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9월 24일 주일 묵상구절 대하12:1-12 <애굽이 유다를 치다(왕상 14:25-28)>

Jeehyun 2023. 9. 25. 08:24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20, 고린도후서 13, 에스겔 27, 시편 75, 76

묵상구절

12:1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12:2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12:3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12:4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12:5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12:6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12:7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12:8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12:9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12:10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의 손에 맡기매

12:11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호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경호실로 도로 가져갔더라

12: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역대하 10-12장 : 남왕국 유다의 초대 왕 르호보암(B.C. 930-913년)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10장은 솔로몬에 이어 새롭게 왕이 된 르호보암이 지혜로운 노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신복들의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여 백성들의 노역 경감 요청을 냉정하게 물리친 결과 반란이 일어나 왕국 분열이 일어난 사실을 다루었다.
11장은 비록 왕국은 분열되었으나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들여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대신 국방을 튼튼히 하며 북이스라엘에서 남하한 신앙인들을 수용하는 등의 선하고 지혜로운 정치를 하여 남왕국이 번영하였음을 보도하였다.

★12장

르호보암의 교만과 어러석음으로 애굽의 침입을 받아 남유다 왕국이 쇠퇴한 사실을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내용 가운데서도 선지자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에 대하여 르호보암 및 방백들과 백성들이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고 르호보암이 다시 왕위를 굳건하게 재건한 긍정적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본장의 내용은 르호보암을 악한 왕으로만 묘사하는 열왕기서의 내용과 상당한 차별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역대기의 차별성은 악한 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회복의 은총을 베푸시는데, 남유다의 역사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즉 본서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이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와 회복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부각시켜 본서 일차 독자들로 하여금 회개를 통한 선민 신정 국가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 저자는 이러한 저술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였다.
열왕기서 저자의 경우
왕상 13:1-34에서 북이스라엘의 가증한 우상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관 경고와 관련된 유다 선지자와 벧엘의 노선지자 및 여로보암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사건을 길게 다루었다. 그리고 왕상 14:1-20에서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의 발병 및 죽옴과 관련하여 여로보암 가문에 멸망 예언이 주어진 사건을 다루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사건들이 선민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사건이 아니며 다윗의 정통 왕조인 남유다 왕조와 관련된 사건도 아니기 때문에 과감히 생략하였다.
반면 애굽 왕 시삭의 침공과 약탈을 열왕기서 저자는 4절에 걸쳐 간략하게 다룬(왕상14:25-28) ↔ 반면 본서 저자는 11절(2-12절)에 걸쳐 길게 다루었으며, 열왕기 저자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다'라는 표현을 3회나 반복하여
⇒ ‘회개에 따른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이란 역대기서의 주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즉 본장은 이와 병행을 이루는 왕상14:21-31의 기사와 한 가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열왕기 저자는 오직 르호보암의 범죄 사실만을 기록한 데 비하여, 열왕기 기자는 본문의 사건을 단순히 순종에 따른 측복, 불순종에 따른 징계라는 신명기 사관에 입각해 기술한 반면

역대기 저자는
르호보암의 회개 사실까지 기록(대하 12:6.12), 불순종에 대해서는 징계를 내리시나, 회개할 경우에는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였다. 르호보암의 회개 및 그에 대한 여호와의 자비에 대한 기록을 통해 본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회개하는 자기 백성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분임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르호보암의 타락(역대하 12:1-12)

두 왕국으로 분열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아주 심한 수치를 당했고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성전과 왕성 곧 다윗가와 아론 집안이 있었으므로, 만약 저들이 의무의 길을 계속 행하였더라면, 번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2장에서는 유다 왕국의 만사가 그릇되어 감을 볼 수 있다.

