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2월 27일 월요일 왕상9:1-9 여호와께서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다

Jeehyun 2023. 2. 28. 14:13

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10, 누가복음 13, 욥기 28, 고린도전서 14

묵상구절

9:1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9: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9:5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9:6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9:7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9: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솔로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응답(열왕기 상 9:1-9)

 👉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다루고 있는 1-9절과 두로 왕 히람에 대한 솔로몬 의 보상을 다룬 10-14절은 솔로몬의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을 완공하고 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성전 봉헌식이 기록된 8장과 솔로몬 왕국의 최고 번영기를 반영하는 다양한 건축 공사와 해상 교역을 다룬 15-28절 사이에 위치하면서, 솔로몬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이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두 번째 현현으로서 성전 봉헌에 즈음하여 드린 솔로몬의 기도 에 대한 하나님의 웅답을 기록하고 있는 1-9절 단락은 3:4-14절의 하나님의 첫 번째 현현 사건과 비교할 때

*긍정적 측면의 권고와 격려, 약속이 있다는 측면에서 유사성도 있지만
*솔로몬이 타락하여 범죄할 경우 있을 심판에 대한 경고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포함하고 있다.

이같은 차이점은 초기의 외교 관계 (5:1-12)와 다른 국면에 접어든 히람과의 관계를 서술하는 10-14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초기의 기사와 비교되는 이같은 차이점을 통해 본서 저자는 솔로몬 왕국 이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불안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함께 안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대립적 개념의 병치를 통해 본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솔로몬이 초기에 달려왔던 축복의 길을 걸어가다 이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즉 과거 솔로몬이 바른 신앙의 노선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과 의로운 통치의 터전인 왕궁을 건축하는 초기의 상황과는 다른 국면에 직면해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 본서의 저자는 솔로몬이 장차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1-9절: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통해서 솔로몬 왕국의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신 것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보장하셨다. 즉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4,5절),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6-9절)을 말씀하신 것이다. 게다가 순종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평 성대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해이함에 빠질 것을 미리 대비하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시간적 배경.
*이 때는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이 완성된 이후로서, 적어도 솔로몬 즉위 24년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6:1; 7:1; 9:10). 따라서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드린 시점과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시점 사이에는 적어도 13년의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솔로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 하시지 않고, 왕국의 최고 번영기였던 시기에 과거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응답하신 것은,
*왕국의 번영으로 인하여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칫 교만해져 당신을 버리고 언약을 이행하지 않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등장할 계시의 내용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축복보다는 언약에 불충성했을 때 있게 될 징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솔로몬 왕국은 비록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이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대과업을 완수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계속적으로 성실히 이행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본문은 암시한다.
 👉 1절, 자기의 무릇 원하던(’하페츠) 일(’헤쉐크)이..

성전 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강한 집착과 열정. 본문과 병행 구절인 대하 7:11에서는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이란 기록이 나와있다.
→ 이 기록에 의하면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을 계획했던 대로 빈틈 없이 완벽하게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공동 번역은 본문에 대해서 솔로몬이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모든 건물을’ 완공했다고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공동 번역은 본문에서 솔로몬의 열정을 나타내는 단어 ‘하쇠크’가 솔로몬의 기타 다른 건축 사업을 기록한 19절에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본문에서 솔로몬이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을 ‘국고성과 병거성과 마병의 성’과 같은 것들을 건축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어떠한 해석을 따르든지 본절 전체를 보면 솔로몬의 제반 건축 사업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성전과 왕궁 건축은 완성했지만 하나님의 말씀 이행이 솔로몬에게 여전히 현재적 과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실제로 응답하셨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불사르게 하심으로써(대하 7:1) 자기가 그의 기도를 열납하신다는 것을 표시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보다 명백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게 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도록 하자.

Ⅰ.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그에게 응답하셨는가?

하나님은 솔로몬이 처음 기브아에서 통치를 시작할 때 꿈 또는 환상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그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2절).

👉 저자가 첫번째 현현 장소인 기브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두번째 현현의 방식이 꿈이었다 는 단순한 사실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본장에서 언급될 계시의 성격을 앞선 계시의 성 격과 비교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현현에서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무조 건적인 호의를 나타내시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요소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반면(3:5-14), 두 번째 현현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만 아니라 조건적인 내용과 불순종에 대한 경고라는 부정적 요소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이와 같이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변화된 것은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이지만 그 역시 외적 풍요로 인하여 타락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닌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현몽은 솔로몬이 절기의 축제 의식을 끝낸 바로 그날 밤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도 그랬기 때문이다(대하 1:6, 7). 그런데 1절에는 솔로몬이 모든 건축을 완성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전이 준공된지 여러 해 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1절은 "솔로몬이 건축하기를 마쳤다" 고 읽히며(대하 7:11 에 나타난 대로), 2절은 "그러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고 읽지 않으면 안된다.

