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8, 요한복음 17, 잠언 14, 빌립보서 1
묵상구절
42: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3: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43: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 제42편은 전5권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 가운데 제2권의 첫번째 시.
시편 제2권 구성과 특징
구성
제42-72편까지 총31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권이 주로 다윗의 시로만 구성된 것과 달러 제2권은 다윗의 시(51~65.68-70편) 외에도 고라 자손의 시 (42-49편)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그 외에도 아삼(50편) 과 솔로몬(72편)의 시 각각 한 편과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세 편(66.67.기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징
그리고 제1권의 시들이 주로 ‘여호와' 를 신명으로 사용하는 여호와 시편이라면, 제2권은 주로 ‘ 엘로힘'을 신명으로 사용하는 엘로힘 시편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제2권을 시작하는 본시는 본래 제43편과 하나의 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시편이 본래 하나의 시였다는 것은 형식과 주제에서 유사한 시온시라는 점, 제43편에 표제어가 따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 42:5 11의 후렴구와 43:5의 후렴구가 일치한다는 점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의 시가 둘로 나누어진 것은 시편의 최종 편집자가 편집상의 편의를 위하여 따로 분리하여 수록하였기 때문입니다.
42,43편 저작 배경
제42.43편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전이 있는 시온 곧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노래한 시온시입니다.
이러한 본시의 저작 배경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작 배경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었는데 그러한 견해는 두 시의 본래 저자가 누구나 하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42편에 보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이라는 표제가 나옵니다. 따라서 제42.43편의 저자는 우선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 중 헤만과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에서 찬양대의 우두머리로 활동한 유명한 음악가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고라 자손은 헤만이나 아삽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들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본시의 저자를 고라 자손으로 추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 언급된 고라 자손을 포로 시대 사람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볼 경우 제42, 43편은 성전 봉사자들이었던 고라 자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잠혀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시온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슬픔과 나라를 잃은 절망을 담아 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42.43편을 포로 시대의 작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두 시를 ‘남은 자들의 시편 (Rem nant psalms)'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시를 포로 시대 고라 자손들이 아닌 다윗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본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로서 그것을 고라의 자손들이 수집하여 불렀기 때문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시를 다윗의 시로 보는 것은 시에 사용된 언어와 문체가 다윗의 시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견해가 전자의 견해에 비하여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나 어느 견해도 명확한 것은 아니므로 둘 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시온시
한편 시편에는 총8편의 시온시가 나읍니다(42, 43, 87, 121, 122, 125, 126, 129편).
그런데 이들 시온시들 중 제42, 43편을 제외한 다른 시들은 대개 시온을 그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아 노래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42, 43편은 시인이 불가피하게 시온을 떠나 있는 중 대적들의 핍박과 조롱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즐겁게 섬기던 때를 갈망하여 시온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탄시적 성경이 매우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42편은 시편 전체 150편의 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직유법을 사용하여 처음을 시작한다는 특징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 인은 자신을 사슴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목마른 사슴의 애처로운 모습은 처음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잠아 맞물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42-43편 개관
두 시는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이 끝날 때마다 같은 후렴구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 제1연 42:1-5
- 시온을 떠나 원수들의 조롱을 당하는 중에 지난날 성전에서 하나님을 즐겁게 섬기던 때를 희고하며 그 때로 돌아가고픈 애절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제2연 42:6-11
- 폭포와 엄몰하는 파도와 같은 환난을 하나님을 소망하는 심령으로 꿋꿋이 극복하겠다는 신앙 결단과 다짐을 발하며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제3연 43:1-5
- 자신이 시온을 떠나 있는 중 불의한 대적들에게 압제 당하는 비통한 심정을 호소하며 속히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 자신이 시온을 떠나 있는 중 불의한 대적들에게 압제 당하는 비통한 심정을 호소하며 속히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42편 - 낙심과 절망의 호소와 낙심과 절망을 초극하는 신앙 갱신 -
(저자: 고라 자손, 분류: 시온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 (시편 42:1-5)
우리의 주된 선과 행복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은 경건의 능력이요, 종교의 생명력이자 영혼이 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모든 외적 고백과 실행도 껍데기와 시체에 불과하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한 표현들이다.
Ⅰ. 사랑의 날개를 타고 거룩한 열망 안에서 여호와와 그의 이름의 기억을 향해 위로 솟아오르며, 갈급해하는 거룩한 사랑(1,2절).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오며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 영혼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 이상의 그 아무 것도 아니요, 주에게서 더욱 더 많은 것을 구하나이다."
1. 다윗이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사무친 열망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은 어느 때였던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때였다.
(1) 그가 하나님께 시중을 들 수 있는 외면적 기회로부터 차단을 당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집뜰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요단 저편 땅으로 추방당하였을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비의 결핍에 의해 우리가 그 자비의 가치를 알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가르쳐 주시며, 우리에게 대한 은혜의 방편을 중단하심으로써 그 방편에 대한 우리의 식욕을 더욱강하게 자극하신다. 우리에게 만나가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것에 물리기 쉽지만, 만일 그 만나의 기근을 알게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2) 그가 하나님 안에서 얻고자 하였던 대부분의 내적 위로를 박탈당하였을 때였다. 그는 그 때에 슬퍼하며 갔지만 계속 갈망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 인에 역사 하셔서 그를 향한 진지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불러 일으키신다면, 우리가 이따금씩 하나님 안에서 얻는 황홀한 즐거움들이 부족한 때에라도 이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비탄은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쁨에 못지 않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에 대한 확실한 증좌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아프도록 뒤흔들었던 그의 의심과 불안과 비탄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의 주요 복으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그에게 소망을 두었으며 하나님에 의해서 살거나 죽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우선 이와 같이 닻을 내림으로써 푹풍을 이겨내는 것이다.
2. 그가 열망하는 대상은 무엇이며 그가 이처럼 갈급해 한 것은 무엇인가?
(1)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 하며, 종교적 의식 그 자체를 갈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식의 대상인 하나님을 갈구한다.
은혜로운 영혼은 만약 그곳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궁정에서도 거의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만약 알기만 한다면 그의 은총의 표상과 그의 영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 그리고 그의 영광의 보증을 더욱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텐데!"
(2) 그는 여기에서 생존해 계시는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그의 눈을 돌리는데, 그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진 분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시고 자기 소유가 되는 자들에게는 모든 행복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그는 인간의 수제품인 우상에 대적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용할수록 닳아 마멸되어 버리는 이 세상의 모든 빈사의 위안물에 대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산 영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저희의 안식을 결코 취할 수 없을 것이다.