❖ 1-4절: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의 범죄함으로 애굽 왕 시삭의 침략을 받음

Ⅰ. 르호보암과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버렸으며, "모든 이스라엘이 저를 본받았다" (1절).그가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던 그 3년간은 행복하였으나(11:17), 그 시기가 지나자 그는 하나님 예배하는 일에 태만하게 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잘못하였고, 유다 왕국도 그의 본을 받았는데, 여기서 유다를 "이스라엘" 이라 칭함은, 저희가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국에서 끌여들였던 악한 길로 행하였던 까닭에서이다. 이리하여 "그가 나라를 견고히 하고 세력을 강성하게 했을 때," 그는 범죄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왕위가 흔들거린다고 생각될 동안에는 자기의 의무를 지켰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자기의 우방을 삼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자기 나라가 상당히 견고하게 됐다고 판단하게 되자, 그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더 이상 인정하려고 생각지 않았다. 자기는 종교 없이도 너끈히 태평무사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매한 자의 번영은 스스로를 멸망시킨다. 여수룬은 살찌게 되자 차 버렸도다." 인간이 번영하게 되어 걱정 근심을 면하게 되면, 즉각 하나님더러 "우리에게서 떠나라" 고 말하고 만다.

💡 12:1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르호보암의 신앙
르호보암이 전국 도처에 견고한 요새들을 세워 왕국을 견고하게 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막강하게 하여 나라가 안정되자 교만에 빠지기 시작하였음을 밝히는 것. 남북 분열 직후만 해도 르호보암은 10지파나 되는 복이스라엘의 침공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율법을 겸손하게 지키다가 자신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을 저버린 것이다. 이같은 르호보암의 자세는 시류와 환경에 따라 믿음이 변하는 기회주의적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본받다'
번역된 단어 ‘임모'는 ‘그와 함께'라는 의미로서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반대편에 섰을 때 그의 백성들도 그와 동일한 자리에 섰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 한편, 본문은 한 나라의 통치자가 그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는 그의 백성들도 신실히 하나님을 섬겼지만, 왕이 하나님을 버리자 그의 백성들도 똑같이 하나님을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자신이 범죄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범죄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매사에 경각심을 품어야 한다.

[역대기, 열왕기 기록 비교]

역대기 기자는
르호보암과 온 이스라엘의 범죄를 단순히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라고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본서는 범죄한 사실만을 간략히 언급한 뒤, 이어지는 내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고 돌이키시는 내용에 역점을 두어 기술함으로 → 자기 백성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다룸.

반면 열왕기 기자는 “유다가…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2-24)라고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즉 열왕기에서는 당시의 죄악상을 구체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징계가 불가피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음. 

Ⅱ. 하나님께서는 저희 마음이 더 이상 완악해지기 전에 저들을 각성시켜 참회케 하고자 급속히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한다.

저희가 스스로 부패하기 시작한 때는 르호보암의 통치 제4년이었고, 애굽 왕이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저희를 치러와서 "유다의 견고한 성읍" 들을 취하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 온 것" 은 르호보암 통치 제5년이었다(2, 3, 4절). 저희가 하나님 경배하는 일을 저버리자마자, 저들이 자기들을 치리라고는 의심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던 그런 손길에 의해서(지난 왕은 애굽과 아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었으므로) 큰 재난은 너무나 급작히 들이닥쳐서, 르호보암이 근자에 요새화하여 수비대를 두고 자기 왕국의 안전에 대해 크게 의존하던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들" 도 별반 저항해 보지도 못한 채 금방 대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실은, 저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이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사건이라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 주었다.

 💡 12:2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애굽의 침공 배후에 하나님의 뜻]

르호보암(B.C. 930-913년) 통치 제 5년째 되는 해에 유다는 애굽의 침공을 받았다. 그런데 이 애굽의 침공에 대해 역대기 저자는 유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근거 없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선지자 스마야의 말씀으로부터 확인된(5절) 객관적인 것이었다.

과거 르호보암이 율법을 쫓아 행하는 3년 동안
→ 하나님은 유다를 강성하게 지켜주셨다(11:17).
그러나 그가 율법을 버린 후부터는
→ 애굽을 통하여 남유다를 정계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남유다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자기 백성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을 의도로 내려지는 것이기 때문.

