 궁극적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다시 한번 반역을 일으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어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의 등장
-한편, 앞선 1장에서는 밧세바가 솔로몬의 등극에 적절하고 지혜롭게 행하였고 솔로몬의 경우는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 능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본장에서는 밧세바가 어리석게 행동하는 반면, 솔로몬은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솔로몬의 현명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며, 앞으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효과를 지닌다.
(2) 나라를 잃는 손해를 감수한 대가로 보려했다.
그는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자인했다.
"그것은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내가 왕위를 쟁취하려고 경쟁한 것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솔로몬에게 돌아갔으나 나는 만족합니다." 이렇게 그는 솔로몬의 왕위 즉위를 기뻐하는 척하기는 했으나, 그때 그는 솔로몬의 마음을 교란시킬 수 있는 모든 수작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버터보다 더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 17절,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키 아니하리이다
-아도니야는 밧세바로부터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확답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보다 확실히 이루기 위하여 밧세바에게 본문과 같이 말하였다. 본문의 표현은 앞서 16절에서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아도니야는 그와 동일한 표현을 본문에서 밧세바와 솔로몬의 관계에도 적용시키고 있는 것.
-이러한 아도니야의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는 솔로몬이 어머니인 밧세바의 말은 반드시 들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 밧세바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솔로몬에게 청탁을 하도록 하려는 것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솔로몬이 자신과 관련한 밧세바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아도니야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밧세바에 대한 거절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왕의 모친이 왕에게 거절 당하는 것은 모욕이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후자로 이해한다면 아도니야는 밧세바로 하여금 자신의 일처럼 힘써서 이 일을 처리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 말을 한 것이 된다.
이상의 두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이지만 아도니야의 말을 들은 밧세바가 조심스럽게 솔로몬에게 청탁을 하는 것을 볼 때 (20절) 후자가 더 타당해 보인다.
3. 아도니야를 위해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한 말이 있다.
밧세바는 솔로몬 왕 앞에서 아도니야를 대변하기로 약속했고(18절), 또 그렇게 했다(19절).
💡사실,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가지고 가는 청탁은 사소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내포된 의미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스라엘의 견고함이 위협 받을 수도 있는 심각한 것이었다. 만약 솔로몬이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는 왕이라면 밧세바처럼 아도니야의 술수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밧세바에 대한 솔로몬의 극진한 환대는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며 밧세바가 속아 넘어간 것처럼 과연 솔로몬도 속아 넘어갈 것인가, 즉 솔로몬이 아도니야의 반역의 의도를 분별할 만큼 지혜로운가라는 주제가 주요 문제로 대두된다.
솔로몬은 비록 자기가 왕이기는 했으나 어머니에게 하여야 할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즉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접한 후 우편에 앉게" 했는데, 이것은 제5계명에 따른 것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하는 모습을 통해, 솔로몬의 자세는 엡6:1-3, 부모 공경을 실천하는 자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되는 은총을 받아 누릴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어머니 우편의 자리에 앉힘으로 밧세바를 최고로 극진히 예우하였다(고대 근동 사회 문화)
자녀들은 그들이 성장했을 때 뿐만 아니라 위대하게 된 후라도, 자기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며, 충순하게 그리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너의 어미가 늙었더라도 경시하지 말라." 그가 자기 어머니의 지혜와 권위에 대하여 표할 수 있는 공경의 일례를 더 든다면, 그녀가 자기 앞에 나와서 청원할 일이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 청원을 괄시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다음과 같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곧 그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 만약에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녀의 말을 기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드디어 심부름으로 왕에게 나왔음을 실토했다. "아비삭을 당신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소서" (21절).
💡 솔로몬을 만난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자신에게 한 것과 같이 이야기의 흐름을 늦춤으로 솔로몬의 관심을 끌어내어 자신의 청을 효과적으로 이루려 하였다.
밧세바는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을 하기보다는 청을 들어주겠다는 솔로몬의 약속을 먼저 받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밧세바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아도니야의 술수에 완전히 넘어가서 꼭두각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에게 ‘한 가지 작은 소원’이라 말했다.
-여기서 ‘작은’ 이라는 표현은 16절의 아도니야의 말과 비교할 때 아도니야가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말로서 밧세바의 개인적 견해였다. 그런데 밧세바의 이러한 독자적인 견해마저 그녀의 무분별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청탁을 결코 사소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왕위를 빼앗겼다고 말해 그에 비하면 자신의 청은 매우 사소한 것이라는 느낌을 밧세바로 하여금 갖게 한 것이다(15~17절). 그리고 아도니야로 왕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소원’, 궁극적으로 솔로몬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1:21) 그 ‘청'을 ‘작은' 것으로 여기는 밧세바의 이러한 말은 참으로 미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상한 것은 그녀가 이 음모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청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근친상간을 증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비삭을 다윗의 아내로 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결혼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녀는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녀의 생각에는 아도니야를 만족케 해주기 위해 그런 결혼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음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녀의 약점이자 우행이었다. 그녀가 섭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은 다행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군왕이나 고관을 보필하는 자들에게 있어 군왕이나 고관의 이익을 너무 탕진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지혜이듯이, 죄를 조장하거나 사악한 궤휼을 방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또한 그들의 의무이다. 왕들에게는 그들이 수락해서는 안 되는 것을, 청탁하지 말자. 사악한 간청을 더 기뻐하거나 사악한 궤계 앞에 나서는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다.