💡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 1절의 ‘갈급’ → ‘갈망, ‘주를’ →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 → 시인의 갈급한 심정을 더 확실히 나타낸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 여기서 사용된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시인이 지금 처한 헌실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그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었다.
- 이어지는 3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제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라고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는 것이 그가 처한 현실이었다.
- 아울러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소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는 원수들의 비웃음과 조롱이 허탄한 것임을 밝히며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 과거와 같이 자신이 간절히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갈망했던 것이다.
- 여기서 ‘생존하시는’으로 번역된 ‘하이'는 하나님의 현재성과 실존성을 나타내는 말로 성경에 많이 사용된 표현이다.
-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이같이 부르는 데에는 하나님은 생명력 없는 인간이 만든 우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 하나님은
-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신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서서 역사하시는 분이며
-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어려움과 고난을 이해하시고 위로하시며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임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 한편 혹자는 본절의 ‘생존하시는 하나님’ 이란 표현을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까지 지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즉 생존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 1 절과 연결하여 사슴이 찾는 시냇물이 사슴을 생존케 하는 것처럼 바로 시인으로 하여금 생존케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까지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 사실 하나님은 당신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자들에게 더 풍성하고도 층만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다(요 10:9).
마치 시냇물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사시사철 푸르게 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와 가정을 살리신다. - 그런 의미에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은
- 일차적으로는 죽은 우상과 구별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 한걸음 더 나아가 갈급한 심정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자에게 풍성한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분임을 암시하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뵈옵기"를 갈망하고 있다.
즉 그 자신의 성실성을 자각하고 있는 자로서 자기가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갈망한다. 주인 앞에 나타나는 종과 같이 하나님께 시중을 들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명령을 받고 싶어하고, 우리의 판단이 유래하는 장본인이신 그에게 진술을 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사특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만큼 고결한 자에게는 많은 염원이 된다. 시편 기자는 그가 희생을 걸며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알현하러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는 아무도 나아오지 못한다"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아오기를 갈망하여 그러한 의무를 기꺼이 감수하려고 한다.
💡 2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은
-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가서 예배드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 아울러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의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조차 없는 비참한 상황을 탄식한 것이다.
-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없는 헌실,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가 단절된 것만 같은 현실, 다시 말해 마치 하나님이 자기와 상관없는 분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탄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 앞에 시인은 깊은 탄식을 느끼며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금 친히 뢰올 날, 곧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에(’마타이’) 나아가서 (미완료형)
- 미완료형 : 계속적 의미
→ 하나님과 더볼어 지속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 - ‘어느 때에’ , ‘하나님’
- 현재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의미.
-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것은 물론 고통스런 현실적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다시금 회복게 하시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신명인 ‘엘로힘' 이 사용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이 열망의 정도는 어떠한가?
그의 갈망은 매우 간곡하다. 헐떡이는 것은 그의 영혼이며 목이 말라 갈급해하는 것도 그의 영혼인데, 이는 그의 열망의 진지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강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베들레헴의 우물물에 대한 그의 동경도 이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는 이것을 더워서 목마른 "사슴" 특히 쫓기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은혜스러운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충심으로 원한다. 이처럼 그 교제가 결여되고, 그 교제가 빠져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기회가 도래하는 때에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향유하기까지는 계속 갈급해 하는 것이다.
💡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같급해하는 것에 빗댄 본절은 시편의 어느 구절보다 친숙한 내용이지만 본시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다. 이러한 본절이 무수한 시편의 표현들 가운데 성도들의 뇌러에 매우 친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본절의 표현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낼 만큼 적실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본절에 사용된 ‘사슴', ‘시냇물’, ‘갈급함’, ‘내 영혼' 등의 표현은 본시를 기록하는 시인이 처한 입장과 처지, 그의 심경, 그리고 본시 전체의 주제를 분명하게 형상화시켜 준다. 먼저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의 모습, 영혼의 갈급함을 토로하는 시인의 호소는 그가 지금 절박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시인의 상황은 비유적으로 사용된 ‘갈급함'이란 표현을 통해서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슴의 ‘갈급함’(타아르그)
‘아라그’ 의 능동 미완료형: ‘고대하다, 부르짖다, 헐떡이다’
- 한글 개역 성경의 ‘갈급함'이란 단순한 표현과 달리 원문의 표현은 목마름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부르짖고 헐떡이는 모습을 시각화하여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사슴’에 비유
-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사슴'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다. 본래 사슴은 열이 많은 동물이기에 물을 자주 먹음으로써 열을 식힌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물을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얻지 못한 사슴의 모습에 연결시키고 있다. - 팔레스틴의 경우 일년 강수량이 600mm정도이며 그나마 그 비는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리므로 건기에는 극심한 기같이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고통스런 일이었으며 쉽게 갈증을 느끼는 사슴에게는 더더욱 고통스런 일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사슴은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헤 본능적으로 물을 찾아 헤매게 된다. -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맹수들은 사슴이 물가에 올 때까지 몸을 슴기고 기다리며 사냥할 기회를 엿보기도 한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있음을 몸이 타는 듯한 갈증으로 물을 찾는 사슴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즉 그는 사슴이 물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자신 역시도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없음을 매우 적절한 비유를 사용해 생생히 나타내고 있다.
‘시냇물’
- 원형: 수로, 강바닥, 골짜기, 해협
- 이는 일반적으로 여름의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일년 내내 흘러내리는 풍성한 물을 가진 곳을 지칭한다.
- 본문에서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통해서 갈증을 해소하듯이 -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만이 자신이 모든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렘 17:13).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본절 하반절 문두에 ‘그렇게’(KJV, so)로 번역될 수 있는 부사 ‘켄’이 나온다.
→ 이를 반영하여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렇게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같급하나이다'가 된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갈급함을 강조한다.
‘내 영혼이’
- 인간의 내면, 인간 자체. - 그의 생명과 삶, 전인격을 함축.
- 즉 시인은 자신의 생명과 삶,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당장 물러나시고 그가 엄숙한 의식의 은전을 맛보지 못하게 됨을 슬퍼하는 거룩한 사랑(3절).