[애굽]

히브리어로 ‘미츠라임'.
 국가명은 본래 ‘요새', ‘견고한 성 '을 뜻하는 단어 ‘마초로' 에서 유래한 단어.
→ ‘많은 요새들' 이란 의미.
이 이름 뜻에서 나타나듯 애굽은 제31왕조의 시작인 B.C. 약 3, 200년부터 수천년 동안 고대 근동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시삭 왕
애굽의 제22왕조의 창시자로 B.C. 945년부터 924년까지 약 21년 동안 에굽을 통치했던 왕으로서 과거 여로보암이 애굽에 망명해 있는 동안 그를 보호해 주었던 인물(왕상 11:40).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솔로몬의 통치 기간 때에는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다, 르호보암 통치 제5년에 이르러서 유다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남유다 침략이 근본적으로는,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려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본서 저자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 왕상14:25 강해,

유다의 타락과 시삭의 침공 사건 간의 인과 관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고자 한 시삭의 패권주의에서 출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삭의 야심을 들어 우상 숭배로 범죄한 르호보암과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발생한 사건. 대하 12:3에서는 이때 시삭이 동원한 막강한 군사력을 제시하고 있다.
 💡 12:3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애굽 군대의 규모
⇒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직역하면, ‘그런데 수가 없다’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과장법적 표현
→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

본절에서는 열왕기 저자가 밝히지 않은 침략군 애굽의 전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힌다. → 이는 본서 저자가 단지 사무엘서나 열왕기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료들을 검토하여 역대기서를 기록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러 온 애굽 군대의 규모가 어마 어마하였다.
당시 유다에는 병거가 없었지만, 애굽 왕 시삭이 이끌고 온 병거는 무려 일천이백승이나 되었으며, 보병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시 애굽의 제22왕조를 창건하고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던 시삭은 애굽의 정예병들 + 애굽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서 사들인 수많은 용병들을 이끌고 유다에 북진해 들어왔던 것이다. 
💡 12:4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애굽의 막강한 전력 및 동원된 외인 부대까지 소개하는 앞선 3절과 더불어 남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부수고 이제 수도 예루살렘까지 이르렀음을 보도하는 본절 역시 열왕기의 병행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
이제 남유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성읍들을 빼앗김’
여기에는 11장에서 유다 땅을 방비하기 위해 르호보암이 요세화시켰던 것으로 소개되는 15개의 성읍들(11:5-12)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 즉 르호보암이 왕국의 방비를 위해 철옹성 같이 건축해 둔 요새들도, ⇒ 하나님의 징계를 수행하는 애굽 왕 시삭의 첨락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함락되고 말았던 것.

➤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를 튼튼하게 방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허사이며(시 127:1) 하나님을 버린 자는 그가 세운 어떤 방어막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음을 교훈받게 된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까지 왔다’.
당시 역사적 자료를 보면 이때 시삭의 침략 대상에는 : 유다만이 아니라 블레셋과 북이스라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당시 시삭은 팔레스틴에서 156개의 성읍을 정복하였는데, 그 가운데 3-6개의 블레셋 성읍을 제외한 120개는 거의 대부분 남유다의 성읍이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 예루살렘을 제외한 남유다의 전지역은 어미 시삭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 5,6절 : 선지자 스마야를 통한 여호와의 책망과 백성들의 회개

Ⅲ.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맞은 이 매의 의미를 즉시 올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5절) 말씀으로써 그 뜻을 설명해 주셨다.

유다 방백들이 이 존망지추의 위급에서 자신의 안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아마 큰 군사 회의로) 예루살렘에 죄다 모였을 때, 하나님은 스마야라는 이름의 선지자를 저희에게 보내셨다. 이 선지자는 열 지파와 싸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던(11:2) 바로 그 사람이다. 스마야는 저들에게 명백히 말하기를, 시삭이 저희보다 우세한 이유는 저희가 국사의 처리에 졸렬했기 때문이 아니라(아마 이 회의에 참석한 방백들은 이 때쯤 그 원인을 규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저버렸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시기까지는 결코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 12:5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음
유다의 견고한 요새들이 애굽 왕 시삭의 군대에 함락당하자 유다의 방백들은 시삭으로 인하여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때 선지자 스마야는 바로 그 자리에 나아가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스마야’ — ‘선지자’
11:2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개되나, 본절에는 ‘선지자’로 소개됨.

‘한나비’
‘할 말이 속에서 끓어 올라 말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자' 또는 ‘선언하는 자’ 선지자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여호와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책무를 맡은 자들,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 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렘 20:9).