Ⅱ. 이 응답의 취지.

 👉 9, 10장에서는 솔로몬의 타락을 꾸짖는 하나님의 직접 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이미 경고하 였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다른 신을 쫓은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솔로몬이 왕궁 건축이 완성된 즉위 24년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신앙이 쇠 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성공적인 건축 사역과 활발한 대외 무역 및 평화 외교 동과 같은 업적들로 인하여 자칫 교만에 빠질 수 있었던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금 언약을 상기시켜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타락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경고하셨던 것이다.

성도들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 (잠 16:18)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언제나 겸손히 주님만 바라보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답하여 그가 건축한 성전에 당신께서 특별히 임재하시겠다는 것을 확약하신다(3절).

"내가 이전을 거룩하게 구별하노라."

솔로몬은 그 전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즉 성별하거나 성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였다. 인간은 어떤 장소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성심으로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자기의 소유를 받아들이시리라고 바랄 수 있다.

👉 본절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이 성전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방법은 → 자신의 존재 자체를 뜻하는 ‘이름’을 성전에 두시는 것이다.

이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말과도 같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솔로몬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은 아니며, 성전이라는 건물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주체는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한편 이와 같은 원리는 사람과 땅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사람과 땅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열방 가운데 거룩한 선민이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셔서 통치하시기 때문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가나안 땅 역시 거룩한 이유는 그곳을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땅으로 구별하시고 눈여겨 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눈과 그의 마음은 항상 거기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산 성전인 개인에게 적용해 보자.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시거나 성화시키신 자들 즉 자신을 위해 따로 떼신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눈과 그의 마음과 사랑과 보살핌이 있으며 그것은 영속적으로 거기에 존재한다.

 👉 ‘나의 눈’
하나님께서 특별히 감찰하시고 관심을 쏟으사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뜻하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특별히 감찰하시고 관심을 쏟으실 뿐 아니라, 늘 함께하심으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주의 눈으로 이 전을 주야로 보아 달라’ 는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8:29),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눈 뿐 아니라 마음도 성전에 항상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2.하나님은 솔로몬과 그 백성이 장래에는 그들의 선한 행실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전이 자기들 중에 있다고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같이 안심해서는 안 되었다(렘 7:4).

이 전은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들을 보호하도록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반역하거나 불순종하는 경우에는 성전도 그들의 보호를 책임지지 않게끔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숨김없는 거래를 하시사 우리 앞에 선과 악, 축복과 저주를 두시고 우리가 무엇에 의탁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솔로몬에게 다음 사실을 말씀해 주신다.

(1) 나라의 확립은 그의 복종심이 항구여일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4, 5절).

"다윗은 네게 훌륭한 본을 남겼고 동시에 그 본을 따르도록 하기에 충분한 격려도 남겼다. 네가 만일 유리한 혜택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면-바로 이것이 요체이다. 성실이 없으면 신앙도 있을 수 없다-내가 네 왕위를 견고하게 하려니와 네가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 본문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따라야 할 신앙의 표본으로 그의 부친 다윗을 제시하심

행하다(할라크)
*원래 ‘걷다’ 라는 뜻
: 본문에서는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행동 방식을 나타냄. 따라서 본문은 다윗이 생전에 여호와 앞에서 살아갔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솔로몬도 닮을 것을 권고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홈 없이 완전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다윗은 유부녀 맛세바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충성된 신하를 죽이는 극악한 범죄를 행했으며(삼하 11장), 말년에는 여호와만을 의지하지 않고 군사력에 의존하는 연약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냈다(삼하 24장).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이자 표본으로 다윗을 제시하신 것은
→ 그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깨달은 즉시로 회개했다는 사실에 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겸허하게 기다렸던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다윗의 삶의 태도를 솔로몬이 본받을 것을 권고하고 계신 것.

다윗의 행위를 본받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
‘내 앞에서’에 해당하는 ‘레파나이’는 직역하면 ‘나의 얼굴 앞에서’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앞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존을 나타낸다(Coram Deo).
이는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고 동행 하여야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외식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실된 행위를 하라는 의미를 통시에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비록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 들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이지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계심을 직시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야 함을 나타낸다.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 이는 솔로몬이 따라야 할 표준으로 제시되었던 다윗의 마음가짐을 요약하여 표현한 말

*‘온전히 하고’
이 명사는 결과 그 자체가 아닌 설정된 결과를 이루기까지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신정 국가 이스라엘 왕들이 따라야 할 삶의 척도가 되었던 다윗이 생전에 여호와 앞에서 항상 결함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앞의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 였다(삼하 11:2-12:5; 24:10 등).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개함으로 끝까지 신앙을 부여잡고, 성실히 주를 사모하며 그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였던 다윗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받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마음 자세를 솔로몬에게도 요구하셨으나, 결국 솔로 몬은 말년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이방의 우상을 향함으로써 ‘솔로몬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다.