💡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떠나 있도록 이렇게 강요당하는 동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의 신세는 슬픔에 찬 것이었으되 그는 그것에 순응하였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는 슬픔의 표시로 답하였다. 제왕이자 선지자였던 그였지만 하나님 전의 위로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오열을 삼키는 선지자가 되었다. 그의 눈물이 그의 음식과 뒤섞였다. 아니 그의 눈물은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눈물로 배를 불리며 눈물의 향연을 벌였으니 그것은 그럴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유(類)의 슬픔으로 자기 마음이 그토록 감동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만족이 되었다. 그는 성소를 이별함에 있어 눈물을 한 두 방울 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성전에 작별을 고하는 마당에 있어 고별의 기도를 체읍하며 드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즐거움의 장소로부터의 부재를 이와 같이 계속 강요당하고 있는 한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야로 울기만 하였다.
공중 예배 의식의 은혜를 박탈당한 자들은 항상 그 예배 의식을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그 의식들이 자기들에게 다시 복구되어질 때까지 그들의 결핍을 늘 슬퍼해야만 한다.
💡 3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본문은 시인어 답담한 현실로 인하여 느꺼는 깊은 탄식을 시적으로 표헌한 것으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표현어 언급되어져 나온다(80;5; 102:9).
그리고 고대 우가릿 문헌에도 "포도주를 마시듯이 눈물을 들이키면서 목놓아 우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sated herself with weeping, drank tears like wine)" 란 문구가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감정이 격해져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던 시적 과장법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눈물은 순간적으로 흘러내리는 일시적인 눈물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홀러나오는 그치지 않는 지속적인 통곡의 눈물을 의미한다.
앞서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자신이 같한 심정으로 주를 찾고 있다고 묘사한 바 있는데, 실제 그의 목을 축인 것은 시원한 생수도 하나님도 아닌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눈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근본적으로 비탄에 젖은 자신의 고통스런 처지와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하심을 고대하는 자신의 갈망이 얼마나 깊고 처절한 것인지를 선명하게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었다.
다음의 두 가지 일이 그의 비탄을 심화시켰다.
1. 그의 원수들이 그를 놀려대는 데에 수단으로 삼은 비난,
"사람들이 종인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도다."
(1)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법궤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방 우상 신들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판단하여, 그가 자기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성서와 목사와 엄숙한 집회를 강탈하는 것이 곧 우리 하나님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비록 하나님은 성경과 목회자들과 성회에 우리를 묶어 두시기는 하시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것들에게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지 모르는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며 그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곳에는 하늘로 향해 열려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2)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구출해 내시기 위해 즉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성도들이 그들의 다른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저들의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한 이런 야비한 오명을 뒤집어 씌움으로써 그들은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가하였고 게다가 그것은 저들이 노리는 바였다.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갖는 그들의 희망과 신뢰를 뒤흔드는 일보다 더 비탄스러운 것은 없는 것이다.
💡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이 표현은
-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없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 아울러 이는 ‘하나님이 ‘무능하다' 혹은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바로 ‘너를 버렸다'**라는 의미로도 풀이가 가능하다.
이같은 사람들의 비방은 시인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 게신 하나님 (2절)을 믿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처한 비참한 현실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조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자체를 업신여기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조롱한 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는 불경한 자들 내지는 하나님 아닌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자들어 전능하시며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는 동시에 시인 그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는 질문이기도 하다.
즉 이처럼 고통스럽고 답답한 현실, 악인들, 불경한 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업신여기는 현실 속에서도 잠잠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시인 스스로 ‘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라고 되묻는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그는 마처 목마른 사슴, 기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사슴이 시넷물을 찾기에 같급함처럼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자신의 담담한 형편을 묘사하였는데 (1 절), 본절에서 다시금 원수들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자신의 답답한 형편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2. 그의 이전 자유와 향유물 에대한 기억(4절).
"아들아, 네 좋은 일들을 기억하라!" 고 함은 나쁜 일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며, 우리의 회상력과 기대감은 현재 우리가 처한 불평 불만에 더 한층은 슬픔을 가중시킨다.
다윗은 옛날을 기억하였고 그러자 "그의 마음이 상하였다." 그는 녹아 없어졌고 생각은 그의 가슴을 거의 부수어 버렸다. 그는 그의 내부에서 슬픔으로 그의 영혼을 쏟았으며 그러고 나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그의 영혼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심령을 이토록 아프게 녹여 버린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제 막 그가 자기 집이나 궁정으로부터 추방된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은 그 궁정에서 받던 즐거움이나 자기 자신의 집에서 누리던 향응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가 이전에 하나님의 전에 나갈 수 있었던 자유로운 접근과 그곳에서 신성한 제의에 참예하며 누리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었다.
(1) 비록 그 당대에는 천막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집으로 갔다." 더구나 만약 이 시편 42편이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가 사울에게 핍박당하던 때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법궤는 당시에 개인의 사가에 있었을 것이다(삼하 6:3).
그러나 그 장소의 지저분함이나 미천함이나 불편함도 신적 임재의 신성한 상징에 대한 그의 존중심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다윗은 조정의 신하였고 제후였으며 존귀한 자였고 사업가였지만, 사울과 사울의 주요 신하들은 그것을 찾지 아니하던 그 시대에도(대상 13:3). 그는 하나님의 집에 참배하는 일과 공공의 예배 의식에 참가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타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윗과 그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였다.
(2) 그는 "무리와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께 시중드는 일로 궁중의 선두에 나서는 일이 자신의 위신에 손상을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무리와 함께 동행했다는 것은 그에게 더욱 기쁨을 보태었던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지금은 그 기쁨을 상실하게 됨을 크게 비통해한다는 것으로 이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다다익선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하늘 나라와 같아지며 성도와의 교제에 의한 우리 위로에 현저한 도움이 된다.
(3) 그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갔으니, 그의 심중의 기쁨과 찬송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자기 기쁨을 선포하며 자기 하나님께 대한 높은 찬미를 발하였던 것이다.
공공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즐거움과 감사함으로써 수행해야 하며,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에 대해 우리 스스로는 위로를 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이유를 가진다.
(4) 그는 성일(聖日)을 지키러 갔으며, 이 거룩한 날을 헛되이 환락과 기분 전환을 위해 지킨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행하였다. 엄숙한 날은 엄숙한 집회 안에서 가장 안락하게 보내지는 것이다.
💡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이 일을 기억하고’
- 자신의 뇌리에 새겨져 있을 만큼 생생한 과거의 기억을 나타낸다. 특히 본절에서는 미완료 연장형으로 사용되어 이러한 일을 문득 일시적으로 기억 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는 그러고 지속적으로 기억했음을 나타내준다.