애굽 왕 시삭이 유다 전역을 점령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 스마야에게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내리셨고, 스마야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여 즉시 왕과 방백들에게로 달려가 그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버렸다 : ‘아자브’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러거나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을 돌보지 않고 방기하는 것(왕상12;8; 사60:15).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가?
산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워 숭배하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모든 것을 본받아 행함으로써(왕상14:23.24) 여호와를 저버렸다. 이에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애굽 왕 시삭의 손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내버리셨던 것이다.

➤ 본문의 어구는 시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역대기서 중에서 유독 역대기에만 나오는 어구(15:2;24:20;대상 28;9),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유다)을 저버리시는 영적 원리.

먼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영적 원리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어구는 포로에서 돌아온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 그들이 여호와를 또다시 저버릴 경우, 과거 그 조상들이 받은 것과 비슷한 징계를 또 다시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해주었을 것이다.

Ⅳ. 이처럼 말씀으로 견책하시고 매로 꾸짖으시자, 그 왕과 방백들은 자기들의 불의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통회하여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징벌을 인내로 감수하며 이르기를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고 하였다(6절).

즉 "우리는 자신들 외에 아무도 탓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심판하실 때는 주께서 분명히 나타나시리이다" 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의 견책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 옳다. 왕이나 방백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을 굽히고 꺾어야 하며, 또 겸비케 되는 법이다.

 💡 12:6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이 나타낸 반응에 대한 기록. ⇒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즉각적 회개]
‘이에 … 스스로 겸비했다’ ⇒ ‘와우’법.
→ 그들의 회개가 선지자 스마야의 말씀 선포에 뒤이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회개의 원리
⇒ ‘겸비하여’
원형 ‘카나으’
→ 삼상7:13에서 ‘굴복하다’ 란 의미로 번역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지금까지의 교만한 태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 그들은 자신들이 한동안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시인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여호와께 다시 돌아오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스스로 겸비하였다’ 란 표현이 3번 반복됨(6,7절)
본서 저자는 6, 7절에서 ‘스스로 겸비하였다'란 표현을 3회나 사용하여 — 당시 왕과 방백들이 철저히 회개하였음을 강조함.

이들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이러한 남유다의 회개에 뒤이어 하나님께서 시삭을 통하여 남유다를 멸하시려는 계획을 돌이키셨음을 보도 — 진실한 회개만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이 회개 가운데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는가?

➤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의와 공의를 그 보좌의 기초로 삼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시 89:14) 인간이 그를 의롭다고 말하든 불의하다고 말하든 상관없이 항상 의로우신 분이다.

그 의로우심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한 면으로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시며 축복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 면으로는 당신을 떠나 그 뜻을 거스르는 자를 정죄하시며 징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그를 떠나 교만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러한 의의 행위는 그들의 눈에 불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겸손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그것이 의로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르호보암과 유다의 방백들이 본문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 왕 시삭을 통해 자기들을 치시는 것을 —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결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와 있었음을 나타낸다.

❖ 7,8절 :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하는 르호보암 왕과 방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예언

Ⅴ. 저희가 참회를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소의 은총을 나타내시사 저희를 파멸로부터 건지셨으나, 저희가 다시금 반역하는 것을 예방하시기 위하여 심판의 무서움을 얼마간 남겨 놓으셨다.

1.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저희가 바야흐로 막 당할 뻔하였던 그 멸망을 막아 주셨다.

시삭이 거느린 상승 대군이 견고한 성읍들을 죄다 석권하였는데, 온 나라와 예루살렘까지도 이윽고 저희 소유가 되리라고 생각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교만한 파도는 멎을지니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상하게도 가장 위협적 세력조차 쇠약해지고 힘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 다시 한번 멸망시키는 천사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나, 그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말라는 금지령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의 노를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때에 이 손으로 완전히 멸하지는 말지니라" (7, 12절).

자기들에게 시련을 내릴 때에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인정하는 자들이 은혜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은 그의 총애를 입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를 베푸시려고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다. 비극적 섭리를 당하여 자신들을 겸비케 해야 하더라도, 그런 시련은 제 행할 것을 다 행한 뒤에는 사라지거나 오히려 복이 될 것이다.

