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2월 26일 주일 왕상 8:62-66 성전 봉헌식(대하 7:4-10)

Jeehyun 2023. 2. 25. 16:51

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9, 누가복음 12, 욥기 27, 고린도전서 13

묵상구절

8:62 이에 왕과 및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8:63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8:64 그 날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물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여호와의 앞 놋제단이 작으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8:65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과 칠 일 도합 십사 일간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강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큰 회중이 모여 그와 함께 하였더니

8:66 여덟째 날에 솔로몬이 백성을 돌려보내매 백성이 왕을 위하여 축복하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대하7:4-10

7:4 이에 왕과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니

7:5 솔로몬 왕이 드린 제물이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니라

7:6 그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이 레위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찬송하게 하던 것이라 제사장들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서 있더라

7:7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하게 하고 거기서 번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솔로몬이 지은 놋 제단이 능히 그 번제물과 소제물과 기름을 용납할 수 없음이더라

7:8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 동안 절기를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강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심히 큰 회중이 모여 그와 함께 하였더니

7:9 여덟째 날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제단의 낙성식을 칠 일 동안 행한 후 이 절기를 칠 일 동안 지키니라

7:10 일곱째 달 제이십삼일에 왕이 백성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내매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성전의 낙성식(열왕기상 8:62-66)

우리는 앞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며 자기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매우 즐거워하는 것을 읽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뜰에서 희희낙낙하는 것을 읽게 된다. 그들은 이제 지혜의 길에 대한 솔로몬의 말씀 즉 지혜의 길은 즐거움의 길이라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낙성식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건물이나 성전을 완성한 후 이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 는 감사 예식을 시작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신 20:5; 대하 7:5.9). 따라서 본문은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리고 곧이어 낙성식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 

Ⅰ.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참석하는 동안 기쁨과 만족을 풍성히 맛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1.솔로몬은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는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 마리였다.

이 숫자는 그 땅이 매우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면 전국의 가축을 씨도 남지 않게 하기에 족할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방인들은 기백 마리의 희생을 바치고도 스스로 통이 크다고 생각했으나(이방인들은 황소 백 마리의 제사를 hecatombs라고 불렀다) 솔로몬은 그들을 훨씬 능가했다. 그는 수천 수만 마리씩 바쳤던 것이다.

모세가 제단을 봉헌할 때는 화목 제물이 수소 스물 넷, 수양과 수염소와 어린 수양이 합해서 백 육십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민 7:88). 그 때는 백성이 가난하였지만 이제는 재물이 한층 많이 불어났으므로 보다 많은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화목제에 드려진 희 생 제물의 수효가 ‘소 이만 이천’과 ‘양 십이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그 제물의 양이 엄청난 것에 대해 그 수가 과장되었거나 사본상의 오류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Thenius).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과 같은 제물의 수효는 가능한 숫자이다. 우선 본문과 병행 구절인 대하 7:5에서도 본절의 제물의 숫자와 동일한 숫자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이전 다윗 당시에 30세 이상으로 제물을 취급할 수 있었던 레위인이 38,000여 명이었고(대상 23 :3) 제사장도 2-3천 명에 달한 것을 감안할 때 다윗 시대보다 더 큰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던 솔로몬 당시 이 숫자보다 더 많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섬기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무

엇보다 이같은 제사장의 수는 차치하고 율법상 제사 의식에서 제물을 잡는 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하는 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레 1:3-5)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제사장의 숫자나 레위인의 숫자에 있지 않다. 실상 제사장들은 오직 피를 제단에 뿌리는 순서를 집전하는 일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 본문은 제사에 참여한 이스라엘 회중이 ‘하맛 어귀에서 애굽의 하수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 전지 역에서 모였다는 언급(65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원래의 번제단으로는 제물을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을 구별해서 사용할 정도였다는 언급(64절)을 하고 있다. 이같은 본장 후미의 기록은 본장의 서두인 5절에서 백성들이 드린 제물의 규모로 소개되는 ‘그 수가 많아 기록 할수도없고셀수도없었더라’와문맥상수미쌍관적호응을이루고있다. 이는이스라엘의절 기와 관련해 볼 때에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성전 낙성식과 장막절이 연속되는 이 시기에 백성의 대다수가 각지에서 모여 각자 준비한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뿐만 아니 라 정규적인 유월절 의식 때에도 이십오만 마리의 양이 두세 시간 내에 제물로 드려졌다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참고해 보더라도 서전 봉헌식과 같은 역사적 대사건에 이 토록 대규모의 희생 제물들이 바쳐졌다는 사실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Keil). 한편 요세푸스 는 이같은 사실과 관련해 네로 시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유월절 제사에 희생 제물을 256.000마리 이상을 잡았지만 그 당시의 제사장 숫자는 솔로몬 시대에 비교해 오히려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풍성하게 심은 곳에서 풍성히 거두시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희생은 단 하루에 드릴 수가 없었고 그 절기 중의 여러 날 동안에 나누어 드렸다. 솔로몬의 식탁에는 하루 서른 마리의 황소가 올랐지만 하나님의 제단에는 수천 마리가 올라야 했다. 이와 같이 자기 몸보다 영혼에 더 많은 것을 투자하려고 마음먹는 자는 거의 없다. 화목제의 고기는 드리는 자의 것이 되었는데 솔로몬은 이것으로 백성을 대접한 듯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을 먹이셨다는 데 주목하자.