- 그가 기억한 내용들은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던 일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에 성소를 순례하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성일을 지키는’
- ‘축제에 참석하다'라는 뜻이다.이때 드려지는 예배는 풍성한 음식과 모든 악기를 동원한 찬양이 있는 축제였다(C.S. Lewis).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즐거워하였다. 시인은 이러한 절기에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참석했을 뿐 아니라 보다 주도적으로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였다.
→ 따라서 ‘성일을 지키다'라는 표현은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명하여 지키도록 하신 절기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전에 다른 사람들을 이골어 성회로 인도하던 그가 지금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자신조차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지 못하는 형편에 처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실의 비참한 형편의 대조는 시인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음에 틀림없다. 이로 인하여 시인은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토로한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 앞선 ‘기쁨과 찬송의 소러'라는 표현은 - 그의 영혼과 생명이 풍족함으로 넘쳐흐르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반면
↔ 본문의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라는 표현은 - 그의 영혼과 생명어 점점 소멸하여 곤고함에 빠져드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 - 이러한 시인의 마음의 상태는 결국 하나님과의 거리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즉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는
-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생명, 축복의 풍성함으로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찬송이 터져나온 반면,
-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없는 지금은
- 그 심령의 고통으로 인하여 탄식과 절망의 소리가 터져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 심령의 고통으로 인하여 탄식과 절망의 소리가 터져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즉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는
Ⅲ. 소망을 가진 거룩한 사랑(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그의 슬픔은 아주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나, 슬픔도 그 온당한 한도를 초과해서는 아니 되었으며 그의 의기를 저상시킬 만큼 득세하여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구제를 위하여 그 자신의 영혼과 의논한다. "자! 오라, 내 영혼아! 나는 고통 중에 있는 네게 할 말이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라.
💡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망하며’
- 절망으로 인해 크게 소러조차 내지 못하고 속으로 소리를 삼키면서 땅에 엎어져 있는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네가 어찌하여’
-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엎어져 있는 연약한 자신의 영혼에게 독백으로 말한다. 이 독백은
-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아와야 한다는 자기 격려임과 동시에
- 잘못 서 있는 곳, 있어서는 안될 곳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는 책망으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1. 그 원인.
"무거운 짐 아래에서 허리가 구부려지고 주저앉으려는 자처럼 너는 낙심해 있다(잠 12:25). 너는 혼란고 무질서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다. 너는 현재 왜 그런가?" 이 말은 심문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이 불안의 이유를 충분히 알아 보고 그것이 정당한 사유가 되는지 안 되는지 살펴 보아라." 우리의 불안은 대다수의 경우에 그 불안의 근거와 원인에 대한 정밀한 조사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내가 어찌하여 낙담하는고?" 거기에는 이유가, 실질적인 이유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사유가 있는데도 야단법석을 부리지 안 부리지 않는가? 또 우리에게는 용기를 얻을 만한 이유는 없는가?" 아니면 이 말은 충고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심령과 많이 교제하는 자들은 본문의 다윗과 같이 자신을 질책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될 것이다. "왜 나는 우울하고 풀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 왜 나는 타인들을 낙심케 하며 내 자신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입히는가? 나는 이런 소요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는가?"
2. 그 치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함은 만연하는 영혼의 낙담과 불안에 대해 신묘한 치료 약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의기저상을 꾸짖을 때는 우리 스스로를 재촉하여 하나님께 희망을 두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혼이 그 스스로를 포옹하고 있을 때는 침몰하고 만다.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다면 우리 영혼은 머리를 수면 위에 내놓고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라."
💡 5절,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 그는 현재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굴을 가리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고 스스로의 영혼을 향해 하나님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 즉 시인은 낙망과 불안 속에서 고개 숙인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머리를 들고 기다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리하면 그는 우리로부터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오히려 그를 찬송하리로다. 나는 내 사정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여 찬양의 재료가 모자라지 않을 것이며, 내 심령의 큰 변화를 경험하여 찬송의 마음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호를 칭송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최대 명예와 행복이므로 모든 선량한 사람의 최대 염원과 희망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천국 복락의 면류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것과 현세의 괴로움도 우리의 끝없는 할렐루야를 막거나 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현재 비애를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의지가 되겠는가?
💡 5절,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시인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신을 도우심으로 다시금(오히려) 찬송케 될 것이므로 하나님을 바라라고 그 영혼을 각성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본문에는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확신하는 시인의 선취적 신앙이 잘 나타나고 있다. 비록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과는 너무나 먼 것 같은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자신에게 비추심으로 자신이 다시금(오히려) 하나님을 찬송케 될 것이란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 본문에서 ‘오드'가 사용된 것은
- 미래에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되 반복해서 찬양하며,
-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찬양하겠다는 시인 자신의 의지를 밝히기 위해서어다.
- 또한 이는 주님의 구원의 승리 뒤에 불려질 찬양을 선취적 신앙을 가지고 미리 부르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잠시 낙심과 회의, 고통과 불안에 두려워 떨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완전한 절망의 자리에 스스로를 방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선취적 신앙을 가지고
- 자신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승리를 믿으며
- 상황을 넘어서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고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우리는 그에게서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의 은총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는 지지와 그의 은총 안에서 갖는 만족으로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소중히 여기고 선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은 최악의 시기에도 그 얼굴의 광채에서 적당하고도 적시의 충분한 도움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이 자기들에게 항상 찬송할 수 있는 소재를 공급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다윗의 신앙적인 기대는 그를 주저앉지 않도록 해 주었고, 더 나아가서 그의 허리가 휘이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의 수금은 사울의 우울증을 완화시켜 주는 치료책이었으나 그의 소망은 그 자신에게 대한 효과적 치료법이었던 것이다.
●불평과 위로 (시편 42:6-11)
여기서는 불평과 위로가 자연의 운행에서 낮과 밤이 바뀌듯, 전과 같이 교대로 나온다.
Ⅰ. 그는 자기 심령의 낙심을 한탄하나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위로를 얻고 있다(6절).
1. 그의 환난 중에서 그의 영혼은 낙망하였고 그는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여쭙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속에서 낙망하나이다."
어떤 이유로 고통을 당하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자유와 그 앞에서 발언할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낙심한 이유를 그에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 다윗은 그 자신의 비통함에 대해 자기 자신과 의견을 나누었으나 여태까지 고통의 제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의 앞에 고통을 공개하고 있다.