💡 12:7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 ‘보신지라’
‘보다’ (원형 : ’라아’)
시선에 들어오는 것을 무심코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주목하여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함.
→ 따라서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셨음을 나타낸다.

▶︎ 이들의 진실한 회개를 아신 하나님
사람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은(렘 17:10)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을 아신다.
르호보암과 유다의 방백들이 선지자 스마야에게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궤뚫어 보심으로써 그들의 회개의 고백이 진심임을 아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받으사 완전한 패망만은 면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9.12절).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하나님은 유다를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기는 하시되,즉, 유다는 애굽의 이번 공격으로 인해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엄청난 피해를 당했으며, 애굽에 조공을 바처는 속국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8.9절).완전히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상당한 고통을 당하도록 하실 작정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그러나 그 정도의 구원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노를 … 쏟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 그 속에서 마처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이 진노가 터져나오게 된다.그분의 진노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하늘로부터의 불과 유황(창 19장), 가뭄이나 각종 역병 등의 천재지변 (출 9:1-12; 삼하 21:1; 24:15; 왕상 17:1), 본 사건에서와 같이 이방인의 침입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만약에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당신의 분노를 모두 쏟아내셨다면, 유다는 애굽 군대의 발굽에 밟혀 전멸했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의 모든 건노를 다 쏟아붓지 않으셨다.

2.하나님은 저들에게 모종의 구원을 허락하셨으나, 완전 구원이 아니라 부분적인 구원이었다. 그는 대적들에게는 불리하고 저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셨고 이에 따라 저희는 약간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떤 자는 그가 "저희에게 잠시 동안 구원을 주셨다" 고 해석한다. 저들이 개심을 하되 부분적으로 잠시하였다가 곧 또 다시 타락하였으므로, 저희의 개혁처럼 구원도 잠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2절에는 "유다에는 선한 일도 있었다" 고 했으니, 곧 나은 국면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 12:8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만약 하나님께서 유다를 완전히 구원하신다면, 그들은 절대로 애굽의 종이 되지 않는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금의 구원만을 허락하므로 인해 그들이 애굽 왕 시삭의 종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유다가 애굽 왕 시삭의 종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유다는 시삭 침공 후 얼마 동안 애굽에 조공을 바쳐야 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말씀은 유다가 여호와 를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초래할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여호와를 버렸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산 위에와 여러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워 그 것들을 섬기고, 또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슬러 남색을 하고,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가나안 거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을당시에는(왕상 14:23.24) 장차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임할 고통을 생각지 못하고 오히려 죄악의 쾌락을 즐겼다.하지만 그들은 범죄 후 죄악의 열매가 얼마나 쓰디쓴 것인지를— 이방의 압제를 통해 경험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다.

‘알게’ 되리라 (’야다으’)
‘야다으' 역시 남녀가 동침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란(창 4:1)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어떠한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길 정도로 절감하는 것을 나타낸다(호 6:6).하나님은 형통하고 평온할 때 당신을 섬기는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유다 백성들에게그 형통함과 평온함을 깨뜨려 버리심으로써,고통 가운데서 당신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1) 곧 경건이란 점에서의 호전이다.

"유다에 선한 것이 있었다" (난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 KJV). 유다에는 선한 사역자들과 선한 백성, 선한 가족이 있었으니, 이들은 자기 나라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더 선하여졌다. 큰 부패와 타락의 시절에라도 선한 일이 발견되는 남은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소 위안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2) 번영이란 점에서의 호전이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이 공략당했을 때는 유다가 만사에 그릇되었으나(4절), 저희가 회개하여 저희 자세를 일변하였을 때는 사태가 호전되었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 최대한으로 잘되진 않더라도 이전의 경험에서 예상되는 것보다는 잘 되어갈 때에는 그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간의 구원만 허락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정해야 된다.

3.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시삭의 잔악한 손에 버려두어 저들이 자유나 재산의 피해를 입도록 내버려 두셨다.

(1) 저희 자유에 있어서(8절) "저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고 했다(즉, 그들은 시삭의 마음대로 처분되며, 그에게 조공을 바쳐야 되고, 그들 중 일부가 잡혀서 포로로 잡혀 갈 것이다).