4. 솔로몬은 요구를 정당하고도 합법적으로 기각시켰다.
그의 모친 자신이 대변인이 되었고, 그것은 "한 가지 작은 일로 간청" 하는 것이라고 칭해졌고, 또 그것이 아마도 솔로몬이 왕이 된 이후 밧세바가 그에게 괴로움을 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거부한 것은 자기가 전에 한 총괄적인 약속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20절). 만약에 헤롯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자를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경우와 같이 자기가 헤로디아에게 한 총괄적인 약속에 의하여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아무리 좋은 우리의 친구라도 우리로 하여금 부당하고 어리석은 그러한 나쁜 일을 하게 할 정도로 우리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1) 솔로몬은 그의 모친에게 그 간청의 불법성을 확인시켰으며, 그녀가 전에 알고 있지 못한 그 일의 귀추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약간 신랄했다.
💡 22절, 솔로몬 왕의 분노
-솔로몬은 그의 어머니 밧세바로부터 아도니야에 대한 청을 들은 순간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차지함으로 다시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깨달았으며, 이에 마치 맹수가 포효하듯이 분노하여 소리 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분노한 감정은 이어지는 솔로몬의 전술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야 할 왕으로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왕의 후계자가 선왕의 첩을 소유하는 관행(17절 강해 설명 참조)을 고려한다면,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아내로 취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드러내어 왕권을 차지하는 발판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밧세바와 달리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즉 "그를 위하여 왕위까지도 구하옵서서(22절). 왕의 침상을 계승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왕위 계승 요구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아도니야가 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요압과 아비아달과 더불어 자기를 교란시킬 음모를 하고 있다는 정보와 그렇게 의심할 만한 이유를 포착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아도니야의 요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2)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헛된 교만을 지적하고 맹세하면서 정죄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그 자신의 말 때문에 정죄했다(23절).
💡 23, 24절
-아도니야를 숙청하겠다는 솔로몬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본절과 24절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건 솔로몬의 맹세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사로운 감정에서가 아니라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공적 직무로 이루어지는 맹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즉각적인 맹세로 인하여 그 어떠한 변명이나 논쟁의 여지 없이 아도니야의 처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솔로몬의 독단이나 혹은 감정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 아니라 솔로몬이 아도니야와 한 조건부적 언약에 근거해(1:52) 내려진 정당한 결정이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과 약속한 대로 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어기는커녕 오히려 다시 왕위를 차지하려고 반역을 모의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살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반역자 아도니야의 처단 결과 나라가 더욱 견고해겼다는 것은(46절) 솔로몬의 이러한 처리가 지혜로운 것이었음을 확증해 준다.
23절,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본문은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이러한 범죄자를 처벌하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솔로몬 자신 역시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을 잃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혀가 그에게 떨어지고 만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더 무거운 짐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다. 밧세바는 속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아도니아가 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즉 "그는 이런 말을 하였은 즉 그 생명을 잃으리라. 그는 그 입술로부터 나온 자신의 말로 함정에 빠지고 있으므로, 그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라고. 그는 곧 아도니야의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24절).
하나님은 친히 다윗의 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맹서로 선언했다(시 89:35).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 왕위를 노리는 원수를 제거함으로써, 왕위를 견고케 하겠다고 하는 꼭 같은 확약을 했다. "왕위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즉, 이를 교란시키려는 아도니야는 정녕 죽어야 하리라."
💡 앞서 두 절에 걸쳐서 솔로몬의 맹세가 상당히 길게 기술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도니야의 처형이 반드시 필요한 일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손위 형인 아도니야를 처형하는 것이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사실 반역자를 숙청하는 것은 왕조의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린 솔로몬에게는(대상29:1) 쉽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솔로몬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 단호하게 자신이 맹세한 대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은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의 시위대장 브나야를 보냈다.
솔로몬의 아도니야에 대한 숙청은 단순히 ‘왕권 도전 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차원 뿐만이 아니라 ‘신정 왕국의 확립 및 강화'라는 신적 공의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솔로몬은 신정 왕국의 확립과 강화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아도니야의 처형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왕국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패망이 분명한 것은 그의 왕국의 견고성이 분명한 것과 같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녀와 모든 생명의 확고부동한 것과 같다. 아도니야의 사형집행 승인은 곧 서명되었고, 그 사형집행자로서는 다름 아닌 군대장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임명되었다(25절). 아도니야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는 이 사건을 더 이상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도니야가 왕위를 노린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심이 많고 불온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죽음의 도구를 스스로 준비하게 마련이다. 왕권을 잡으려다가 목이 잘린 자들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