우리 자신과 변론함으로써 괴로운 짐을 진 심령에 대해 위안을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우리의 사정을 그에게 맡김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로 시도해야 된다. 우리는 이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할 수 없지만 누가 조용케 할 수 있는지는 아는 것이다.
2. 그의 헌신적 신앙 안에서 그의 영혼은 앙양되었다.
그는 그병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일을 신묘한 치료책으로서 의지하였다. "내 영혼이 빠지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의 침몰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상고하겠사오며 당신을 의뢰하고 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 보겠나이다."
우리의 불행에 대한 생각을 잊는 길은 자비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였던 일"은(77:3) 이례적인 경우였다. 반면에 그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았으므로 이제 그는 그 방편으로서 그 일에 의지하였다. 그는 당시에 가나안 땅의 가장 변경으로 쫓겨가서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였으니-때로는 "요단 땅"으로 쫓겼다가 그곳에서 발각되면 "헤르몬" 지경으로나 "미살"이라고 불리우는 "산" 혹은 작은 산으로 쫓겨갔던 것이다.
(1)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의 종교도 그와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이다. 이 모든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였고 자기 마음을 쳐들어 그에게로 향하였으며 그와의 은밀한 교제를 지속하였다. Undique ad coelos tantundem est viae-즉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는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은 추방된 자나 방랑객이나 여행자들의 위로이며 낯선 땅에서 나그네 된 자들의 위안이 되었다.
(2) 그가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그는 하나님의 집 뜰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단 땅에서나 산꼭대기로부터 그는 지성소가 있는 곳을 향해 멀리 바라다보곤 하였으며 동경의 시선을 던지면서 자기가 그곳에 있었으며 하고 소원하곤 하였다. 거리와 공간도 그의 마음이 그토록 쏠려 있으며 그처럼 지척 간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하지는 못하였다.
💡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는 시인의 굳은 의지.
‘내 하나님이여.. 주를 기억하나이다’
-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자기 속에서 낙망이 되는 암울한 처지에 빠졌으므로 자신이 주를 기억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 이러한 표현 가운데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낙망할 수밖에 없는 헌재 상황을 타개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함측되어 있다. 앞서 시 인온 이미 과거에 자신이 경험한 특별한 은혜를 기억한 바 있다(4절).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왜냐하면 현재 그는 그러한 은혜틀 누리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본절에서는 동일한 기억을 자신의 영혼의 낙망에 대한 치료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만 본절의 기억은 앞선 4절의 기억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 4절은 시인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기쁨을 기억하는 데 있었다면
- 본절은 그러한 선한 은혜를 베푸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즉 본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을 주신 “분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인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 과거에 은혜를 베푸시며 능력으로 그를 붙드셨던 주님이 -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게 하실 것이며 더 나은 내일의 소망을 주실 것이란 의미가 함측되어 있다.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 본절에 거명된 지명들 : 약속의 땅과 거기 속한 크고 작은 모든 산을 지칭하는 표현.
-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그가 파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던 축복의 땅을 상징.
-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Ⅱ. 그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상을 불평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그의 은총이 돌아오리란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1. 그는 그의 곤난이 하나님의 노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그를 낙심케 하였다(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마치 빨리 서둘러 쫓아 오라고 부르듯 한 고난이 다른 고난의 꼬리를 물고 찾아 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소용돌이가 신호를 보내며 전쟁의 경보를 울리나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염려하는 그 마음의 공포와 불안을 의미할 수 있다. 한 가지의 두려운 생각은 또 다른 무서운 생각은 불러냈으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두려운 생각은 또 다른 두려운 생각에 대한 길을 터 주었다. 그는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던 옛 세상의 홍수처럼 슬픔의 홍수에 압도되며 잠기게 되었다.
- 혹은 이것이 바다를 건너가다 대폭풍을 만나 성난 파도에 요동하는 배를 암시할 수도 있다(107:25 이하). 어느 때 어떤 고난의 파도와 물결이 우리를 덮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파도와 물결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강력한 손 아래서 겸손하면 우리가 비록 위협을 받더라도 결코 파멸당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파도와 물결도 하나님의 조종 하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계신 여호와께서는 이들 많은 물결의 소음보다 더 강하시다."
선량한 사람들은 설사 자기들이 여러 가지의 많은 시험으로 번민케 되더라도, 또 자기들 위에 시험이 빗발치듯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행하시는 바를 알고 계시며 그들도 멀지 않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래의 뱃속에 든 요나도 다윗의 이 말을 사용하였는데(욘 2:3, 그말은 원문으로서는 꼭 같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란 말씀은 문자 그대로 그에게 부합하였다. 이처럼 시편은 모든 사람의 경우에 통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다.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본문은 이해가 난해하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의 폭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가장 바람직한 추론은,
- 시인이 요단강의 폭포처럼 굉음을 내며 흐르는 빠른 물살을 바라보며 이 소리 가운데 자신을 꾸짖는 주의 음성을 연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 직역하면 ‘깊음이 깊음을 부르며’
→ 깊음이 깊음을 부른다는 것은 두 개의 깊은 바다가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 - 고대 근동 사람에게 있어서 ‘바다’'
- ‘고난'을 상징하였으므로 이것은 고통이 연속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 이는 곧 한 고통이 지나가면 다른 고통이 뒤를 이음으로 고통이 끊이지 않는 시인의 절망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하여 밀려드는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강조적 뉘앙스를 전달.
2. 그는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올 것을 기대하였다(8절).
💡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 앞선 7절에서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주께 아뢰었던 시인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이에 대한 자신의 신앙적인 반응을 소개한다.
- 이는 비록 자신을 징계하는 엄위로운 손이라 해도 그 손에만 구원이 있옴을 확신하는 시인의 신실한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Weiser).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리이다."
사정은 악화되어 있으나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Non si male nuncet olim sic erit-즉 현재 사정은 비록 나쁜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늘 그렇지마는 않을 것이다. 폭풍후에는 고요함이 올 것이며 이에 대한 전망은 깊음이 깊음을 부를 때에도 그를 지탱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즐겨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자기가 찾는 모든 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며, 생명보다 더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잠시 노여움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우셨던"(사 54:7, 8) 자들을 인자함으로써 다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주시는 것이 본문에서는 "베푸신다"라고 표현되는데, 이는 그의 은총이 무료임을 시사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자처할 수는 없으나 그 은혜는 주권에 의해 부여되며 그는 왕처럼 주시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그것의 효력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의 인자하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신다. 즉 말씀하신 즉 이루어진다. 그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복을 베푸시며(44:4), "복을 명하신다"(133:3). 그는 자기의 인자하심을 명하심으로써 파도와 물결을 가라 앉도록 명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낮시간에 행하실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혼 속에서 언제든지 낮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즉 긴밤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2)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인자함을 명하신다면 그는 최선의 애정과 신앙으로 이를 맞으며 환영할 것이다.