놋단은 이 희생들을 죄다 수용할 만큼 크지 못했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그들은 전 앞뜰 가운데에서 다수의 희생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64절). 혹자는 이 목적을 위해 흙이나 돌로 단을 전 앞뜰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서 희생 제물을 드렸으며 식이 끝난 뒤에는 철거하였다고 생각한다. 또 딴 이들은 맨 땅에서 희생을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관대하려고 하는 자들은 장소의 부족을 이유로 인색할 필요가 없으며 또 장소가 모자라는 일도 없다.

👉 성전 낙성식에서 번제, 소제, 감사제의 기름을 드림
*번제: 제물 전체를 불살라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충성 및 헌신(레9:12-14,16)
*소제: 곡물로 제물을 삼는 제사.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 때 기름, 유향, 소금 등을 섞어 불살라 드린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희생적 봉사를 상징(레7:12).
*감사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화목제의 한 종류.

화목제에는 1.감사제(겔43:27) 2.서원제(레22:18) 3.낙헌제(레22:18)

혹자는 이 목적을 위해 흙이나 돌로 단을 전 앞뜰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서 희생 제물을 드렸으며 식이 끝난 뒤에는 철거하였다고 생각한다. 또 딴 이들은 맨 땅에서 희생을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관대하려고 하는 자들은 장소의 부족을 이유로 인색할 필요가 없으며 또 장소가 모자라는 일도 없다.

2.솔로몬은 절기를 지켰다.

이 절기는 낙성 축제가 끝난 뒤에 계속된 것으로 초막절인 듯이 보여진다. 이 두 축제는 합쳐서 2주간 동안 계속되었다(65절). 그러나 그들은 "보라. 이 얼마나 지루한 일이냐!" 라고 말하지 않았다.

Ⅱ. 그들은 이 기쁨과 만족을 자기들의 집에까지 가지고 돌아갔다. 그들은 해산하면서 왕을 축복하였다(66절).

왕에게 박수 갈채를 보내고 그를 찬미하며 그에게 회중의 치하를 돌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고 모두가 매우 편안하고 유쾌하게 느꼈다.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의 선하심을 항상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들은 왕의 집안과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거룩한 의식을 필하고 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기뻐하며 우리 길을 계속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와 모든 신도들에게 선하셨던 것이다. 그 종 다윗은 구속의 언약을 따라 그 보좌를 세우고 확립했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으며 모든 신도들은 은혜의 언약을 따라 성별되고 위로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 우리가 만일 언제나 이 점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 ‘그 종 다윗과 … 모든 은혜(’핫토바’)를 인하여’
⇒ 성전 봉헌식을 마무리짓는 본절에서 성전 건축의 당사자였던 솔로몬 대신에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다윗이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은혜의 수혜자’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성전 건축이 솔로몬 왕의 위업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 왕에게 주어진 언약의 성취이며, 실질적 성전 건축자는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임을 나타낸다. 솔로몬은 다만 다윗의 계획과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백성들의 생각을 빌려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핫토바’)
: ‘그 선한 것’ →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성전 건축을 허락하시고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은혜를 뜻함. 이 단어는 66절에서 또한 ‘즐겁다’ 라는 의미로 번역됨.

기뻐하며(세메헴)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기뻐하며: 4:20에서 태평 성대를 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등장한 단어.
→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마치는 시점에서 마치 태평 성대를 누리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직역하면 ‘마음이 선하다’
→ 백성들의 즐거움이 막연한 것이 아닌 앞의 본문의 결과, 즉 하나님이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선한 것(은혜)’에 대한 결과임을 나타낸다.
*‘마음’
성경에서 ‘마음’을 뜻하는 명사 ‘레브’는 감춰져 있는 고요한 인간의 내적 감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지·정·의를 모두 포괄하는 인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이들이 놀라운 기쁨을 가슴 뿐 아니라 춤과 노래와 잔치의 흥겨움 등과 같은 모든 측면에서 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성전 봉헌식에 대한 결론적 평가에 해당하는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민족 전체와 왕에게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하였음을 깨닫고
→ 이를 매우 기뻐하여 흥겨움과 즐거움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전 봉헌식 과정을 다룬 본장은 성전 자체의 의미를 규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성전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는 본서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훼파를 경험하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차 독자로 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본장을 통해 훼파된 성전 자체보다도 모세와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셔서 성전을 완성케 하셨던 하나님께(15, 56절) 시선을 고 정하여 비참한 상황에 처한 자신들도 끝내는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성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자신들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오히려 솔로몬이 거하는 왕궁보다 더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성전이 훼파된 상황이라할지라도 그 성전이 있는 편을 향해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실 것을 저자는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서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29.30절).

또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맥 사이에는 ⇒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회개의 촉구가 담겨져 있다(35절).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 원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께 돌아오는 참된 회개가 요구됨을 밝힌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참된 회개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그들의 마음을 성전 삼아 영원히 거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암시하고 있다.