이는 "저들로 나를 섬기고 일과 열방의 왕국을 섬기는 일이 어떠한지 알게 하기 위함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가 가혹하다는 듯 불평하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린 것이다" (1절). 그것은 저희들이 그 종교가 너무나 힘든 멍에라서 자기들이 견딜 수 없노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좋다, 될 수 있는 대로 저들 스스로 더 좋은 것을 찾게 해주마. 저들이 내가 다스리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으니 그 이웃 방백들이 잠시 다스리도록 해 줄 터이다. 저희가 그 인방 방백들의 지배를 좋아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들의 심중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었건만 그렇게 하고자 아니 하였다. 그러므로 저들로 하여금 굶주림과 목마른 가운데서 그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신 28:47, 48) 저희가 그 처음 주인께로 돌아갈 생각이 나기까지 하리라. 왜 그런고 하니 그 때가 저희에게는 차라리 더 나았기 때문이다" (호 2:7). 혹자들은 이것이 바로 에스겔서 20장 24, 25절의 의미라고 풀이한다. 즉 "저희가 내 율례를 멸시하였으므로, 내가 선하지 못한 율례를 저희에게 주었노라."

다음을 기억하자.

[1] 하나님 섬기는 일과 다른 어떤 봉사와 비교해 보면 볼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도리에 맞고 편한 일로 나타날 것이다.

[2]순종의 길에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이 예상되더라도, 불순종의 징벌을 자취하는 것보다는 그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 천만번 더 낫다.

절제의 율법이 너무나 혹독하다고 생각되는가? 무절제의 결과는 더 한층 가혹할 것이다. 덕은 완전한 자유를 주며, 욕망은 완전한 굴종을 준다.


❖ 9-11절 :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와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다 가져가버림

(2) 저희의 재산에 있어서, 애굽왕은 성전과 왕궁의 국고를 약탈하였다.

솔로몬이 가득 채워 놓았던 성전과 왕궁과 국고를 약탈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취해 가져갔다." 또 그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 그가 손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져가 버렸다(9절). 이것이 시삭이 왔던 목적이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던 다윗과 솔로몬은 일면 전쟁으로, 또 다른 일면으로는 상업에 의하여 이 보물들을 충만하게 채웠으되,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어 보물들을 다 비워 버렸다. 금방패를 빼앗기고 그 대신 놋방패로 바꿔 놓았다는 설명은 왕상 14장 25절부터 28절 사이에서 이미 나온다.

 💡 12:9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 강대국 애굽의 침략으로 큰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금방패를 빼앗김

  • 앱굽 왕 시삭이 빼앗은 금방패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 였다.
  • 이 금방패들은 솔로몬 왕이 만들었던 것들로서 육백 세겔 중의 큰 금방패 200개 와 백오십 세겔에 해당하는 삼백 베가 중의 작은 금방패 300개로 모두 500개나 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대하 9:15.16의 강해 참고)
  • 육백 세겔 중의 금방패 한 개의 값이 — 최소 약 15억원,그러므로 당시 솔로몬의 금방패 500개는 시가로 모두 최소 약 4.140억원이나 되었다.
  • 삼백 배가 중의 금방패 한 개의 값이 — 약 3억 8천만원 정도로 계산된다.
  • 이는 유다가 에굽 왕 시삭에게 얼마나 큰 경제적 약탈을 당했는지 가히 짐작게 한다.
👉 왕상14:26 강해

26절, 남김없이 전부 빼앗아 감

  • 이는 당시 애굽 왕 시삭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와 더불어 유다가 얼마나 큰 위기감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다윗이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헌물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물량이었으며 (대상 29:1-9), 당시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황금기였던 솔로몬 시대 직후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소유하고 있었던 보물은 막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시삭의 침략을 받아 유다가 빼앗긴 보물은 엄청난 양이었을 것이다.
  • 본문의 표현은 시삭이 직접 성전과 왕궁으로 들어와서 약탈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대하 12:7의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을 감안할 때 르호보암이 공물을 바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12:10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의 손에 맡기매