💡 여기에는 ‘낮’과 ‘밤’이란 시간을 나타내는 대조적인 표현이 나온다.
- 낮 =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구원과 번영이 임한 때.
- 밤 = 고난 가운데 있는 때.
- 과거에 대한 회상.
-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인자로 자신이 구원과 번영을 향유하였음을 생각하며 지금 고난의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의미가 된다.
- 미래의 희구
- 그렇다면 여기서 낮과 밤은 상정적 의미라기보다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낮에 향유하므로 밤에는 이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 미래의 확신
- 미래에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셔서 구원과 번영을 주실 것이 확실하므로 지금 고난의 때에도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머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본절에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두 단어 (인자함, 찬송) 를 통해 시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 시인은 지금은 캄캄한 밤과 같은 현실이지만,
조금 있으면 주님의 구원의 빛이 새벽녘의 어둠을 깨고 자신에게 비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다.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으리이다." 우리는 낮에 우리가 받은 자비를 밤에 감사로 돌려드리지 않으면 다른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을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밤중에 일어나 감사하리이다"(119:62).우리가 세상의 분주한 일로부터 물러나 조용하고도 고독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고통의 밤에 그를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명하시는 날이 새기 전에 나는 그것을 예기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비록 환난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으며 소망 중에서 노래하고 희망 중에서 찬송할 수가 있다(롬 5:2, 3).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것"(욥 35:10)은 곧 하나님의 특권인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면서 그를 구할 것이다.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자비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기대는 그에 대한 우리 기도를 폐하는 게 아니라 촉진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모든 위로를 지으시고 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께로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기도로 간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을 우리 생명의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우리 기도에는 생명이 부여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청하기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이미 우리 생명과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Ⅲ. 그는 자기 원수들의 무례함을 불평하지만 자기 친구이신 하나님에게서 자위를 얻는다(9-11절).
1. 그의 불평은 자기 원수들이 자기를 억압하며 비난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크나 큰 인상을 준 것이다.
💡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 본절온 앞선 8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돌릴 것을 다짐하였던 시인이 - 다시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을때 터져나온 탄식의 내용이다.
(1) 저들은 그가 날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울며 다닐 정도로 그를 압제하였다(9절).
그는 비록 어떤 자도 당하지 않았던 학대를 받았지만, 점잖지 못하게 격정을 폭발하지는 않고 조용히 울어 자기 슬픔을 달랬으며 울면서 다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점을 가지고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진정으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복리를 찾는 자에게 마치 그가 조국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핍박을 하고 가혹하게 대우한다면 그가 비통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셨으며 자기를 물리치신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되었으며, 자기를 유린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기가 유린의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시는 잘못을 저지르셨다는 듯이 그에게 간해서도 아니 되었다.
"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잊으셨나이까?"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를 할 수는 있지만 이와 같이 그를 원망하도록 허용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 9절,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 시인의 첫째 탄식 : 자신이 호소하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
-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 이에는 축복의 자리에서 쫓겨나 저주의 자리에 놓여 있는 자신의 현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전혀 기억지 않아주시는 듯한 현실에 대한 깊은 탄식이 배어 있다.
- 둘째 탄식 : 원수들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관련된 것.
- ‘슬프게’ : 원형 ‘카다르’ - ‘재를 뒤집어쓰다’, ‘어두운 색깔이 되다’, ‘애도하다’
- 본문에서 이 단어는 단지 슬픈 마옴의 상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형적인 누추함까지 함께 나타내는 단어이다.
대개 극심한 슬픔으로 인하여 애곡하는 사람은 거칠고 몸을 괴롭게 하는 베옷을 입든지, 의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에 재를 뿌리는 것이 당시 근동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본문의 표현 역시도 이러한 시인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 즉 시인은 원수들의 압제로 인해 자신이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너무나 예리하게 비난하여서 그것은 "그의 뼈를 찌르는 칼"이 되었다(10절).
그는 이전에도 그의 골수에까지 미치는 저희 비방이 무엇인지 언급하였었는데, 이것을 여기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도다." 이러한 비난은 양면으로 그에게 매우 비통한 것이었다. 즉 그런 비방은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동시에 하나님께 두는 그의 희망을 산산조각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라도 자기 소망을 유지해나갈 만한 충분한 저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그 비방은 유감스럽게도 저절로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그리스도의 고난
본절에 나오는 고통에 대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통과 연결시켜 생각 할 수 있다.
본절에서 시인은 상징적인 표헌으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제
- 손과 발에 못이 통과했고 허리에는 창이 깊숙이 박허는 등 데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체휼하셨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자리에 모인 무리들과 군인들, 심지어는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로부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비난을 들으셔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본시는 메시야 예언시로서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고 할 수 었다.
2. 그의 위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반석이시라는 것이다(9절).
즉 그위에 건축할 수 있는 반석이고 그 안에 피할 수 있는 반석이시다. 그 안에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있는 만세 반석이 그의 반석이 되시며, 그것은 행하는 일이나 견디는 일에 있어서 그의 속 사람에 대한 힘이 되어 주실 것이었다. 그런 분에게 그는 신뢰로써 나아갔던 것이다.
자기 반석이신 하나님께 그는 말해야 할 바를 말 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은혜로이 들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러므로 그는 전에 말했던 것을(5절) 되풀이하며 그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그의 비탄과 두려움은 요란하였고 성가스러웠다. 그것들은 몇 번이고 대답해 주었는데도 잠잠치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여기에서 그의 믿음은 정복자로 등장하여 원수들을 강제로 전쟁터에서 퇴장시켜 버렸다. 그는 이 승리를 다음과 같은 일에 의해 얻고 있다.
(1) 그가 전에 말했던 것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는 전과 같이 자기의 사기 저하와 불안에 대해 자신을 질책하고, 여호와의 성호를 신뢰하여 자기 하나님께만 머물도록 스스로를 격려했다.