*‘바르게 하여’
원형은 ‘곧다’(잠11:5), ‘바르다’(잠9:15)라는 뜻을 가진 ‘야솨르’에서 유래한 명사, ‘정직함’(신9:5), ‘옮음’(욥6:25)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이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굽힘이 없이 곧게 행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기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도와 율례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변조하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의대로 그분의 말씀에 어떠한 말을 더하거나 뺑으로 그 뜻을 곡해하는 행위를 철저히 금하셨으며, 당신이 주신 말씀 그대로 행하는 자를 마음이 바른자, 즉 정직한 자로 여기셨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거나 사욕을 위한 도구로 오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 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회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 4:2).

약속은 바로 그 조건으로 이루어진 때문이다(시 132:12). 우리가 언약 중 우리쪽 몫을 이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몫을 결코 태만히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선용한다면 그는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해 주실 것이다.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은 자기들보다 앞서 천국으로 간 분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선조의 미덕과 경건을 유지하지 않는 한 축복을 상속받으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5절은 다윗 언약의 반복이자 솔로몬이 기도했던 내용에 대한 직접적 응답(8:25,26).

이같은 본문의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긍정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본절이 4절의 조건문에 이어지는 표현임을 감안할 때 조건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 닥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까지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하나님 편에서 본문과 같은 축복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림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11:4, 10-13),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솔로몬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 유다 왕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결국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함으로 다윗 왕통은 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택한 백성의 영원한 통치자 로 세우심으로 궁극적으로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시키는 자비를 베푸셨다(녹 1:31-33),

즉 약속을 받았음에도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의 운명은 솔로몬과 그 후대 왕들의 불순종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견고함과 영원성에 대한 약속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영원하신 의의 왕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삼하 7:16에 나오는 다윗 언약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삼하 7:16에 서는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부정적 전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일한 다윗 언약에 대한 언급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향한 본문의 언급에는 부정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이는 다윗에게 직접 언약이 수여된 삼하 7:16은 장차 메시야로 오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왕권과 관련된 언급인 반면, 솔로몬에게 다윗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본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왕권과 관련된 언약을 전제하되 르호보암 때의 북부 지파의 이탈로 인한 왕권 약화와 시드기야 때의 남유다 멸망으로 인한 세속적 다윗 왕권의 단절을 초래하는 바 다윗 가문의 육적 왕권과만 관련된 언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미리 불순종에 따른 다윗 왕권의 단절을 경고하신 것이다.

(2)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 그것은 솔로몬이나 그의 자손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임에 틀림 없으리라는 것(6절).

"너는 다음 사실을 알고 네 가족과 국민에게도 알려서 훈계를 얻도록 하여라. 즉 만일 너희가 나를 좇는 일에서 아주 돌이키며(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내게 대한 예배를 포기하며 내 제단을 버리고 가서 딴 신을 섬기며(이것은 바로 계약 위반의 죄였다) 너희나 너희 자손이 나와 절교하면 이 전이 너희를 구원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라."

 👉 ‘만일 …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단순히 일시적 실수로 나타나는 범죄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완전히 저버리 고 돌이켜서 그를 떠나는 적극적 배신 행위.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배신행위,즉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저버리고 그를 떠나 다른 신을 섬기며 각종 죄악을 저지르는 완전한 배교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너희 앞에 둔’ … ‘지키지 아니하고’
⇒ 여호와로부터 마음을 돌이킬 때 나타나는 소극적 현상
⇒ 명백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고의적 범죄임을 드러냄.

‘너희 앞에 둔’ = ‘내가 너의 얼굴 앞에 주었던’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이 너무나 자명하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뜻을 마치 영원히 지키지 않을 것과 같은 범죄의 고의성, 회개의 불가능성.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은 바 있으며(2:4),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6:12)과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친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거듭 확인했다. 본서 저자 역시 솔로몬이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하고 있다(1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여러 번 계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저주에 대한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솔로몬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가서’ .. ‘섬겨’ .. ‘숭배하면’
⇒ 여호와로부터 마음을 돌이킬 때 나타나는 적극적 현상

*가서: 여호와 앞에서 그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신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
*섬겨: 여호와를 배신하고 이방의 신 을 주인이나 왕으로 섭기며 충성을 다하는 것.
*숭배하면: 신적 존재에 대하여 ‘경배하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킬 경우 적극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행동을 보여주는 삼중적 표현. 그들이 다른 신에게로 가고, 섬기고,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되면 결국 거짓된 신을 섬기고 그에게 부속되어 그를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긴 하나 끊어지게 될 것이다(7절).