놋방패 — 놋이 의미하는 바

  • 놋: 색깔은 금과 흡사하나 빛이 나지 않고 어둡다.
  • 그러므로 이 놋방패 ↔ 빼앗겨 버린 금방패와 대비되어,
  • 예전의 화려했던 예루살렘의 영광이 사라져버린 르호보암 통치 하의 예루살렘의 초라한 현실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과거 왕정 시대 직전 볼레 셋과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겨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라고 외치던 때(삼상4:21)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지만,
  •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근동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과거와 비교할때, 이같은 현실은 말할 수 없는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놋방패들을 시위대 장관들에게 맡겨 자신을 경호하게 함.

👉 왕상14:27 강해,

애굽 왕 시삭의 침략 때 빼앗긴 금방패와 대조되는 놋방패를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은

  • 이를 통해 남유다 왕국의 국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 시삭에게 빼앗긴 금방패(10:17)는 일면 금을 축적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솔로몬의 부정적 단면을 전달해 준다.
  •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는 명백 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던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을 반영하는 물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 서 본문의 금방패 대신 만들어진 놋방패는 전에 누리던 찬란한 영광과 번영에서 멀어져 쇠락해 가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울러 놋(청동)으로 금을 대신하였다는 것은 이같은 부정적 측면만 아니라 영광이 쇠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왕국이 지속되고 있음을 상징해 보여주고 있다. 
 💡 12:11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호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경호실로 도로 가져갔더라

‘여호와의 전
여호와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으며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성전.

경호실
왕의 근위대들이 숙박하는 거처. 이곳은 그들이 기거하는 숙박처일 뿐 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및 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들이 비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르호보암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근위대원들어 방패를 가지고 들고 갔다는 것은 그를 보호한다는 차원보다는 하나의 예전 형식을 갖춘다는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왕상14:28 강해,

28절,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가싿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다 놓았음.

본문은 이스라엘에 금으로 상징되는 영광의 시대가 물러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왕국과 왕조가 지속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정계 이후 변화된 르호보암의 행적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미래의 일과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형. 이는 르호보암이 시삭의 침공 이후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을 찾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의 전에 경배하러 갈 때마다 계속적으로 방패를 들고 시위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전에 경배하러 가는 것을 국가적 공식 행사로 삼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즉 이는 대하 12:5-7에 기록된 것처럼 스마야의 심판 예언을 들은 르호보암과 그의 방백들이 겸비함으로 회개한 이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르호보암과 그에 이어지는 남유다 왕조는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 다윗 왕조를 존속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다(11:13,32,36; 삼하 7:14,15).

❖ 12-13a절 : 유다 왕국이 혹독한 시련과 퇴보를 경헌한 후 르호보암이 다시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 노를 돌이키심으로 왕위가 보존되었음.

💡 12: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흥왕하였을 때에 스스로 교만해져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던 르호보암은,
그로 인해 애굽의 침공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자 이전의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겸손함을 보였던 것이다.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번역상 이해할 점,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을 앞선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라는 문장과 대등 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 즉 본문을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셔서 유다를 다 멸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본 것이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란 문장과 대등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한 결과 일어난 두가지 일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본문은 직역하면, ‘그리고 또한 유다에는 선한 일들도 있었다'가 된다.
➤ 이러한 원문의 의미를 살려 다시 정리하던 본절은,
르호보암이 겸비함 으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셨고 유다에 선한 일들까지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 본문에서 ‘선한 일' — ‘선한 일들'(복수).
이처럼 복수형이 사용 된 것은 유다에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생겨났음을 보여준다.이는 신앙 회복 및 국력 회복과 관계된 일들이었을 것이다.

 💡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교만과 우상 숭배, 그러고 유다 백성들의 패역으로 인해 그들을 애굽 왕 시삭을 통해 크게 징계하셨지만,그들의 참회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시 긍휼을 베푸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 안에 있는 죄악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화의 불이었지,결코 그들을 소멸시키는 멸망의 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들이 회개한 결과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않으신 것은 본서 7:14말씀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을 열납하시면서 주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글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는 —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역대기의 핵심 주제틀 함축적으로 나타 내고 있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그 가운데서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는 본서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구체적 실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