우리의 선한 생각을 몇 번이고 상기해 보는 일은 매우 유용하며, 설사 처음에는 우리가 그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마음이 말씀과 함께 다니는 곳에서는 반복해서 하는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일이라도 몇 번이고 우리 마음에 아로새길 필요가 있으니, 이것은 아무리 많이 강요한다고 해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2) 거기에 단 한 마디를 추가함으로써, 그는 그의 얼굴에 있는 구원을 위하여 "거기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바랐다.
그는 "현재 덮고 있는 구름으로부터 내 얼굴을 건져내심을 인하여 나는 여기서 그를 찬송하겠다. 만일 하나님이 내게 미소를 보내신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즐거운 모습을 나타내보이도록 하실 것이며 즐거이 쳐다보고 즐겁게 앞을 내다보며 주위를 돌아보게 하실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이 그는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은 나와 계약을 맺고, 그의 전 존재와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약속의 진정한 의도와 의미에 따라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들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모든 비애와 공포심에 대해 개가를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성도들과 함께하시며 저희 하나님이 되심은 "모든 눈물을 저희 눈에서 씻기시는"것이 될 것이다(계 21:3, 4)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시는 암울한 처지에 빠져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우심을 소망하고 상기하며 다시 믿음을 굳게 다지는 시인의 고백을 담고 있다. 고통이 계속적으로 엄몰하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뼈틀 산산조각 내는 것 같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주는 대적들의 비방에 직면해서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더욱 간절히 주를 찾았다.
이처럼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은 상황, 하나님이 곁에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 하나님의 도움을 느낄 수도 없는 상황,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며 하나님을 기림으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시인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신앙의 진가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즉 성숙한 신앙은
- 형통한 가운데서보다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소박하지만 너무나 가치 있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시는 공중 권세잡은 사단으로 인해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에 직면하며 앞길의 막막함을 수시로 경험하는 성도들에게 과거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축복을 근거로 하나님을 향한 거록한 갈망을 끝까지 간직하는 것이 시련과 절망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전해 준다
43편 -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
(저자: 고라 자손, 분류: 시온시)
●호소와 탄원 (시편 43:1-5)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과 기도에 의하여 하나님께, 그의 재판관이시며, 또 힘과 인도자와 기쁨과 희망이신 하나님께 적당한 사랑의 표현과 함께 의뢰하고 있다.
Ⅰ. 그의 심판관으로서, 즉 그의 의로운 심판관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심판하시리라 는 것을 알았고, 또 (그는 자신의 정직함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자기를 위해 심판해 주실 것도 알았다(1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고 내 송사를 변호하소서."
거기에는 그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가 피고가 된다. 부당하게도 유죄 판결과 정죄를 받은 저희의 법정으로부터 그는 최고사법 재판소인 하늘의 법정으로 상고를 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내린 저들의 판결을 번복시켜 주시며 그의 결백이 드러나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거기에는 그에게 가해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가 원고이며 억울한 일을 복수해 주시는 그에게 자기의 진술을 제시하고 자기와 그들 위에 공의를 나타내 주십사고 기도드리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가 이와 같은 투쟁을 벌인 그 원수들은 누구였던가?
여기에는 그가 "경건치 않은 나라"혹은 "자비하지 않은 나라"라고 칭하는 일단의 죄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무자비한 자들은 경건치 못한 자들로 판명된다. 왜냐하면 자기 주인에 대해 경외감이나 사랑을 조금이라고 품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 동료되는 종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축은 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악인들 중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나쁜 자가 있으니 그는 사기성이 농후하며 불의한 자였는데, 아마 십중 팔구는 다윗에게 친절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아주 표리부동하고도 부정직하게 대하였던 사울을 가리킬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인물이 압살롬이라고 하더라도 성격 또한 별반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지옥밖에 그런 나쁜 자들과 나쁜 나라가 존재하는 한 아직 천국밖에 있는 선량한 자들이 가혹하고도 비천한 대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혹자는 다윗이 예언의 영에 의하여, 바벨론 유배시에 있던 유대인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이 시편을 지었으며 본문에서 의미하는 경건치 못한 나라는 갈데아라고 해석한다. 이 성구는 그들에게 매우 적절히 적용할 만하며, 그것이 단지 유사한 성서로서만 가능한 것은 성서의 어느 부분도 사사로운 해석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것을 의미했는지의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하나님께서 저희의 사용을 위해 그것을 의도하셨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2. 저들과 관련된 그의 기도는 무엇인가?
"나를 판단하소서."
그는 하나님이 죄 때문에 자기와 벌이신 언쟁에 대하여는 "내게 대한 심판에 착수하지 마소서. 그러시면 내가 유죄로 판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자기 원수들이 자기와 벌인 다툼에 대해서는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의롭다고 인정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향하여 내송사를 변호하소서. 내 편을 드시고 나를 위하여 주의 섭리 안에서 나타나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정직한 사유를 가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변호해 주시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내게 대한 저들의 뜻이 얻어지지 못하도록 내 주장을 옹호해 주셔서 나를 저들에게서 건지소서." 비록 우리의 적들이 멸망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구출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이 송사가 충분히 변호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의 힘으로서, 그의 전능한 힘으로서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보고 있다(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오, 내 하나님이시며, 내 힘이시니, 내 모든 힘은 당신께로서 유래하며 당신안에서 나는 스스로 강하게 되나이다. 당신께서는 나를 자주 강하게 하셨으며 당신이 없다면 나는 물과 같이 약해져서 당신을 위해 전혀 아무 일도 행할 능력이 없으며 견딜 능력도 없습니다."
다윗은 당시 영적 기쁨이 결여된 채로 슬퍼하며 다녔으나,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하였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계속 머무를 수 있으며, 영적 즐거움이 부족할 때에는 영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
— 다윗은 여기에서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나의 힘으로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당신께서는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은 저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어떤 울적한 염려를 하든지 간에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내 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내 대적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합니까? 그리고 나는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녀야 합니까?"
교회의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전능한 능력과 화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원수가 그의 발등상이 되는 날에는 그들과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 이러한 시인의 애절한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앞선 제42편과 연결하여 본시 전반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면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각성하는 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본절의 시인의 간구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촉구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Ⅲ. 그의 안내자로서 그의 충실한 길잡이로서(3절).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에 이르게 하소서."