"그들은 한 심판을 당하면 또 다른 심판이 임하여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기까지 멸절당하며 지금은 극히 존귀한 민족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특별히 지칭하고 있지는 않으나 왕가의 몰락을 상정하고 있다. 물론 나라가 망하면 왕도 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관계의 단절 뿐 아니라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심판의 수행.

본문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하실 뿐 아니라, 이들을 당신께서 주신 땅에서 멸망시키시고 진멸시키심으로 당신의 공의로운 분노를 나타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영적으로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아내되는 이스라엘의 배반을 목도하 게 될 때, 언약과 사랑으로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도 분노와 슬픔 가운데 버리시며 이스라엘 백 성들과의 관계 또한 단절하실 것을 보여준다.

한편, 본문은 왜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인 고국을 떠나 이방 땅에 포로되었는지에 대한 본서 저자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 이는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B.C. 733-722년 사이에 2차에 걸쳐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으며(왕하 15:29; 17:5.6), 남유다는 B.C. 605-586년 사이에 3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왕하 24:1; 24:10-17; 25:1-25). 본서의 일차 독자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당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문은 그들이 지금의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이방 땅으로 포로되어 끌려간 것이 군사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즉 신앙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을 절망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회복시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다음 본문에 서 동장하는 성전 훼파에 대한 경고도 이와 같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을 통해서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지속될 때에만 가치 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던져버리시고 관계를 단 절하신 성전이라면 세속적인 건물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실제로 후일에 솔로몬의 성전은 우상 숭배와 같은 이스라엘의 가증한 범죄로 인하여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약탈되 훼파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왕하 25:8.9).

[2]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신 집이지만 버림을 당하고 황폐케 될 것이다(8, 9절).

"이 전은 높다." 그들은 성전구조의 장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성전이 높진 않다는 걸 알아야 했다. 그들이 만일 성전을 산당이나 우상의 신전과 바꿈으로써 성전을 헐뜯는다든지 그들이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성전이 하나님의 은총을 확보해 줄 것으로 믿는다면 성전은 결코 높지 않을 터였다.

"이 전은 높다.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는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놀란다. 보는 이마다 건축 비용과 시설과 건축술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성전은 거대한 건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토록 높은 성전도 무너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층 더 큰 놀라움이 될 것이다. 그 곁을 통과하는 자들은 성전이 폐허화한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 8절, 훼파된 성전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이중적으로 묘사
*놀라며: 원형은 ‘놀라다’, ‘황폐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이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한 당혹감이나 파멸이 아닌, 외부의 강한 힘으로 인한 극심한 훼손이나 멸망 혹은 경악을 의미하는 단어.
*비웃어: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당한 심판을 보고 빈정거리며 냉소적으로 웃을 것.

성전 봉헌에 즈음해 드린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본문과 같은 충격적인 경고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건물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성전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진노하여 단호히 심판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 경고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어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 파괴가 자행되었 으며, 이후 스룹바벨이나 헤롯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지만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침공으로 성전은 지상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 는 하나님 말씀의 엄정성과 함께 불순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양심 있고 자기 반성을 하며 자책하는 이스라엘이라면 자기들이 성전 멸망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전에 이 같이 행하셨는고?"(8절)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때문이다" 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신 29:24, 25 참조).

👉 9절, 본절은 이방인들이 앞단락의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하는 대목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다른 민족들도 명백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범죄와 멸망은 다른 민족들에게 즉각 큰 반향을 일으키는 흥미거리가 되어 그들이 이를 교훈과 비웃음 거리로 삼아 서로 이야기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주인으로 선택하여 섬길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전혀 없음. 본문의 내용과 유사한 신 29:2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라고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버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여호와를 버린 것이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린 것은 동일한 뜻이다.

다른 신에게 부종함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소극적 범죄라면, 본문은 적극적 범죄에 해당한다.
*부종함: 이는 현혹 되거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 선택에 따라 어느 대상에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벌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성전을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전을 버리셨다. 그들은 죄악으로써 성전을 모독하고 졸렬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심판으로써 성전을 모독하시고 황폐케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신축하여 봉헌하자 이 점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하신다. 이는 솔로몬과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경외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