그가 기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섭리에 의하여 자기를 추방으로부터 돌아 오게 하시며, 하나님의 성소가 주는 특권을 다시금 자유로이 향유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십사고 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자기 가족의 위안이나 자기 궁정의 기호물이나 오락물에 쏠린게 아니라 "성산과 장막"을 향하고 있다. 그는 전자와 같은 것들은 없어도 견딜 수 있으나 하나님의 장막만은 다시 보고 싶어 못견딜 지경이다. 그의 눈에는 그 장막보다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은 없다. 그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 이를 위하여 '그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소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당신의 은총의 열매로서 얻게하소서. 그것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과 그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는 선 이상을 바랄 필요가 없다. 그 자비와 진리는 충분하며 전부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이 매우 안전한 관리하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인도하시는 자들을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시며 그의 장막에 이르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제도화된 의식에 등을 돌리는 자들은 분명히 자기를 기안하는 자들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자신을 그와 친교하게 하실 것이며, 저 다른 세상에서 그의 모습을 대면하고 그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시라는 것이다.
일부 유대인 기자들은 여기의 "빛"과 "진리"라는 말을 구주 메시야와 그의 선구자 엘리야로 이해한다. 이들은 구약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위하여, 즉 진리와 빛의 성령을 위해 여전히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니, 빛과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체적 현존의 결여를 보충해 주사 우리를 경건의 신비 속으로 인도하시며 하늘에 이르는 길로 안내해 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그의 빛과 진리를 보내실 때에는 이 빛과 진리가 우리의 모든 가늠과 기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를 천상계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 빛과 진리를 따른다면 그들은 정녕코 우리를 위에 있는 성산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의 빛 , 그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한 이유는
- 당시 그가 처한 암울한 상황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인하여 여러 차례 ‘낙망'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심지어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업신여기는 악인듈의 횡포로 인해 시인은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고통에 핍싸이기도 하였다. 어는 앞선 제42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42:10).
- 아마도 시인은 마치 죄의 세력, 어둠의 세력, 거짓과 불의의 세력이 가득한 세상 한 구석에 버려진 듯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간절히 이르고자 하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정적 처소인 하나님의 성산이며 하나님의 장막이었다.
그러나 어둠, 거짓과 악득이 그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는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어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 시인에게 빛되신 하나님, 그리고 어떤 상황하에서도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친절한 사자처럼 보내셔서 자신을 인도헤 주실 것을 구한 것이다(Weiser). 이렇게 하나님의 빛과 신실하심이 보내어지면 현상황에서 어둠과 죄, 거짓외 권세를 의지하여 시인을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의 세력이 급속히 쇠퇴할 것은 자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본절에서 시인의 가장 본질적인 관심은 - 하나님과 친밀하며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
Ⅳ. 그의 기쁨으로서, 그의 대단한 기쁨으로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장막으로 인도해 주신다면 만일 그의 이전 자유를 회복해 주신다면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겠나이다"(4절). 그는 그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자.
💡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장막에 나아오는 자들은 제단으로도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종교 의식에 나아오는 자들은 스스로 자격을 갖춰야 하며 그리고 나서 특별한 의식, 즉 아주 감동적이고도 구속력 있는 제전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더 밀착하게 되고 좋게 된다.
💡 ‘단’
- 제사드릴 때 번제물을 올려 태우는 곳인데; 이 단어는 가끔 ‘기쁨’과 ‘즐거움’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함.
- 하나님의 단은 하나님과 헌제자의 기쁨이 되는 곳이다.
- 좀더 엄격히 말하면 이곳은
-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곳이다.
- 또한 죄를 지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가 속죄의 희생으로 용서를 받는 곳이다.
- 이곳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넘친다.
- 그런 점에서 시언은 자신어 하나님의 단으로 나아가는 것을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는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2.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그 일 가운데에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가슴으로 진심으로써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의식에 참석하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거룩한 의식에 참례하는 일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3.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저들의 지극한 기쁨으로서, 저희의 미래의 지복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재적 기쁨으로서 그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통상적 기쁨이 아닌 비상한 기쁨으로서, 감각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기쁨을 훨씬 능가하는 기쁨이 되신다.
원문에 나오는 성구는 매우 강조적이다.-즉 "내 기쁨의 즐거움 되신 하나님께," 혹은 기쁨의 극치되신 하나님께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은 그 일의 기쁨의 되셔야 한다. 우리 일에서 갖는 모든 희락은 하나님에게서 종결되어야 하며 우리의 모든 기쁨은 그 선물을 꿰뚫고 그 선물의 시여자에게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루가 시인에게는 더 가치 있고 소중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84:10)
4.우리가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에게서 얻는 위로는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이 되신 그에게 드려야 할 찬송의 내용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수금 타기에 아주 뛰어났었으며(삼상 16:16, 18), 그는 자기가 잘 하는 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써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이와 같이 찬송 받으셔야 마땅한 것은 그가 최선의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쁨과 감격이 생생하게 표현되는 본문은 앞선 2절의 내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앞선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방임해 두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원수들의 압제로 슬픔 속에서 방황하고 성소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 이에 반하여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최고의 기쁨을 누러며 하나님을 향하여 찬앙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이러한 2절과의 극명한 대조는 시인의 상태와 깊어 연관되어 있다.
- 원수에게 쫓길 뿐 아니라 비방당하는 자신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바라볼 때 시인은 탄식의 기도 외에 올릴 것이 없었으나(2절), 그의 내면의 깊은 신앙과 소망, 곧 능력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바로 그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바라블 때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 앞에 나아가 찬양을 드릴 수 있음을 기대하고 서원하게 하였던 것이다.
Ⅴ. 그의 희망으로서, 그의 결코 쇠하지 않으실 소망으로서(5절).
여기에서 다윗은 전처럼 자기의 낙심과 낙담에 대하여 자기 자신과 언쟁을 벌이는데 자기가 그런 것들에게 굴복한 것은 나빴다고 자인하고 그가 그렇게 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고 자백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그의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는 일에 대해 자기가 품었던 믿음에 의한 기대 속에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다. "그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시다." 그 점은 우리가 아무리 역설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것이 우리가 살고 죽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시는 제42편과 동일하게 원수로부터 조롱당하는 암울한 처지에 빠진 시인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기원하는 시온시이다.
그러나 본시에는 앞선 제42편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제42편이 시인 자신의 암울한 처지와 엄물하는 절망 및 뼈를 찌르는 듯한 아픔 등을 표현하는 데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한 반면 본시는 물론 원수의 압제로 인한 비통함이 드러나고는 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에배에 대한 사모와 찬양에 대한 열정이 더 부각되어 드러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